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34화 (234/248)

234. 나리트의 분노

스스로를 별의 의지라고 자칭했던 여인의 목소리.

바로 그 목소리였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내가 세르케티의 대사제를 죽였을 때, 나는 그의 기억과 경험을 모두 흡수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정보의 홍수는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내가 죽인 대사제의 기억과 경험을 갖게 된 나는 마치 세르케티의 대사제로 인생을 한 번 살아본 것과 다름이 없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것은 인상적이면서도 혼란스러운 경험이었다.

내가 지구 출신의 인생 2회차 기사인 윌리엄 버로스가 아니었다면 내 인격이 세르케티의 대사제에게 잡아먹혔을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내 인격의 중심을 잡는 것에 성공했고, 대사제의 기억은 영화를 본 경험처럼 치부해 버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찬찬히 그의 기억을 되짚어 보니 모든 기억을 내가 흡수한 것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의 대사제와 별의 의지라고 자칭하던 어느 여인과의 대화는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만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기억의 마지막은 여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끝났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 여인은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윌리엄 버로스인 내가 태어나기 수십 년 전의 기억일 텐데 말이다.

그런데 그 기억 속의 목소리가 다시 내게 들려온 것이다.

“당신은 누군가?”

[별의 의지]

“나를 아나?”

[선택된 자]

“별의 의지라니 그게 이름인가?”

[그것은 나의 본질을 의미한다. 나는 땅과 바다, 하늘에 있는 모든 생명이 원하는 것을 이루도록 준비하는 존재다]

모든 생명이 원하는 것?

그게 뭔데?

별의 의지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빛무리가 세르케티의 대사제에게는 꽤나 친절하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준 것 같았는데, 내게는 선문답이나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점에 대해 불평을 내뱉지도 못했다.

짜증을 느낌과 동시에 내가 질문을 말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냥 머리속으로 생각을 했을 뿐인데 빛무리가 대답을 한 것이다.

대답 역시 말소리로 한 것이 아니었다.

정신이 확 드는 것이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내가 들었다고 생각한 목소리는 실제로 들은 것이 아니었다.

고막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두뇌 속에 직접 꽂힌 것이다.

이것이 심마도 망상도 아니라면 더 무서운 일이다.

내 정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 적어도 내 마음을 읽고 의사전달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나를 주시한 것이다.

이러면 빛이 내 눈앞에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

보고 듣는 것 모두가 실체가 없을 가능성이 있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비우고 마음에 장벽을 쌓는 상상을 했다.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을 전부 읽힐 수는 없었다.

내게는 많은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죽는 순간 시간을 거슬러 온 것.

이곳의 원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것

신비에 접한 자들을 여럿 죽이고 그들의 능력과 기억을 흡수한 것.

상태창을 가지고 있는 것.

지구 출신인 것까지.

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인간이라고 하기도 어려울지 모르겠다.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당신에 대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나를 안다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 간에 영향을 끼친다. 당신은 죽은 후에 회귀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결과를 거부함으로 과거를 비틀었고, 과거의 선택을 바꿈으로 현재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해할 수 없었다.

계속 인생의 선택을 바꾸고 반복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인가?

영원히?

[그것은 아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자들의 선택이 고정되면 과거도 고정된다. 시간은 영원히 맥동치는 것이 아니다. 선택이 끝나면 시간의 진동은 멈추고 현상은 고정된다]

내 의문에 대한 답은 금방 주어졌다.

물론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내 마음속에 쌓은 장벽은 별 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이러면 내 비밀도 다 털어갔다고 봐야 하나?

별의 의지라고 하는 존재가 내 비밀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별의 의지는 내 비밀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계속 내게 설명을 시도했다.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으며, 아주 소수의 인간만이 자신의 선택으로 운명을 비틀 수 있다.]

뭔가 아주 오래된 구닥다리 결정론을 듣는 느낌이었다.

한 3천 년은 묵은?

신도 인간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중2병스러운 대사가 생각났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대사는 아니었다.

모든 것이 운명에 달렸다면 현재를 개선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너무 허무하다.

[인간의 모든 행동과 선택은 그가 행동하고 선택하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것은 시소의 한쪽을 누를 때 반대쪽이 위로 올라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입력되는 정보에 따라 미리 정해진 동작을 할 뿐이다.]

나는 더이상 반문하기를 멈췄다.

별의 의지는 점점 이상한 말을 늘어놓았다.

내 상식과도 그리고 내 철학과도 어긋나는 내용이었다.

별의 의지가 떠드는 말이 소음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다시 말한다. 아주 소수의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가진다. 그들은 선택된 자들이고 시간의 진동을 멈추는 자들이다]

나는 그녀의 설득을 비웃고 말았다.

“그렇다면 내 행동과 선택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겠군 그래? 내가 칼마르로 가는 것도, 내가 리네아의 제안을 수락한 것도, 내가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사람을 죽인 것도! 모두 미리 정해진 것이었나보지?”

[아니다. 당신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다. 선택된 자이고, 또한 선택하는 자이기도 하다]

“나를 특별취급 해서 감사하기는 한데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거요? 내가 선택된 자라는 증거라도 있습니까?”

[신의 파편이 당신을 깨웠기 때문이다. 시간을 맥동치게 할 수 있는 자는 신이 되는 길에 설 수 있는 특별한 존재다]

직감이 나를 찔렀다.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저 말속에 있다.

“나를 깨웠다고?”

