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심마가 아니다
나는 즉시 바르드레 남작을 수소문해서 데려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채권을 팔기 위해 중간 규모의 상단주 한 명을 방문하고 있었던 그는 내가 호출 명령을 내린 지 얼마 안 되어 모습을 나타냈다.
생각보다 빠른 반응이었다.
“제국의 서쪽 경계 너머의 왕국들에게 대한 정보가 필요한데 알고 있는 자가 거의 없더군요. 칼마르의 상인들이라면 장사를 하며 안 다닌 곳이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조차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변경백 가문 출신이라면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백작 각하. 제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최선을 다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르드레의 허리도, 혀도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내게서 지원을 끌어내지 못하자, 칼마르까지 와서 도시의 유력자들에게 로비를 하며 돌아다니고 있다더니 배운 바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타르바 왕국에 대한 정보입니다. 제국으로 원정을 나온다면 얼마나 되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입니까?”
“유목 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국민이 절반 가까이 되니까 기병으로 동원할 수 있는 자들이 많기는 할 겁니다. 하지만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들의 왕도 모를 겁니다.”
이런 것이 행정체계가 잡혀 있지 않은 국가의 전형적인 문제다.
아마 그들의 왕은 자신이 통치하는 국민의 숫자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거다.
“그래도 억지로라도 숫자를 추론해야 한다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원정까지 나올 수 있는 숫자는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습관처럼 매년 약탈을 하러온 자들도 기껏해야 수백 명 정도의 규모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유목민치고는 생각보다 규모가 적군요.”
“그러나 기동력은 무척 좋았습니다. 전투력도 나쁘지 않아서 우리가 매년 입는 피해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다른 왕국들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렇습니다. 다른 곳도 타르바 왕국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단지 약탈을 나가는 장소가 어느 변경백의 영지인지 아니면 공작령인지 그런 부분만 차이가 날 뿐이었습니다.”
소규모 기병대에 의한 연례적인 약탈이 반복되었지만, 토벌은 불가능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독자적인 장거리 원정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프리시오 공작이 원정을 나서면 보조병으로 한몫을 할 정도는 충분해 보인다.
말을 탈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전사가 될 수 있는 유목민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보조병으로 나올 숫자 역시 적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자들이 타르바 왕국 말고도 셋이나 더 있다.
절대로 쉽게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몽골 기병은 하루에 100km를 이동했다고 한다.
대규모의 보병이 움직이는 속도와 비교한다면 심하게는 10배의 차이가 나는 셈이다.
움직이는 속도가 10배나 빠른 군대라니.
이러면 제대로 된 전투가 불가능하다.
상대의 위치를 알 수가 없으니 방어에 전념할 수밖에 없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다보면 패배는 기정사실이 된다.
그리고 승패와 상관없이 영지는 엉망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전쟁이 나를 스토킹하는 모양이다.
나는 평화에 관심이 더 많은데.
한숨 잘 자고 일어났더니 적군이 백작성을 둘러싸고 있는 꼴을 발견하고 싶지 않다면 대책을 세워야 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바르드레 경도 알겠지만, 프리시오 공작군의 이번 원정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인이 용병으로 참전을 했습니다. 그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해 포로로 잡은 기사까지 고문을 했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혹시 짐작이 가는 것이 있습니까?”
“저희도 피해가 커서 조사를 했었습니다. 프리시오가 용병을 모집할 때 지원한 자라고 들었습니다.”
“눈가림입니다. 누군가가 뒤에 있는 겁니다. 그 정도 되는 자가 아무런 배경없이 하늘에서 떨어지듯 나타나는 일은 없습니다.”
바르드레는 내 말에 조금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당신은? 이라고 묻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질문을 무시하고 대답을 재촉했다.
바르드레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간신히 떠올린 기억을 말해주었다.
“상당히 오래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타르바 왕국에 거인이 산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신전에 여러 명의 거인이 있어서 신이 노예로 부린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듣자마자 쎄한 느낌이 몰려왔다.
바다 위에서 죽였던 대주교와 비슷한 놈이 타르바 왕국에 자리잡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거인족이 아닌 거인의 경우도 설명이 가능해진다.
“신이라고요?”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신이니 뭐니 하는 것은 사기 아닙니까? 오래전에 소문만 있었을 뿐이지 실제로 거인을 본 사람도 없습니다. 아마 신비에 접한 누군가가 자신이 특별한 자라고 포장을 잘한 모양입니다.”
“사기를 쳐도 아주 크게 사기를 친 모양이군요. 자그마치 왕국을 속여 넘겼으니 말입니다.”
내 말에 바르드레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석고 미개한 자들에 대한 비웃음이 섞인 반응이었다.
이것이 정상적인 제국 귀족의 반응이기는 하다.
하지만 신의 파편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타르바 왕국과 그곳에 있다는 신전에 대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칼마르에서 오랫동안 휴식을 취하는 것은 내게 허락된 사치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정보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했다.
그래야 다른 자들도 쓸만한 정보를 가져온다.
나는 농담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바뀐 분위기에 바르드레 역시 말을 멈추고 내 말을 기다렸다.
나는 바르드레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줄 생각이었다.
“채권을 팔러 다니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몇 년 내로 프리시오를 향한 원정군이 구성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를 위해서 준비하는 중입니다.”
“음. 채권이라.”
고개를 갸웃하는 내게 바르드레는 다급하게 자신의 계획을 밝혀왔다.
