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화약무기는 포기할 수 없다.
폭발하는 가루.
그렇다. 화약이다.
나는 해적 마을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이 세상에도 화약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중세 정도의 문명에 떨어진 현대 지구인이 화약의 존재를 알게 되면 당연히 할 만한 일을 시작했다.
화약 무기의 개발에 나선 것이다.
물론 현대처럼 엄청난 위력의 화약무기가 개발될 것이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다.
갑옷을 뚫어 버릴 수 있는 수준의 총.
딱 그 정도가 내 기대치였다.
그러나 나는 개발을 시작하자마자 그 정도의 기대치조차 너무 높게 잡은 기대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의 문명 수준으로는 총을 제작할만한 품질의 철을 제련하고 가공하는 것부터가 넘을 수 없는 고개였다.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대장장이조차 총열로 쓸만한 쇠파이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제대로 된 화약은커녕 폭죽 수준에 불과한 화약을 넣고 터뜨려도 파이프가 터져나갔다.
쇠파이프를 쇠띠로 둘둘 두르고 나서야 쇠파이프 중간의 파열은 막았지만, 뒤쪽의 파열은 여전히 막을 수 없었다.
별짓을 다해도 쇠파이프의 끝이 터지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다.
아예 주물로 작은 대포를 만들어서 총 대신 들고 다니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주물이 깨지지만 않으면 말이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과거에는 기술자가 아니라 영업맨이었고, 지금은 군인이자 정치가 겸 행정가다.
철을 두드리고 화학물질을 만지는 것은 두 번째인지 세 번째인지조차 헷갈리는 내 인생에서 접해본 적도 없었다.
나는 전형적인 현대인 바보인 셈이다.
사용하는 법은 알지만 만드는 법은커녕 원리조차 모르는 사람 말이다.
내 한계를 깨닫는 순간 나는 화약무기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포기했다.
쓸만한 화약무기를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자본을 퍼부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데다가 과연 만들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대신 화약 그 자체의 파괴력을 개선하는 실험에 약간의 개인적인 투자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것만으로도 휘청할 정도의 투자이기는 했다.
부자는 내 부인이지 내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돈 쓸데는 많은데 폭죽을 가지고 엉뚱한 짓을 한다는 말을 듣기 싫다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실수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꼬투리라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마르의 공동 백작이라는 내 지위를 노리는 자는 아직도 적지 않았다.
내 개인 재산은 남작 작위에 딸려온 몇 개의 산골 마을과 현금이 전부였다.
만약, 남자에게 좋은 약에 대한 권리를 팔아서 만든 돈이 아니었다면 약간의 개인적인 투자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일이 진행되기까지는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화약 실험에만 매달려 있을 수 없었다.
제국이 분열한 후, 온갖 종류의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실험실보다는 전장이 내가 있을 곳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내가 실험계획을 짜기는 했지만, 실험 그 자체는 나와 연이 있었던 바스무스에게 맡겼다.
바스무스는 그의 동생들이 백작성에서 일하는 이상 나를 배반할 수 없다는 확실한 족쇄가 있다.
그 족쇄가 절대로 끊어질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내가 세운 실험계획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바스무스의 손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결국 성과가 나온 것이다.
사실 실험은 단순했다.
폭죽으로 쓰는 화약의 성분비율을 바꿔가면서 폭발 실험을 반복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시간은 많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스무스는 농부 출신답지 않게 내 생각보다 빠르게 성과를 낸 것이다.
나는 실험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실험실이 있는 르하베트로 출발했다.
르하베트는 내 신분을 귀족으로 만들기 위해 리네아가 내게 준 영지였다.
이제 처음으로 방문하는 곳이지만 내 귀족 신분의 근거가 되는 땅이라서 나름 중요하게 생각하기는 했다.
아무리 바빠도 세금은 잊지 않고 걷을 정도로 말이다.
르하베트는 내가 상상한 그대로의 산촌이었다.
농사 약간, 사냥 약간.
산에서 이것저것 채취해서 물물교환을 하고 돈도 사는 전형적인 산촌이었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먹고는 산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르하베트에 도착하자마자 마을의 촌장에게 바스무스의 실험실로 나를 안내할 것을 명령했다.
촌장은 나를 마을 외곽에서도 좀 떨어진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바스무스는 보고서를 내게 보내고 언제 내가 오나 노심초사 나를 기다렸던지 내가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실험실에서 달려나왔다.
“백작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고생했다. 바스무스. 실험에 성공했다는 보고서를 받았다. 내게 그 결과를 보여다오.”
만나자마자 화약 실험에 대한 성과를 재촉하는 내게 바스무스는 미리 준비했던 화약과 항아리를 가져왔다.
“폭죽의 기본 재료에 유황과 숯을 섞어서 만든 폭죽 가루입니다. 불을 붙이면 항아리를 박살낼 정도로 강하게 폭발합니다. 폭발할 때는 위험하니까 통나무로 만든 벽 뒤에 계셔야 합니다.”
바스무스는 도기로 만든 작은 항아리에 화약을 담은 더 작은 항아리를 집어넣고 모래로 도기 사이를 채웠다.
그리고 도화선으로 쓰는 천에 불을 붙였다.
천의 길이는 충분해서 그가 통나무로 만든 벽 뒤로 도망치고 난 후에야 불이 화약에 닿았다.
불이 화약이 담긴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항아리는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도기 파편과 모래를 흩뿌리며 터졌다.
날아온 도기 파편 중의 하나가 통나무 벽에 박힐 정도였다.
이 정도의 위력이면 합격이다.
