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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29화 (229/248)

229. 뱅트손 역시

뱅트손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귀족다운 표정 뒤로 그의 감정을 숨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의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빠른 반응이었다.

그는 덤덤한 얼굴로 나를 대했다.

“칼마르의 여백작과 결혼한 행운아로군. 아니지. 공과 같은 걸물과 결혼했으니 여백작이 오히려 행운이었겠군. 뒤늦게나마 결혼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공작 전하.”

의외였다.

호칭을 공작으로 낮추어 부르는데도 불구하고 뱅트손은 태연하기만 했다.

황제를 자칭하던 선제후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오히려 그의 주변에 있던 가신들이 살짝 흥분한 티가 났다.

그러나 그들이 상대도 할 수 없었던 거인을 죽여버린 내게 대놓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뱅트손의 관심은 나보다는 죽어버린 거인에게 가 있었다.

그는 죽어버린 거인을 가까이에서 살피더니 발로 툭툭 차기까지 했다.

“확실히 거인족은 아니군.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까지 크게 자랄 수가 있는 건가? 내 거인 기사들도 이 정도는 불가능했는데?”

대답하는 자는 없었다.

뱅트손을 따라온 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뱅트손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차더니 거인 기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가벼운 손짓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거인 기사들은 뱅트손의 지시를 용케 알아듣고 죽은 거인을 내성으로 옮겨갔다.

거인 기사의 지능이 약간 떨어지는 편이라고 들었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거인의 시체가 내성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뱅트손은 내게 다가왔다.

그는 주변의 측근들을 물린 후 거인 기사 2명만 자신의 뒤에 두었다.

“백작은 나와 함께 좀 걷지.”

전투의 소음이 여전한데도 불구하고 뱅트손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물론, 전투의 향방이 확실히 결정된 상황이기는 하지만, 재수없으면 유시에 맞을 수도 있는데 뱅트손은 지나칠 정도로 담대했다.

아니면, 그의 담대함을 내게 과시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뱅트손은 태연하게 외성을 거닐었고, 나 역시 그의 곁에서 함께 걸었다.

아무래도 뱅트손은 측근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을 말을 내게 할 모양인 듯 했다.

“윌리엄 백작. 내 꼴이 우습게 되어 버렸어.”

“말씀하십시오. 공작 전하.”

“윌리엄 백작은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지?”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르보그 공작군과의 전투에서는 후퇴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세력을 보존했잖은가.”

“그것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도 못 했어. 아니, 하기는 했지. 스케티에게서 후퇴할 때까지만 해도 내 휘하의 병력은 제대로 챙겼네. 그러나 그 대가로 나를 따르는 자들을 여럿 버려야 했지. 그 후로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현재의 내 모습은 그때의 선택 때문일세. 이제 내게 남은 자들은 이 성에 있는 자들이 전부야.”

전투를 하고 있는 병사들 중 용병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규모있는 용병대는 모두 뱅트손 공작과의 계약을 거부하고 있다는 첩보가 사실인 모양이다.

아마도 지금 싸우는 자들 대부분이 영지군인 것 같은데, 이러면 조만간 공작령의 경제력이 나락으로 갈 수밖에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올해 농사는 망쳤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자신의 병력을 거느리고 종군해야 할 귀족들 역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뱅트손은 휘하의 귀족들로부터도 지지를 잃은 모양이다.

이곳에 있는 군대는 황제는커녕 공작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군대였다.

“원래라면 거인 기사와 내 직속 기사들로 휘하의 귀족들을 단속하고 스케티와는 길고 지루하지만 이길 수밖에 없는 전투를 하려고 했지. 그런데 이상한 놈이 나타나서 내 부하들을 다 죽였어. 그것도 혼자서 말이지.”

그가 말하는 이상한 놈은 가짜 몸이다.

가짜 몸은 뱅트손의 중요 전력을 완전히 몰살시켜 버렸고, 그 결과 뱅트손은 사실상 끝장이 났다.