“변경백령에 두고 온 가문의 자금과 토지에 대한 권리를 근거로 발행한 채권입니다.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면 원정군이 구성될 때 저희도 용병을 모집해서 따로 군대를 꾸릴 생각입니다.”
“상단주나 의원들이 관심을 보입니까?”
“아무래도 변경백령을 회복해야 상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바르드레는 내 질문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제대로 팔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게 정상이다.
칼마르의 상인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저런 말도 안 되는 채권을 사겠나.
설사 복권을 구입하는 느낌으로 채권을 구매한다고 하더라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후려쳐서 헐값에 구매할 것이다.
그러나 상업적인 가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면을 고려한다면 바르드레가 발행한 채권은 나름의 값어치가 있다.
귀족연합자치령에서 잔존 변경백 세력을 지원하고, 프리시오 공작과 각을 세우고 있음을 널리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양다리를 걸치려는 자들에게 경고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내가 구입하지요.”
“예?”
“채권의 절반을 가져오도록 하십시오. 액면가에 구입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바르드레는 내 말에 감동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제대로 감사하다고 말도 하지 못하고, 눈동자까지 촉촉해지는 것을 보니 채권을 팔아보겠다고 다니면서 그동안 당한 수모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제국의 변경이라지만 그래도 대를 이어서 내려오는 영지귀족이자 군사귀족의 후계자였다.
그런 귀족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가를 팔러 다니는 것 자체가 모욕적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권을 생각해내고 심지어 그것을 팔아보겠다고 나선 것을 보면 바르드레 남작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그에 대한 평가를 확 올렸다.
만약 프리시오 공작령까지 확보할 수 있다면 바르드레 남작을 현지 대리인으로 내세우는 것도 생각해 봐야겠다.
내가 알아낸 사실과 추론을 사라 남작 부인에게 알리자 프리시오 공작령을 향한 칼마르의 시선이 한층 강화되었다.
특히, 대규모 기병 집단에 의한 기습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프리시오 공작령에 잠복해 있는 첩자들에게 전서구를 잔뜩 보냈다.
한마리라도 조기경보에 성공하면 된다는 각오로 돈을 쏟아부은 것이다.
그러나 타르바 왕국에 침투해서 거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보겠다는 내 제의는 단호하게 거부되었다.
리네아는 물론 사라 남작 부인, 마스터 요한까지 모조리 반대에 나선 것이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백작이나 되는 사람이 첩보전의 최일선에 서는 것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설사 상황이 변해서 내가 전장에 나간다고 해도, 되도록이면 출산 뒤로 미루어 달라는 리네아의 요청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 대신 마스터 요한이 키운 기사 몇 명이 타르바 왕국을 비롯한 서쪽 경계 밖의 왕국들에 침투해서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못한 남편 노릇과 함께 백작령 전반을 살펴보기로 했다.
집중적인 수련 역시 함께였다.
마스터 요한에게 오르벤 강체술을 배운 것을 마지막으로 집중적인 수련을 거의 하지 못했기에 이번 휴식은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는 매일매일 동일한 하루를 반복했다.
오전에는 수련하고, 오후에는 백작령을 감찰하고, 저녁에는 리네아와 시간을 보냈다.
좀 이상한 이야기지만 지금이 두 번째로 깨어난 인생에서 가장 조용하고 평안한 시간이었다.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오래가기 힘든 평온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되도록 오래 이 평온을 누렸으면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달린 것이 아니었다.
*
마스터 요한이 오르벤 강체술을 내게 훈련시킬 때, 오르벤 강체술은 신비를 접한 자들의 특별한 능력을 흉내내고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러나 신비를 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 지금은 오르벤 강체술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신비를 접한다는 것은 신의 파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의 육체인지 능력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편린을 가지게 된 사람은 아주 미약한 신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것이 신비에 접한 자들의 능력이다.
하지만 아르벤 강체술은 신비를 접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육체적인 능력을 강화시켰다.
그렇다면 혹시 신의 파편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비에 접한 자라는 것도 단순히 신의 파편을 많이 가진 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숲의 현자가 수많은 인간들을 땅을 통해 흡수하면서 능력을 발휘했던 것을 기억했다.
단순히 에너지원으로서 인간의 몸이 필요한 것이었다면 가축을 사용해도 되는 문제였을 것이다.
인간이나 가축이나 육체의 구성성분이야 다를 것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숲의 현자는 구태여 위험하고 번거롭게도 인간을 제압해서 제물로 썼다.
특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갑자기 나는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모든 인간에게 아주 작은 신의 파편이라도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신의 파편을 모두 모아야 죽었던 신이 다시 살아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모든 인간을 하나로 합쳐야 하는 것일까?
그러면 이 세상에는 신이 된 인간 하나만 남는 걸까?
그것이 별의 의지가 원하는 것일까?
나는 오르벤 강체술의 기법을 이용하여 천천히 호흡하면서 내게 달라붙은 두려움을 떨쳐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호흡이 깊어지고 내면을 관조하는 내 시선도 깊어질수록 내가 느끼는 두려움은 점점 강해졌다.
이것은 심마일까?
아니면 진실을 알게 된 자의 두려움일까?
하지만 의문이 두려움을 몰아낸 순간 겉잡을 수 없이 강렬한 흐름이 호흡을 매개로 내 몸의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고 흐르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어두움 속에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비로소 눈을 뜨고 내 앞을 직시했다.
빛이 내 앞에 있었다.
그리고 빛은 내게 말했다.
[심마가 아니다.]
기억에 있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