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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28화 (228/248)
  • 228. 또 다른 적

    미소에는 미소로 답해주는 것이 인간 사이의 예의범절이다.

    그러나 거인의 예의범절은 나와 좀 달랐던 모양이다.

    거인은 내 미소를 보자마자 자신이 들고 있던 메이스 2개를 연달아 던졌다.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듯 허리에 차고 있던 3개의 메이스까지 계속 던져 버렸다.

    물론 내가 그 메이스에 맞기를 기대하고 던진 것은 아닐 것이다.

    보통 수준의 기사만 되어도 날아오는 화살을 잡을 수가 있는데, 나 같은 수준의 기사가 보라는 듯이 던지는 메이스에 맞을 리가.

    거인은 그냥 자신의 기분이 불편하다는 것을 시위한 것뿐이다.

    겸사겸사 내게 위력과시도 한 것일 테고.

    가볍게 옆으로 한 걸음 걷는 것만으로 연달아 날아오는 메이스가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음에 날아온 3개의 메이스 역시 한걸음, 다시 한 걸음을 걸어서 모두 피해버렸다.

    나를 지나친 메이스들은 성벽에 틀어박혔다.

    마치 화살이 나무에 박히는 것처럼, 5개의 메이스는 돌로 쌓은 성벽에 깊숙이 박혀 버렸다.

    사람이라면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위력이었다.

    그러나 나 역시 날아오는 메이스를 피하면서 내 실력이 절대 만만하지 않음을 과시했다.

    산책하듯 걷는 내 모습은 메이스를 던진 거인을 비웃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런 나를 본 거인은 등 뒤에 걸고 왔던 칼을 다시 꺼내 들었다.

    거인의 키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거대한 칼이었다.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과장된 디자인의 무기지만, 거인의 힘을 생각하면 의외로 쓸만한 무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인은 양손으로 거대한 칼을 쥐고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를 노려보며 전진했다.

    거인의 시선을 마주하자 내 예감이 속삭여왔다.

    저자 역시 지금까지 내가 죽인 자들과 다르지 않다.

    숲의 현자니, 대사제니 하며 태연하게 사람을 죽여대던 자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투는 결국 기운의 대결로 귀결될 것이다.

    저 거대한 칼 아래에서 내가 버틸 수만 있다면 말이다.

    우리 사이의 간격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그리고 내 칼이 닿기에는 아직 먼 거리에서 거인의 칼이 반원을 그리며 나를 노려왔다.

    거인의 힘에 어울리는 엄청난 속도였다.

    풍압이, 그리고 칼에서 느껴지는 기세가 내 아랫배를 짜릿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세라면 모를까 속도 자체는 내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움직이는 궤적도 너무 뻔했다.

    나는 묘기를 부리듯 내 허리께를 지나가는 칼을 잡고 그대로 공중으로 몸을 띄워서 한바퀴 돌았다.

    그냥 제자리에서 한바퀴 재주를 넘은 셈이다.

    나는 허무할 정도로 어이없게 거대한 칼을 피해버렸다.

    그러나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로 벼락같이 떨어지는 일격이었다.

    반회전한 칼의 궤적을 틀어서 나를 향해 내리친 것이다.

    무리한 짓이다.

    이런 기세와 힘으로 휘두른 칼의 방향을 갑자기 틀다니.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칼에 휘둘려서 중심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인은 자세를 낮추고 칼의 반동을 견뎌냈다.

    그 결과가 제자리에서 한바퀴 재주를 넘자마자 내 머리에 내리치는 일격이었다.

    재주를 넘은 내 발이 땅에 닿는 것과 거대한 칼이 내 머리에 닿는 시간이 비슷할 정도로 빠른 연격이었다.

    사람에게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니니 허공에 떠 있는 상태에서는 움직이지 못한다.

    때리면 맞고, 찌르면 찔릴 수밖에 없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하지만 내게는 미약하나마 염동력이 있었다.

    주먹만한 돌멩이를 띄울 수 있을 정도의 반발력.

    그 정도면 충분했다.

    허공에 뜬 몸을 염동력으로 옆으로 밀었다.

    동시에 머리 위에 떨어지는 거대한 칼을 향해 머리 위쪽으로 바깥막기를 시전했다.

    칼을 막는다기보다는 칼을 후려쳐서 생긴 반발력으로 몸을 이동시키려는 의도였다.

    과연 내 생각대로 염동력과 바깥막기로 생긴 반발력 덕분에 거인의 일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낼 수 있었다.

    피해내기는 했지만 거인의 일격은 무시무시했다.

    거대한 칼의 절반 가까이가 땅에 파고들 정도였다.

    정통으로 맞았다면 시체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공격이라도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강력한 공격 후에는 빈틈이 생기는 법이다.

    나는 곧장 거인을 향해 달려 들었다.

    지금까지 거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했던 거리가 좁혀졌다.

    거인도 공격할 수 있고, 나도 공격할 수 있는 거리가 된 것이다.

    거인은 바로 코앞까지 접근한 내게 위험을 느꼈던지 칼을 버리고 나를 향해 주먹을 내리찍었다.

    지금 우리가 싸우는 모습은 다 큰 어른과 초등학생이 싸우는 모습과 비슷하다.

    내 키는 거인의 절반, 거인의 아랫배가 내 머리와 같은 높이였다.

    지금까지 우리 사이에 있던 거리의 불리함은 나아졌지만, 높이의 불리함은 여전한 셈이다.

    게다가 거인의 주먹도 그의 거대한 칼 못지않게 위험했다,

    방금 전 뱅트손의 거인 기사 5명을 때려죽인 주먹이 바로 저 주먹이다.

    거대한 해머 못지않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보는 눈이, 그리고 내 움직임이 거인에게도 통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칼을 든 거인의 공격을 농락하듯 피해냈다.

