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내가 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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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육식조를 통해 받은 첩보를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도대체가 믿을 수가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프리시오 공작이 변경백들을 회담장에서 몰살시켰다고?
이게 무슨 미친 짓이지?
프리시오 공작이 변경백들을 숙청했다는 첩보를 본 순간 든 생각은 올 것이 왔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회담장에서 몰살을 시켜버렸다니!
이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나는 칼마르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변수가 끼어들었음을 직감했다.
프리시오 공작은 합리적이라는 평판을 가진 귀족이었다.
오랫동안 공작으로 자신의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왔고, 리딕슨 공작가를 집어삼키는 것을 보면 정치싸움도 능숙했다.
대화를 나누기 위해 회담장으로 나온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외교적인 자살이라는 것을 모를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데 실제로 일어나 버렸다.
나로서는 이 일이 프리시오 공작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일단 귀족이라면 누구도 프리시오 공작이 하는 말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자신의 말을 바꾸어서 이익을 챙길 자로 간주하리라.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상황에 따라 필요하면 뒤통수를 쳐도 상관없는 자로 취급되리라는 점이다.
명예를 모르는 자는 존중받을 수 없으니까.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 군주라니.
나는 프리시오 공작이 왜 이런 미친 짓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제국에 속했던 귀족들을 다 무시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나는 알 수 없는 변수가 칼마르와 관련된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즉시 귀환길에 올랐다.
귀족연합자치령이 자리를 잡아갈수록 칼마르는 점점 규모를 키워가는 느낌이었다.
자리를 비웠다가 복귀할 때마다 뭔가가 달라졌다.
농토가 늘어나고 도시가 늘어나고 인구나 늘어난다.
이번에 달라진 부분은 리네아였다.
리네아는 살짝 배가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난번에 칼마르를 떠날 때 살짝 부은 것처럼 보이던 것이 임신초기였던 건가?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 간신히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리네아. 설마?”
“예. 맞아요. 임신이랍니다.”
“오!”
나는 리네아를 살짝 끌어안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으며 배에 귀를 댔다.
리네아는 가볍게 웃으며 나를 밀쳤다.
“아직 윌리엄은 못 느낄 거예요. 나는 아기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지만.”
“몸은 괜찮은거요? 식사는? 입덧은?”
“이제는 괜찮아요. 사라가 나를 돌봐주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당신의 건강이 최우선이오. 절대로 무리하지 말아요.”
“나는 의사와 시녀들로 둘러싸여 있어요. 보세요. 지금도 내 옆에서 3명이나 되는 시녀가 나를 보살피고 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리네아는 당황해서 쩔쩔매는 나를 오히려 진정시키며 달래주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결혼도 아이도 이미 경험한 일이다.
저쪽 세상에서 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이런 떨림이라니!
내게 일어난 감정의 파고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돌아가던 톱니바퀴가 멈추는 대신 심장 속의 펌프가 박동치는 것 같았다.
그런 내게 리네아의 옆에서 미소를 짓고 있던 사라 남작 부인이 충고를 시작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각방을 쓰셔야 합니다. 윌리엄 백작 각하.”
“무슨 의미인지는 아는데, 내가 조심하면 되지 않을까요?”
“말은 그렇게 하셔도 금슬이 좋은 분들일수록 조심을 못 하더군요. 산모와 아기의 건강을 위해서니까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사라 남작 부인은 내가 한 번만 더 이의를 제기한다면 예비 초보 아빠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일장연설을 시작할 기세였다.
나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사라 남작 부인은 그 이후에도 내가 조심해야 할 일을 몇 가지 알려주었다.
일부는 지구에서도 통용되는 지식이었고, 일부는 이쪽의 관습이었다.
나는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야 했다.
“그리고 리네아 님은 지금 낮잠을 주무셔야 할 시간이니까 이만 나가주셔야겠습니다.”
결국 나는 시녀로 둘러싸인 리네아를 두고 침실을 나와야 했다.
내 옆으로 사라 남작 부인이 따라 나왔다.
그제서야 나는 리네아 앞에서 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후계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습니까?”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지는 않았지만 알만한 자는 다 알 겁니다. 백작 각하.”
내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사라 남작 부인 역시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했다.
우리는 암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내 말에 살기가 실렸다.
“기어들어 온 놈이 혹시 있습니까?”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영지 내의 유력자들 중 의심하고 있는 자는요?”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차라리 그냥 다 죽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럴 생각이 없던 자까지 적으로 돌리게 됩니다. 외부에서 박아넣은 첩자 역시 일단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낫습니다. 그들은 정원에 꼬이는 벌레 같은 겁니다. 잘 관리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리네아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리네아 님은 제게 딸 같은 분입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입니다.”
사라 남작 부인의 혈색이 창백했다.
내 말에 실린 기세가 너무 살벌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과연 첩보 부분을 담당한 여걸다웠다.
첩보는 전문가가 다루어야 할 분야다.
문외한이 함부로 끼어들어 봐야 헛소리나 하기 십상이다.
나는 전문가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그러나 전문가가 믿을 수 있는 전문가인지는 확인해 봐야겠다.