그러나 별의 의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기다렸지만, 그녀의 침묵은 계속 되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말을 내게 이해시키기 위해 같은 말을 다른 방식으로 계속 반복했던 자답지 않은 태도였다.

하지만 실제로 입이 있는지조차 모를 빛무리의 입을 강제로 열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대답할만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 내게 나타난 겁니까?”

[신의 파편을 모아라. 신비에 접한 자들은 신의 파편을 가지고 있다]

조각난 기억 속의 대화가 떠올랐다.

5개의 대륙과 4개의 바다를 돌아다니며 신의 파편을 모으라는 권유 말이다.

제법 야망이 있어 보였던 젊은 시절의 대사제조차 거부했던 제안이었다.

내 대답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별로 흥미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파편을 모으는 자들은 네게 흥미를 가질 것이다. 당신은 이미 선택된 존재니까. 당신이 가만히 있어도 그들이 찾아올 것이다]

젊은 시절의 대사제를 설득하기 위해 써먹었던 협박이 나를 향해 반복되었다.

뻔하지만 효과적인 협박이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적들을 대비하며 불안에 떠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적을 제거하는 것이 더 나을 테니까.

실제로 대사제는 그 협박을 진지하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종교단체를 이용해서 사람을 납치하기까지 했지.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나를 위협할만한 자가 있다면 내가 흡수한 신비의 능력이 내게 경고할 것이다.

이 정도라면 별의 의지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을 것 같았다.

곧 사라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가 사라지기 전에 궁금증이나 하나 해결하기로 했다.

“나를 죽이겠다는 자가 찾아온다면 싸워서 이기면 그만이니까 신경 쓸 것도 없소.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상태창, 그것은 당신과 관련이 없지요?”

[......그것은 온전히 당신에게 속한 것이다]

역시 별의 의지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말은 많지만 내게 실질적인 위협이 될 만한 존재도 아니다.

내 예지는 저 존재가 별로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 거짓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일단은 말 많고, 오래 묵은 존재 정도로 정의하자.

원하는 것은 선택받은 자들을 꼬드겨서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이고, 실질적인 위험은 없다고 생각하자.

그제서야 나는 제대로 평상심을 되찾았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의 등장과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내 마음도 다시 가라앉았다.

말로만 떠드는 저것은 내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내 예감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상대를 편하게 생각하게 되자, 내가 홀로 고민하던 문제를 던지는 것도 가능해졌다.

나는 당장이라도 내게서 떠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녀에게 나의 두려움에 대해 물어보았다.

“신의 파편이라는 것. 사람이라면 다 가지고 있는 것이 맞지요?”

내 질문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다.

별의 의지는 내 의식에 갑자기 뛰어들었을 때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대답을 피해 도망치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대답을 들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곧 대답이었다.

나는 숲의 현자가 정말 미친놈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

거대한 신전은 온통 붉은색의 돌이었다.

기둥과 벽, 지붕까지 붉은색의 돌이 쓰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피로 색칠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돌에서는 비가 오는 날이면 피비린내 같은 냄새가 나기도 했다.

신전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평소의 신전은 조용한 편이었다.

신전을 지키는 병사와 거인 몇 명, 그리고 신의 수발을 드는 신녀 몇 명이 신전을 돌아다니는 사람의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 신전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멀쩡하게 서 있던 신전의 기둥이 몇 개 쓰러진 채 부러져 있었고, 그 기둥이 받치던 지붕의 일부 역시 무너진 상태였다 .

지배하는 자, 나리트라고 불리는 타르바 왕국의 국가신이 분노한 결과였다.

“감히 내 노예를 죽여! 그리고 머리를 성벽에 장식품으로 매달아!”

나리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기둥을 밀어버렸다.

신전 주변에 있는 자들은 모두 넘어가는 기둥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타르바 왕국의 국왕은 다급하게 신전으로 달려와서 바닥에 부복한 채 나리트의 분노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나리트는 국왕이 보는 앞에서 과시하듯 아직 멀쩡한 신전의 기둥 하나를 또 밀어버렸다 .

돌로 된 기둥이 넘어진 후 바닥에 부딪친 충격으로 3등분으로 쪼개졌고, 지붕의 일부가 다시 무너져 내렸다.

이것은 인간은 물론이고 거인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노예가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고 머리까지 성벽에 걸려서 조롱을 당하는 것은 신을 자처하는 나리트에게 위협이었다.

자신의 특별함을 다시 한번 추종자들에게 확신시킬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한 나리트는 국왕의 앞에 섰다.

“네 놈이 그렇게 간절히 원해서 노예를 하나 내려줬더니 죽어버렸다.”

“부디 용서를!”

“그놈 하나를 쓸만하게 만들기 위해 죽은 인간이 천 명이 넘는다. 더구나 지금 당장은 거인으로 만들 적당한 후보조차 없다.”

“원하신다면 제 기사들이라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철저하게 숙이는 국왕의 태도에 나리트의 분노가 약간 누그러졌다.

하늘로 솟아있던 머리카락은 정상적으로 내려앉았고, 불꽃이 튀고 있던 주변의 공기도 유황 냄새가 좀 날 뿐 정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국왕의 태도는 여전했다.

그는 나리트의 앞에 부복한 채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보시오. 현손.”

“예. 나리트 님.”

“내 노예를 보낸 곳이 프리시오 공작령이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그자에게 적당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오. 즉시 준비하시오.”

승리를 위해 다시 한번 거인을 원했던 자들은 거인 대신 거인의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