벵트손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을 내게로 향했다.

“이제는 자네도 알지? 3백 년 전에 제국의 내전을 종식시켰다는 괴물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내 거인 기사들은 그 괴물을 잡기 위해 준비해둔 비장의 무기였네. 함정에 빠뜨린 후 거인 기사들로 죽일 생각이었지.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이상한 놈에게 모조리 죽은 거야! 젠장! 거인 기사는 내 염원이 만들어낸 걸작일세. 나는 자신이 있었어. 내 거인 기사들은 거인족 못지 않았다고! 숫자도 얼마 되지 않고 인간과 협력하려는 자는 더욱 적은 거인족 따위와는 달랐어. 힘도 더 세고 충성심도 두말할 나위 없었다고! 그런데 젠장!”

뱅트손은 거침없이 분노를 토해냈다.

아무래도 그동안 겪은 고생이 그를 많이 변하게 한 모양이다.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거인 기사들의 눈에서 걱정하는 빛이 드러났다.

“진정하십시오. 공작 전하. 가신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아무리 전투 소음이 우리의 대화를 가려준다고 해도, 뱅트손의 고함은 충분히 컸다.

귀가 좋은 가신이라면 어느 정도는 알아들었을 것이다.

내 말에 뱅트손은 금방 분기를 가라앉혔다.

뱅트손 같은 대귀족이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상대는 믿는 자 또는 동등한 자뿐이다.

나는 그에게 동등한 자로 자리매김한 모양이었다.

뱅트손은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윌리엄 백작. 공은 혼자서 거인을 죽였지. 그런데 그 거인은 내 부하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네. 심지어 성벽을 두고 싸웠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방적으로 박살이 났지! 만약 자네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밤 죽었을 거야.”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혼자서 수천 명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자. 그런 자가 하나가 아니야. 나는 자네가 죽여버린 거인 말고도 그런 자를 또 보았네. 내 거인 기사들을 학살하듯 죽인 자도 있었고, 스케티에게도 하나가 있었지. 심지어 그자는 일신의 무력은 구경도 하지 못했어. 야생동물을 수족처럼 다루는 신기한 재주만으로도 우리의 군량을 태우고 병사들을 죽이더군.”

뱅트손은 단언하듯 내게 말했다.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이 아무리 기사를 끌어모으고 용병을 고용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네.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고까지 털어서 수천수만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들려서 내보낸다고 해도 단 하나가 수천수만을 다 죽여버리겠지. 그자들에게 당하고 나니까 3백 년 전에 왜 내전이 끝났는지 알 것 같더군. 그런데 문제는 그때는 괴물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몇이나 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겠지.”

“저는 괴물이 아닙니다. 공작 각하.”

“하지만 인간도 아니지.”

나를 보는 뱅트손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혼자의 힘으로 수천수만을 이기는 자가 인간이라고 주장할 셈인가?”

“물론입니다. 저는 아직 인간이니까요. 그리고 제가 인간인지 아닌지가 뭐가 중요합니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진짜 중요한 것은 저 같은 사람이 귀족연합자치령에 속해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자네 진짜.”

뱅트손은 결국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나를 노려보다가 결국 웃고 말았다.

실소가 폭소가 되었다.

그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한바탕 웃고 나서야 평온을 되찾았다.

“윌리엄 백작. 자네는 황제가 되고 싶은 건가?”

“아닙니다. 공작 전하. 황제는 귀찮지 않습니까? 내 후손들도 귀찮아할 겁니다.”

“정말 특이하군. 자네 같은 귀족은 또 없을 걸세.”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묻는지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귀족연합자치령으로의 합류.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다면 귀족의 자격이 없다.

뱅트손 역시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었다.

“스케티가 죽었다지?”

“예. 아직 확인은 못 했습니다만.”

“아직까지 별다른 소리가 없다면 죽은 것이 맞을 거야. 나는 스케티처럼 어이없게 죽고 싶지 않네. 귀족연합자치령에 내가 있을 자리는 있겠지?”

