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30화 (230/248)

230. 모두가 휴식을 요구할 때

바르드레 남작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할지는 예측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병력을 구하려는 것이다.

이곳에서 프리시오 공작령까지의 거리가 멀다고 해도, 이익을 좇는 상인의 왕래는 계속 이어져 왔다.

사람이 왕래하고 물품과 황금이 흐르면 정보도 같이 흐를 수밖에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프리시오가 변경백들을 죽였다는 것은 나 같은 고위 귀족이나 받아보던 첩보였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지금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소문이 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나름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제국의 경계를 지키던 반독립적인 귀족들이 영역확장을 꾀한 황제 참칭자에 의해 몰살당한 사건이다.

이것은 과거의 제국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신호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국이 둘로 쪼개졌다고 인식했다.

귀족연합자치령으로 느슨하게 묶여 있는 제국 중부와 동부가 한 부분이고, 프리시오가 장악하는 데에 성공한 제국 서부가 다른 한 부분으로 말이다.

귀족연합자치령이야 귀족들의 자치권을 존중하고 건드리지 않았으니 어떻게든 굴러가는 것이겠지만, 프리시오 공작가에서 잡음이 별로 나오지 않은 것은 의외였다.

프리시오 공작가가 원체 오랫동안 제국 서부의 지배적인 가문으로 군림해와서 그런지 다른 지역과 달리 황제 선언에 반발하는 휘하의 귀족들이 없는 모양이다.

반발할만한 두 개의 세력, 리딕슨 공작가와 변경백들은 모두 목을 쳐버리는 것으로 입을 막아버렸으니 반감을 품은 귀족이라도 감히 다른 말을 하기 어렵기는 하겠다.

누군가가 나서서 반대쪽의 구심점이 되어준다면 모를까 만약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프리시오 공작은 반쪽짜리나마 황제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르드레 남작은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 반대쪽의 구심점을 우리가 해달라는 것이다.

그것도 현지에 와서.

현지에 와서?

그렇다.

원정군을 파병해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호구도 아니고 저런 말도 안 되는 요청에 응할 리가.

그러나 바르드레 남작은 우리쪽의 그러한 속내를 짐작도 하지 못했는지 열렬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비록 패배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모아들일 수 있는 병력이 최소 수만 명입니다. 깃발만 하나 세우면 다들 모여들 겁니다. 그뿐 아닙니다. 용병을 고용할 재원 또한 충분합니다. 기사와 중심이 되어줄 병력만 있으면 됩니다.”

바르드레 남작은 황도에서 탈출할 때 잠깐 얼굴을 보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변경백의 아들이기는 했지만, 특별히 두드러진 점이 없어서 칼마르의 첩보부서에서 정리해 놓은 인물평에도 아직 이름이 올라가지 않았을 정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평가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 대한 첫인상이 완전히 결정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3초라고 하던가?

두 번이나 만났으면 그에 대한 인상이 자리잡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적어도 3초는 넘었으니까.

성실하고 노력하는 소영주.

그러나 여러가지 의미에서 딱 거기까지인 사람.

내가 보는 바르드레 남작에 대한 인상이었다.

평상시였다면 귀족들 사이에서 괜찮은 평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기에는 유감일 뿐이다.

우리의 이런 태도를 느꼈는지 바르드레 남작의 태도가 좀 더 필사적이 되었다.

그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내밀기 시작했다.

“1만. 1만 명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리딕슨도 끌어들이겠습니다. 그쪽 가문은 프리시오 공작가에 대한 악감이 대단합니다. 기회만 된다면 우리 쪽에 설 것입니다.”

바르드레 남작의 평판을 위해서라도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았다.

귀족이 감당할 수 없는 말을 떠들기 시작하면 따돌림 당하기 십상이다.

영지를 잃고 도망나온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나는 그가 더 이상 무리한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기로 했다.

실질적인 귀족연합자치령군의 사령관인 내 말에는 그 정도의 권위는 있다.

“바르드레 경. 1만 명의 군대가 여기서 프리시오 공작령까지 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글쎄요. 반년 정도면 될까요?”

“준비기간까지 합쳐서 최소 1년은 걸릴 겁니다. 그것도 그나마 모든 것이 원활하게 돌아간다는 가정하에서 가능한 시간이지 실제로 동원령을 내리면 온갖 특권을 조정하느라고 시간이 쭉쭉 늘어질 거예요. 그리고 보급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설마 1만 명이 1년 동안 먹을 식량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급이 끝났고 할 것은 아니겠지요?”

“......부족합니까?”

“장거리 보급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바르드레 경이 오해를 하는 것이 정상이기는 합니다. 이해는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용납은 안 되는군요. 보급이 실패하면 군대는 도적떼로 전락합니다. 그 정도까지 상황이 악화되면 원정은 실패를 선언하고 군대를 물리는 것이 더 낫습니다.”

“아······”

“치중병이 사용할 물량과 망실할 수밖에 없는 물량을 합하면 적어도 3배, 여유있으려면 5배는 더 준비해야 합니다. 물론 말먹이와 식수는 제외한 분량이에요. 더해서 장사꾼들의 협잡질도 감안하겠지요? 자 그럼 이제 누가 이 재정을 댈 겁니까? 당연한 말이겠지만 귀족연합자치령은 감당하지 못합니다. 참고로 징발이니 약탈이니 하는 말은 꺼내지도 마십시오. 뱅트손에서 스케티까지는 완전히 개판이니까. 거기서 약탈을 하면 간신히 명줄을 붙이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영지민들마저 다 굶어 죽습니다.”

바르드레는 말을 잃었다.

내 어조가 조곤조곤 설명하는 투이기는 했지만, 내용은 질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위 귀족이 대놓고 질책을 퍼붓다니.