항아리의 구조를 조금만 개량한다면 충분한 살상력을 가질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나는 바스무스에게 다음 지시를 내렸다.
“손톱 절반 정도 크기의 철편을 모래에 섞어서 넣도록 하라. 비율은 철편 하나에 모래 둘 정도면 될 것 같군. 그리고 철편은 되도록 작고 날카로운 것이 좋겠다. 항아리의 입구를 밀봉하고 기름을 먹인 천을 도화선으로 해서 불을 붙여서 던져도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라.”
“어디에 쓰실 것인지······”
“바다에서 사용할 것이다.”
평생 농촌에서 살아온 바스무스는 내가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를 안내한 촌장은 내가 한 말을 알아들었는지 눈이 커졌다.
그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항아리를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촌장.”
“예. 백작 각하.”
“종군한 적이 있나?”
“젊었을 때 영지군으로 봉사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제 손자가 영지군으로 봉사하고 있습지요.”
“역시 그렇군. 마을은 앞으로 삼 년간 면세다. 대신 마을 주민들은 바스무스를 도와서 터지는 항아리를 만들어야 한다.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백작성으로 요청하라.”
“얼마나 만들어야 할지요.”
“5백 개로 하겠다.”
“알겠습니다.”
촌장은 딱 필요한 말만 했다.
마음에 드는 처신이었다.
그러나 이 마을에는 촌장 말고도 사람이 있다.
나는 경고를 할 필요를 느꼈다.
“이 일은 기밀이니까 함부로 떠들 일이 아니다.”
“입단속을 철저히 하겠습니다.”
“도시에 나가서 술 먹고 헛소리를 하는 자가 나오면 이곳에 관심을 갖는 자가 나올 수도 있겠지. 그렇게 되면 너희에게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생길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바스무스를 돕는 자는 최소한으로 하겠습니다. 그들의 입은 제가 철저하게 막아놓겠습니다.”
“좋다. 모든 일이 다 마무리되면 촌장은 내게 와서 포상금도 수령하라.”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바스무스. 부탁한다.”
“염려 놓으십시오. 백작 각하.”
촌장이 일머리가 있는 사람이라서 다행이었다.
나는 리네아에게 보여줄 항아리 몇 개를 챙긴 후 르하베트를 떠나 칼마르로 향했다.
*
리네아는 전보다 더 배가 나와 있었다.
그러나 전보다는 더 편하게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주치의가 그러는데 나중에는 힘들어지겠지만 아직은 괜찮다고 하네요.”
“그래도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리네아.”
“물론입니다. 조심하고 있어요. 시녀들도 언제나 내 옆에서 대기상태지요. 그런데 그 항아리는 뭔가요?”
“폭발하는 항아리입니다. 물론 안전 때문에 내부에 있는 폭죽 가루는 제거한 겁니다.”
나는 리네아에게 화약을 제거한 항아리의 내부 구조를 보여주며 항아리의 사용법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리네아는 내가 어디에 이 항아리를 쓸 것인지 금방 알아챘다.
“당분간은 우리가 성에서 외부의 공격을 방어할 일은 없을 테니, 바다에서 프리시오 공작을 공격하려는 모양이군요.”
리네아의 추측은 정확했다.
수류탄처럼 사용할 수 있는 이 작은 항아리는 불이 필요하다는 제약 때문에 야전에서 써먹기는 영 좋지가 않다.
그러나 성을 지킬 때와 해전에서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내 속내를 리네아에게 털어놓았다.
“그렇습니다. 리네아. 나는 프리시오 공작측이 바다로 다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들이 바다로 나온다면 이번에는 그들의 배를 모조리 파괴해서 해전을 벌일 수 있는 능력을 거세해야 합니다. 섬국가들과 귀족연합자치령에서 바다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면 프리시오 공작을 천천히 말려죽이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당분간은 전투가 없으리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던데요? 그리고 우리는 프리시오 공작측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해 당분간 평화를 유지할 계획이 아니었던가요?”
“물론 육지에서는 그렇습니다. 육지에서는 우리나 프리시오 공작쪽이나 대규모 원정군을 보낼 여력이 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바다쪽은 달라요. 나는 공작의 아들들 사이의 후계 경쟁이 전쟁의 원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리네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프리시오 공작측에 박아넣은 첩자들에 의해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우리에게 흘러들어온다.
우리가 포섭한 첩자들 중에는 상당한 고위직도 있어서 후계경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는 것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후계경쟁에서 밀리는 아들들 중 하나가 공을 세우기 위해서, 또는 별도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바다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네아는 내 의견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가장 최근에 들어온 첩보에 의하면 프리시오 공작이 직접 타르바 왕국의 왕족인 쿠사에게 원군을 요청했다는 말이 있어요. 뱅트손의 영역까지 점령하겠다고 공언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다고 하네요.”
“믿기 어려운 이야기군요. 만약 그렇게 되면 공작의 둘째에게 힘을 실어주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요. 다른 아들들의 반발도 반발이겠지만 프리시오 공작의 나이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소문입니다. 헛소문이 아니라면 뭔가 노림수가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지요? 저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새로운 첩보를 기다려봐야 할 것 같네요.”
생각보다 평화의 시기가 길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프리시오 공작의 동맹 세력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원정군의 파병에 대한 소문이 돌아다닌다면 적어도 그럴 만한 저력이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한다는 소리다.
“아무래도 타르바 왕국이 신경이 쓰입니다. 바르드레 남작과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겠군요.”
바르드레 남작은 아직 칼마르에 머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