“물론입니다. 전하. 그러나 아시겠지만 귀족연합자치령의 귀족들은 모두 동등한 한 표를 행사합니다.”

“들었네. 하지만 한 표를 한 표가 아니게 만들면 그만이야. 내 밑에 열 명이 줄을 서면 열 표가 되고 백 명이 줄을 서면 백표가 되겠지. 물론 언제나 자네의 의사는 최우선적으로 존중하겠네.”

“환영합니다. 공작 전하.”

“그렇다면 이제 내 밥버러지들을 설득할 차례군. 자네, 내 뒤에서 인상을 좀 써 줄 텐가?”

“기꺼이.”

귀족연합자치령으로는 다음날 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나는 뱅트손의 가입을 알리기 위해 먼저 베르그렌에게 향했다.

*

베르그렌은 귀족연합자치령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두뇌 역할을 하고 있었다.

칼마르 밑에 줄을 선 귀족들이나 일부 대귀족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귀족들은 베르그렌의 중재에 따라 질서를 유지했다.

“언제나 느끼는 것입니다만, 윌리엄 백작 각하의 설득력은 놀랍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아르보그를 끌어들였는데, 이번에는 뱅트손 같이 다른 귀족조차 눈 아래로 보는 자까지 끌어다니요.”

“머리 위에서 칼이 왔다갔다 하면 누구나 쉽게 설득되는 법입니다.”

“일리있는 말이군요.”

베르그렌은 내 말에 긍정해 주었다.

사실 지금까지 귀족연합자치령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무력이 제법 강하고 이익을 챙겨줬기 때문이지 명분이 우월해서가 아니었다.

아무리 선제후 제도에 익숙한 자들이라고 해도 귀족들끼리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모든 일에 한 표씩 행사하자는 말에는 난색을 표하곤 했다.

공작들에게는 이게 무슨 헛소리냐는 말이 나올 것이고, 백작들 역시 좋은 얼굴을 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생각이 좀 돌아가는 자들이라면 될 일도 안 되고, 안 될 일은 절대로 안 되리라는 전망이 손에 잡힐 듯 뻔히 보이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놓고 깽판을 칠 수 있는 공작은 죽거나 세력을 잃었고, 보통의 귀족들은 내전을 겪으면서 평화가 간절해졌다.

그 사이를 파고든 것이 베르그렌이었다.

베르그렌은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물론 빌릴 수 있는 권위까지 몽땅 동원해서 이 말도 안 될 정도 허술한 체제가 그럭저럭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베르그렌의 공이었다 .

그리고 그가 세운 공은 그에게 권위를 가져다 주었다.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리더라도 누군가가 질서를 잡겠다고 나서고 실제로 성과도 보이면 무시할 수 없게 되는 법이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가 내 눈치를 보며 내놓은 규약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었다.

과연 그가 제시한 규약의 초안은 상식적이었다.

만약 내가 귀족연합자치령을 장악하고 황제를 해 먹을 생각이 있다면 규약이 족쇄라고 느꼈겠지만, 그럴 생각이 없는 내게는 내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이었다.

하나는 봉건적인 영주권의 권리를 재확인하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부분이라서 두 번 볼 필요도 없었다.

다른 하나는 군대 소집과 세금 부과에 대한 문제였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군대를 소집하는 것은 귀족들 중 절반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고, 그 비용은 소집에 동의한 귀족들이 부담한다는, 내 입장에서는 상식적인 내용이었다.

베르그렌은 법률가로부터 자문을 좀 더 받은 후에 모든 소속 귀족들로부터 동의를 받을 생각이라고 했다.

나 역시 그의 의견을 지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주었다.

리네아의 지지 역시 끌어내겠다는 말을 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 우리를 방문했다.

아바르 변경백의 장남인 바르드레 남작이었다.

그는 전투와 여행으로 엉망이 된 몰골을 정리도 하지 않고 나타났다.

이것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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