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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27화 (227/248)

227. 결투 전

초대형 빌딩이 흔하고, 개인주택조차 다층주택이 보편적인 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3미터를 넘어 4미터에 가까운 키는 정말 높아서 멀리서도 확연하게 눈에 띈다.

게다가 이곳은 도시가 아니라 성벽 앞의 들판이다.

거인이 몸을 일으키자, 나 같이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자도 대번에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하물며 야습을 위해 다가오던 뱅트손군이야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헉! 하고 놀라는 병사들의 당혹감이 나한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뱅트손군은 너무 가까이 접근한 후였다.

그냥 돌아간답시고 물러서다가는 얼마 안 가서 후퇴가 패주가 될 것이고, 일방적인 학살이 뒤따를 것이 뻔했다.

상황이 어떻게 되든 간에 일단은 어둠을 원군 삼아서 공격을 해야 한다.

혼란 속에서 기회를 찾아야 했다.

그때, 멀리서 성문을 막고 있던 돌담의 일부를 무너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이 듣기에는 너무 작은 소리였지만, 뒤이어 들리는 말 울음소리는 충분히 컸다.

바로 그 말 울음소리가 신호가 되었다.

“공격하라! 적을 쓸어버려라!”

“놈들은 숫자는 얼마 안 된다. 공격하라!”

공격명령은 조용하던 밤의 들판을 일깨웠다.

뱅트손군은 공격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금까지 입에 물고 있던 나무토막을 뱉어 버리고 고함을 지르며 프리시오군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미완성의 목책이었다.

프리시오군의 목책은 아직 미완성이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확실히 나아 보였다.

목책 앞에 배수로 겸 해자 역할을 하는 도랑도 파지 않았고, 궁수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목책 뒤에 방어군이 올라서서 공격할 수 있는 발판도 아직 만들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래도 목책은 목책이었다.

공격해 오는 뱅트손군의 병사들이 사방에서 들이치지 못하고, 아직 목책을 세우지 못한 부분으로만 들어올 수 있게 강제한 것이다.

그러나 목책이 한 일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뱅트손군의 병사들은 당연히 목책에서 날아오리라고 각오하고 있었던 화살이 날아오지 않자 오히려 기세가 올랐다.

함성 소리가 더 커지고 발걸음도 더 빨라졌다.

목책이 세워지지 않은 곳에서 방진을 짜고 있던 프리시오군의 병사들은 상대방의 함성소리에 약간 위축된 분위기였다.

곧이어 벌어진 충돌에서도 위축된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진형이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밀리는 느낌이었다.

뒤늦게 뒤쪽에서 화살을 쏘기 시작했고, 화살에 맞은 뱅트손군의 병사들이 연이어 쓰러졌지만, 그런 사실을 아직 모르는 자가 대부분인 것 같았다.

밤중에 벌어지는 전투는 일반 병사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종류의 전투다.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헛손질을 하기 일쑤고, 자기 편이 이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괜한 오해로 인해 도망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것은 전적으로 어둠 때문이다.

아무리 달이 떠 있고, 화톳불을 밝히고 있다고 해도 낮에 비하면 장님이나 다름없으니 소리에 의지하게 되고 공포에도 쉽게 휩쓸리는 것이다.

지금이 그랬다.

성문에서 튀어나온 일단의 기마 부대는 특유의 말발굽 소리와 함께 괴성을 지르며 프리시오군의 병사들을 덮쳤다.

몇 명 안되기는 했지만 거인 기사들도 그 뒤를 따라서 나타냈다.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거인 기사들의 모습은 프리시오군에게 공황을 불러일으켰다.

자신들의 거인 기사가 낮에 어떤 일을 했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본 입장에서 갑자기 적 쪽에서 거인 기사가 등장하니 공포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것도 5명이나.

한순간에 분위기가 뱅트손군으로 넘어가 버렸다.

창을 내밀며 서로 팽팽하게 밀고 밀리던 방진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프리시오군의 병사들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말을 탄 기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휘두르며 그들을 파고들었다.

실루엣으로 보이는 말 탄 기사들의 활약은 멀리서도 잘 보였다

그러니 바로 근처에 있는 프리시오군의 병사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뻔했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패주하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래도 이상했다.

분명히 야습을 예상하고 준비했던 것 같은데 프리시오군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진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과연 내가 의심을 하기가 무섭게 전장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목책의 일부가 쓰러지면서 그 뒤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드러난 것이다.

그들은 목책 안까지 밀고 들어온 병사들은 내버려 두고 아직 밖에 있는 병사들을 쌈 싸 먹듯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퇴로가 막힌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은 후위의 병사들부터 동요가 시작되어 순식간에 앞으로 번져나갔다.

곧이어 지금까지 제대로 지원을 하지 않고 있었던 궁수들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참고 있었던 울분을 쏟아내듯 목책 위에서 적을 향해 화살을 쏟아냈다.

갑자기 반전한 분위기에 당황한 기사들이 분전했지만 소수의 기사들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기사들을 받쳐주던 병사들도 혼란에 빠져서 일부는 더 이상 기사를 따라 가지않고 뒤로 빠지려고만 했다.

주변에서 엄호해주는 병사 없이는 말을 탄 기사들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멈춘 기병은 죽은 기병이라는 말까지 있다.

갈고리 창이 등장하고, 말 위의 기사들이 끌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와악~!”

“싸워!”

전투 중의 소음을 다 묻어버릴 정도로 강렬한 외침이었다.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다는 듯 거인 기사들이 나선 것이다.

숫자는 불과 5명.

그러나 그들이 날뛰는 순간 5명은 백인대 5개보다도 더 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들이 쓰는 무기는 좀 길기는 했지만 메이스를 닮은 둔기였다.