일개 남작인 그가 정신줄을 제대로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를 높게 평가해줄 만했다.

그리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곧장 제안을 하나 덧붙이는 것은 더 높게 평가해줄 만했다.

“군대를 배로 나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그의 제안은 기본도 되어 있지 않았다.

바다를 경험해보지 못한 자가 머리만 굴려서 내놓을만한 제안이었다.

“전투 중에서 가장 어려운 전투가 무엇인지 압니까?”

“글쎄요.”

“상륙전입니다. 배로 병력과 물자를 날라서 적진에 내려놓고 싸우라고 등을 떠미는 전투 말입니다. 상륙전은 죽을 자리로 걸어 들어가서 싸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짓이에요. 단 한 번의 패배로도 군대는 전멸합니다. 덧붙여서 정보를 하나 알려주자면 프리시오 공작은 제법 쓸만한 전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원들 역시 보통은 아니지요. 상륙해서 적과 싸우기 전에 바다 위에서 먼저 싸워야 합니다. 승산은 반반 정도? 쉽지 않을 겁니다.”

내 말에 바르드레 남작은 말을 잃고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나는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도 바다로 가고 싶습니까?”

대답은 들으나 마나였다.

바르드레는 절망에 빠진 채 물러났다.

뭔가 극적인 변화가 있기 전에는 그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바르드레 남작을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대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내 선택에 따라 왔다갔다 할 사람의 목숨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바르드레를 말로 패는 동안 베르그렌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바르드레가 밖으로 나가자 비로소 내게 궁금한 점을 물어왔다.

“정말 원정군을 안 보낼 겁니까? 이대로 프리시오를 내버려두면 그의 통치가 굳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경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으로서는 정말 여력이 없습니다. 최소 몇 년간은 땅도 사람도 요양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쉬워서 그렇습니다. 나중에 더 큰 전쟁이 벌어질 것이 뻔히 보이는데. 하, 이거 참.”

베르그렌이 너무 아쉬워하기에 나는 그에게 내 생각을 일부 드러내 보였다.

“프리시오 공작쪽도 우리가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휴식을 취할 겁니다. 그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 뭔가 들은 것이 있습니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외부의 적이 사라지면 내부분열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 아닙니까? 더구나 프리시오가 제국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황제를 참칭한 것이 불과 얼마 전입니다. 전통과 관례는커녕 직위에 대한 권위가 생기기에도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어떤 식으로 문제가 터져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싸울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분명히 삐거덕 거릴 겁니다.”

“그럴듯하군요. 가능성이 낮지 않습니다.”

베르그렌 역시 글렌 공작 밑에서 구른 기간이 제법 길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이야기를 알아들었다.

프리시오에게는 자식이 여럿이고, 손을 잡은 왕국도 여럿이었다.

자식들 중에서 마음이 급하거나 야망이 넘치는 자가 사고를 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국이나 다름없었던 여러 왕국들을 믿을 수 있을까?

외부의 적이 사라져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 역시 궁금하기는 했다.

*

원래 권력 투쟁이라는 것은 외부의 적이 있든없든 벌어지는 것이다.

전방에서 잘 싸우고 있는 장군의 충성심을 의심해서 목을 잘랐다가 그대로 망해버린 왕국이나 제국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가까이 있는 적은 모조리 토벌했고, 멀리 있는 적은 싸울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적을 바라보고 있었던 시선이 가끔은 주변으로 향하기도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다보면 내 앞에 놓인 밥그릇보다 저쪽에 놓여있는 밥그릇의 크기가 더 크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고, 내가 걸친 옷보다 저쪽이 걸친 옷이 좀 더 비싼 것이라는 귀뜸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면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윗사람의 불만을 이용해서 인생역전을 꾀하려는 자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같은 생각이라면 제동을 걸어줄 사람도 없이 한 방향으로 내달리게 된다.

어쩌면 제동을 걸기에는 너무 늦어서 그냥 내달리는 것일 수도 있다.

프리시오의 둘째였던 알더스가 바로 그런 처지였다.

그에게는 같은 생각을 가진 아랫사람뿐 아니라 같은 생각을 가진 아내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프리시오의 후계자는 알더스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가장 확신이 강한 자는 알더스 자신이었다.

“부왕께서 왕실의 기사 20명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감사한 일이로군. 그 정도라면 기사 전력은 확실히 우리가 더 유리하겠어.”

“황금 역시 같은 양을 다시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까지 지원해주시다니! 이거 나중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군.”

“우리의 아들이 황제가 되면 됩니다. 부왕께서 바라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당연하지. 레빌은 남작이라는 자신의 작위로 만족해야 할 거야. 그게 싫다면 대가를 치러야지.”

알더스는 자신이 기사 중의 기사라고 생각했다.

감히 누구도 자신보다 강한 기사는 없다는 자신이 있었다.

물론 기사 중에서만 말이다.

“그런데 장인어른께서 거인 노예를 또 보내신다는 말은 없었소?”

“그게 몇 명 없는 노예라서······”

“다른 무엇보다 거인 노예가 중요하오. 부인께서는 다시 한번 장인께 부탁을 드려보시오. 이것은 부황의 요청이기도 하오.”

“알겠습니다.”

타르바 왕국의 왕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물론 거인 노예를 보내달라는 요청은 이미 보낸 후였다.

그러나 거인 노예를 보낼지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부왕이 아니었다.

그는 부왕의 노예가 아니었다.

노예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노예가 죽었으니 어쩌면 이번에는 거인 노예가 아니라 노예의 주인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그녀로서도 오랜만에 주인을 만나는 것이다.

그는 거인 노예뿐 아니라 왕녀의 주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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