    그런데 주먹 정도야.

    나를 노리고 찍어치는 주먹을 피하며 잡았다.

    그리고 주먹을 잡은 채 몸을 거꾸로 세워서 발로 거인의 턱을 걷어찼다.

    발에 느껴지는 충격을 감안하면 제대로 들어간 일격이었다.

    그 즉시 나는 거인의 주먹을 밀치며 뛰어 내렸다.

    턱을 맞은 거인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거인이라고 해도 제법 인간다운 반응이었다.

    “넌 누구냐?”

    거인은 자신이 얻어맞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턱을 만지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

    그리고 다시 고함을 질렀다.

    “어떻게 나에게 충격을 줄 수 있지? 그런 것은 불가능해!”

    역시!

    지금까지 거인을 향한 공격 중 제대로 적중한 것은 뱅트손의 거인 기사들이 메이스로 내리친 것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메이스는 사람이 아니라 고무 뭉치를 때린 것처럼 튕겨 나갔다.

    그게 뭔가 이상하기는 했다.

    그런데 거인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 예상대로 거인 역시 신비에 접한 자임이 분명했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거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거인의 두손을 맞잡으려는 심산이었다.

    거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는 나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 손을 펴서 나를 잡으려고 했다.

    잡고 힘으로 허리를 꺾어버리면 된다는 생각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거인의 양손을 잡고 버팀으로 그의 생각대로 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거인 역시 내가 자신의 힘에 저항하며 버티자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거인의 양손을 잡은 나는 지금까지 내가 흡수한 자들과 비슷한 흐름이 거인에게서도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따스하고 질긴 느낌이었다.

    거인의 힘도 대충 가늠이 가능했다.

    나보다 약간 못한 느낌?

    거대한 덩치 때문에 그의 공격이 강렬하게 느껴졌을 뿐 하려고 한다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거인에 대해 확인하는 동안 거인의 몸은 점점 내려앉았다.

    결국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보는 상황까지 되어 버렸다.

    당황과 불안으로 요동치던 눈동자는 경악과 공포로 변해 버렸다.

    잠시 후 그의 눈에서 보이던 공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절망이 그를 잠식했다.

    이렇게 빨리 포기하다니.

    덩치에 비해서 비루한 자였다.

    지금까지 내가 흡수한 자들 중 정신적으로는 가장 약한 자가 아닐까 싶었다.

    그때였다.

    죽어가는 거인의 눈에 보이는 절망 뒤에 뭔가 다른 것이 보였다

    거인과 전혀 다른 느낌?

    그러나 내게는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거인이 고개를 떨구고 무릎을 꿇은 채 죽은 것이다.

    거인의 눈을 통해 보이던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더 이상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

    거인이 죽는 순간 멀리 서쪽에 있던 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주변에 있던 자들은 갑작스러운 주인의 반응에 놀라서 일제히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렸다.

    누구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

    그들은 눈을 감고 숨까지 죽인 채 오직 귀만 활짝 열고 주인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주인의 명령은 금방 떨어지지 않았다.

    긴장으로 굳어진 채 엎드려있던 자들 중 몇 명이 다리에 쥐가 나서 필사적으로 신음을 참고 있을 정도가 되어서야 비로소 주인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쓸모없는 놈이 이렇게 일찍 죽다니. 선택된 자라고 해도 스스로 길을 걷지 않으면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가 없구나.”

    한탄하듯 말한 그는 가볍게 손짓했다.

    다리에 쥐가 나서 조금이라도 신음을 흘렸던 자들의 목이 일제히 떨어졌다.

    “치워라.”

    그제서야 사람들은 몸을 일으켜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죽은 자들에 대해 신경을 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

    나는 죽어버린 거인의 손을 놓고 일어섰다.

    이번에 죽은 거인은 여러모로 특이했다.

    그는 지금까지 내가 죽인 자들과 달리 가루로 변해서 흡수되지 않았다.

    기운의 양도 너무 적었다.

    흐름이 서로 연결되자마자 바닥을 드러내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무래도 이것이 끝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었다.

    꺼림칙한 기분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계속 여기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다.

    내성에서 뱅트손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홀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와 함께 기사와 병사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거인 기사도 몇 명 보였다.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거인 기사가 있었다니!

    내성에서 몰려나온 뱅트손군은 외성 내부로 들어온 적군과 곧장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잦아들던 소음은 죽어가는 병사들이 내는 비명으로 다시 한 번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뱅트손군이 훨씬 유리한 전투였다.

    거인은 내 손에 죽었고, 그 모습을 외성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봤다.

    프리시오군의 일부는 그 모습을 보고 곧장 도망을 쳤고, 싸우려고 남은 자들도 숫자에 밀리니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뱅트손은 외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곧장 내게로 왔다.

    “그대는 누군가? 아니지. 질문이 아니라 감사를 먼저 했어야 했는데. 그대의 용기와 용맹에 경의를 표하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하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주겠네. 황금이라면 들지도 못할 정도로 쌓아주지. 영지를 원한다면 세습 작위와 함께 당장이라도 줄 수 있네. 내 조카딸은 어떤가? 자네같이 뛰어나고 젊은 기사라면 누구라도 대환영일걸세.”

    내 기억에 뱅트손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뱅트손은 불안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대귀족답지 않은 태도였다.

    “제가 유부남이라서 혼인제의는 거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공작 전하.”

    정중한 내 태도에 뱅트손은 자신의 조급함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도저히 그 속내를 읽을 수 없는 귀족의 얼굴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턱도 치켜 들었다.

    비명과 전투소음으로 가득 찬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귀족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칼마르의 백작 윌리엄입니다. 멀리서나마 황도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뱅트손의 눈에 가벼운 놀람과 경계심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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