5명의 거인 기사들은 둔기를 들고 주변을 돌며 손에 걸리는 대로 박살을 내기 시작했다.

병사든 기사든 그 공격을 막아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제서야 말을 탄 기사들은 간신히 뒤로 물러났고, 뱅트손군 역시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거인 기사들이 목책을 넘어뜨리고 위에 있던 궁병을 죽이기 시작하자 지금까지 조용히 뒤에 서서 돌아가는 전장 상황을 살피고 있던 거인이 뛰어들었다.

부드러운 도약이었다.

그리고 치명적인 움직임이었다.

맹수가 먹이를 향해 뛰어드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주먹 한 방에 지금까지 둔기를 들고 날뛰던 거인 기사 하나가 고꾸라졌다.

거인 기사의 얼굴은 해머에 직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망가져 버렸다.

즉사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거인이 상대해야 할 적은 하나가 아니었다.

주먹을 휘두르는 짧은 시간이 다른 4명의 거인 기사에게 기회를 주었다.

길고 두꺼운 메이스가 연이어 거인을 가격했다.

어깨와 머리, 팔, 등까지.

그러나 공격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둔기는 마치 탄력 좋은 고무 뭉치를 때린 것처럼 튕겨져 나왔다.

통통 튀는 탄력에 휘말려서 한 명은 둔기를 놓치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본 거인이 이빨을 살짝 드러냈다.

그는 미소를 짓는 듯, 아니면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단 4방이었다.

한 방에 한 명씩.

4명의 거인 기사 중 그 주먹을 막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거인 기사들이 상대적으로 작다고 하지만, 그래도 거인의 가슴 어림에는 온다.

그런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한다고?

이러한 차이는 덩치나 힘이 문제가 아니라 분명 다른 요인 때문이다.

나는 가짜 몸이 거인 기사들을 몰살시켰다는 것을 상기했다.

저 거인도 가짜 몸과 비슷한 종류인 걸까?

아무래도 멀리서 살필 것이 아니라 직접 봐야 할 모양이다.

전장에 있는 모든 자들이 확실히 볼 수 있을 정도로 키가 크고 압도적인 덩치를 가진 자들의 전투가 끝났다.

이것으로 야습도 끝났다.

다섯 번째 거인 기사가 쓰러지는 순간 누군가가 나팔을 불기 시작했다.

무슨 의미인지는 뻔했다.

야습이 패배로 끝났으니 어서 도망치라는 나팔소리다.

뱅트손군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미친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일부는 성벽으로, 일부는 성문 방향으로.

무기를 버리고 갑옷도 벗어던지며 달리기 시작했다.

프리시오군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들은 전투 결과에 휩쓸리지 않았다.

화살을 쏘고, 낙오한 자를 죽이기는 했지만 질서를 잃지 않고 명령에 따라 집단으로 이동했다.

그들의 절반은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으로 향한 자들 중에 가장 앞에 선 자는 거인이었다.

그는 죽은 거인 기사들의 무기들을 챙겨서 허리에 3개를 찔러 넣고, 두 개는 양손에 든 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걷는다고 하지만 거인이 걷는 속도는 보통 인간이 달리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거인 기사들조차 즉사한 힘을 인간이 버티는 것도 불가능했다.

숱한 병사들이 거대한 메이스에 뒤통수나 등판을 맞고 들판에 뒹굴어야 했다.

성문 쪽으로 도망치던 병사들은 죽음이 뒤따라오는 것을 알게 되자 동료를 일부러 넘어뜨리며 도망칠 정도로 심리적으로 몰리며 도망을 쳤다.

패닉이 후퇴하는 병사들을 사로잡았다.

말을 탄 기사들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성문에 임시로 쌓아놓았던 돌담은 방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공포에 질려서 도망쳐오는 병사들 때문에 화살도 제대로 당겨보지 못한 성문 수비병들은 곧이어 닥친 재앙에게 그대로 목숨을 헌납해야 했다.

간신히 그 손아귀에서 벗어난 자들이라도 잠시 후 몰려온 프리시오군의 병사들까지 피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들을 따라서 성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성벽 쪽을 살펴보았다.

성벽 방향으로 도망친 자들 중 일부는 성벽 위에서 내려놓은 밧줄을 타고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올라가다가 밧줄을 놓쳐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성벽을 등에 진 채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위안이라면 성벽 위의 동료들이 화살을 쏘며 프리시오군의 접근을 막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성문 안으로 프리시오군의 병력이 들어간 이상 성벽 위에서 오는 지원도 조만간 끊길 것이다.

나는 거인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빠르게 성문을 통과했다.

거인은 무지막지하게 날뛰고 있었다.

뱅트손의 병사들이 모이기만 하면 달려들어서 박살을 냈다.

판금 갑옷을 입은 자가 나타나도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갑옷과 함께 우그러뜨렸다.

걷는 속도가 평범한 인간이 달리는 속도보다 빠른 자가 뛰어다니기까지 하니 뱅트손군은 어떻게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무너지고 있었다.

성벽 위까지 올라가서 수비병까지 잡아서 성벽 아래로 던지기 시작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뱅트손군은 내성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성벽 위도 순식간에 비어버렸다.

이제 성벽 위도, 성벽 아래도 저항하는 뱅트손군은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무리지은 자들은 없었다.

거인은 그제서야 만족한 듯 이번에는 내성을 향해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내성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성벽을 쭉 살피더니 결국은 성문 근처에서 전황을 보고 있던 내게서 멈췄다.

순간 우리의 시선이 마주치고, 그는 다시 이빨을 살짝 드러냈다.

원하는 것을 발견해서 정말 기분이 좋다는 기색이 그의 미소에서 읽혔다.

물론 그것은 사냥감을 발견했다는 느낌에 가까운 기분좋음이었다.

나도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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