나는 사라 남작 부인에게 목례를 건네며 상태창을 켰다.
사라 남작 부인은 붉은 점이 아니었다.
침실 내부에도 붉은 점은 없었다.
여기까지는 합격이다.
나는 호위 기사들을 뒤에 달고 영주성 전체를 조사했다.
다행히도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적대적인 자는 발견할 수 없었다.
사라 남작 부인은 자신이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이번에는 칼마르 시 전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호위 기사로 나를 수행했던 아쉬리프의 기사들이 나를 따라 도시 전체를 누비기 시작했다.
지나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세상은 지구가 아니다.
투표로 권력자를 끌어내리는 세상이 아니다.
권력을 잃은 자가 일반인으로 돌아가서 평범한 생을 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권력을 지키는 것도 빼앗는 것도 폭력과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나와 내 아내는 이 땅의 권력자들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권력자가 되었다.
조만간 태어날 내 아이 역시 나면서부터 권력자일 수밖에 없다.
권력을 지키지 못한다면 권력자는 죽는다.
이제와서는 어떻게 해서 내가 이곳에 왔고, 과연 돌아갈 가능성은 있는지 따위는 관심도 없다.
여기에 내 가족이 생겼고, 내가 지켜야 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릴 생각이다.
며칠에 걸쳐 칼마르 시 전체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문서로 작성했다.
그리고 그 문서를 사라 남작 부인에게 건넸다.
“문서는 정확성은 내가 보증합니다. 은신처와 구성원의 이름과 인상착의까지 빼 놓은 것이 없습니다. 그들의 은신처는 아쉬리프의 기사들이 감시하고 있으니 인수인계를 받도록 하십시오.”
문서를 확인한 사라 남작 부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내가 따로 부리는 첩보조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정보가 튀어나온 것이다.
“일부는 우리측에서도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나머지는 전혀 모르던 곳입니다. 어떻게 이런 정보를!”
“어떻게 그런 정보를 확인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칼을 들고 영주성으로 숨어들어올 자들을 파악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겠지요. 절대로 그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도록 하십시오.”
“물론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원래라면 이 정도에서 물러나야 했다.
리네아도 아닌 내가 첩보 부분에 더 이상 관여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서로 간에 덕담을 건네며 모임을 마무리하려는 순간, 사라 남작 부인의 제자가 뛰어들어왔다.
전서구가 달고 온 통을 들고 말이다.
일반적인 첩보는 상단의 이동에 따라 흘러들어온다.
상단의 종사자들이 첩보를 날라주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급한 첩보는 전서구를 통해 전달한다.
사라 남작 부인은 전서구를 통해 자신에게 전달된 첩보를 해석한 후 굳은 얼굴로 내게 설명해 주었다.
“프리시오 공작군이 스케티와 뱅트손을 공격하기 위해 원정군을 출발시켰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정예병 위주로 천인대 3개 부대가 움직였다고 합니다.”
“그건 더 말이 안 되는데?”
프리시오 공작은 계속해서 말이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신뢰도를 박살 내는 짓을 저지른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불과 3천의 병력으로 두 명의 공작을 겨냥한 원정군을 보냈다고?
썩어도 준치는 준치다.
아무리 스케티와 뱅트손이 정예 병력을 잃었다고 해도 자신의 성을 지키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불과 3천으로 어떻게 할 상대는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변경백들을 제거하고 아직 정리도 안 끝났을 텐데 원정군을 파견한다고?
아무래도 직접 가서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뭔가 심각하게 꼬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슬금슬금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이번에도 아쉬리프의 기사들과 함께 배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내 움직임이 너무 늦었던 모양이다.
내가 뱅트손의 영역 근처에 있는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스케티가 패배하고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후였다 .
나는 즉시 뱅트손의 성채를 향해 이동했다.
뱅트손의 영역은 생각보다 더 엉망이었다.
연이은 전투로 인해 파괴된 도시와 촌락은 아직 파괴된 건물의 철거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치안을 지켜야 할 경비대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뱅트손도 조만간 스케티와 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도시의 복구는 뒤로 미루고 다들 피난을 가기 바빴다.
징발과 약탈을 경험해봤던 사람들은 다시 한번 그 지옥을 겪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내가 뱅트손의 성에 도착했을 때, 프리시오 공작군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첩보와 달리 천인대 3개에는 미달하는 병력이었다.
대략 천인대 2개와 5백인대 하나 정도?
스케티와의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아직 복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놀라움은 컸다.
아무리 성벽이 일부 붕괴했다고 해도 불과 5백 명 남짓의 피해로 스케티군을 패배시키고, 스케티 공작도 죽였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했는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뱅트손은 쉽게 이기기 힘들 것이다.
아무리 뱅트손의 정예 병력이 전멸했다고 해도, 성벽은 멀쩡했다.
천인대 3개도 안 되는 병력으로 어떻게 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다.
프리시오의 군대가 성채 앞에 진을 치자, 그들 앞으로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이는 것만으로도 풍기는 기세가 보통이 아닌 자였다.
그는 거대한 바위를 굴리며 앞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