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괴물 용병 또는 누군가의 하수인
아르보그 공작가.
프리시오의 공작인 그가 전력을 기울여서 공략해야 할 곳이다.
다른 곳은 이제 볼 것도 없다.
아르보그 공작가는 거인족을 혈족으로 받아들이고, 수인족 역시 중요한 동맹세력으로 받아들였을 정도로 특이한 가문이었다.
인간이 주류인 제국에서도 별종이었고, 가끔은 경원시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가지고 있는 저력이 보통이 아닌 곳이다.
가주인 공작부터가 거인족 혼혈이었고 무력으로만 따지면 선제후들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그러나 지금, 아르보그 공작은 없다.
그의 군대 역시 연이은 전쟁으로 입은 피해로 전력이 급감한 시기다.
게다가 첩자들이 보내오는 정보를 잠깐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공작위 계승을 둘러싼 공작가의 내분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조만간 친척들 간에 피를 튀기며 싸우게 될 것이 분명했다.
최후에 살아남을 자는 아마도 블레인이라는 자일 것이다.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가고 세력을 많이 끌어모았다는 평이니 가문 전체를 뒤엎을 정도로 큰 변수만 아니라면 결국 그가 새로운 공작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분 끝에 공작위를 쟁취한 자가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프리시오 공작은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래서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권을 공략하는 시기를 블레인이라는 자가 공작위를 쟁취하는 바로 그 시점으로 잡고 있었다.
정확할 필요까지는 없다.
대충 비슷한 시기에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권을 공략한다면 무난하게 잡아먹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르보그 공작령까지 이어지는 길을 열어야 했다.
겁쟁이로 전락한 두 공작을 치워버려야 했다.
그러나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의 새로운 동맹인 타르바 왕국에서 보낸 용병의 실력을 확인한 후로는 겁쟁이 공작들 따위는 더 이상 그의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용병 계약을 영원히 연장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더 큰 걱정거리였다.
그 용병은 지금 변경백들을 토벌하라고 보내놓은 참이었다.
변경백 토벌이야 당연히 성공할 것이고, 토벌이 끝나는대로 천인대 몇 개를 붙여서 스케티와 뱅트손, 황제를 참칭하는 두 명의 공작을 밀어버릴 예정이었다.
그다음은?
자기들끼리 뭔가 해보겠다고 옥신각신하고 있는 남부의 귀족들이야 힘과 위엄으로 누르면 그만이다.
귀족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모시던 공작을 몰아내는 하극상까지 저질렀다고 해도 그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뭉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떻게 하든지 누군가는 이익을 보고 누군가는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
그 틈을 파고드는 것은 쉬운 일이다.
어쩌면 자신의 군대를 제국 남쪽 끝까지 보내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프리시오 공작은 잦아드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
제국의 서쪽 국경을 지키던 백작들을 변경백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경백은 아니었다.
원래 변경백은 국가 내부의 국가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로 독립성이 강한 군벌 세력이다.
당연히 그들에게는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도 뒷받침 되어야한다.
그러나 제국 서부에 있는 백작들의 경제력은 충분하지 않았다.
군대는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영지는 적자였고, 영지민에게서 충분한 숫자의 병사를 뽑아내는 것도 버거웠다.
그래서 부족한 재정의 일부는 황도에서 지원받았다.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프리시오 공작에게 의지하기도 했다.
제국 서쪽 경계를 지키는 임무 말고도 프리시오 공작을 견제한다는 의미도 있었던 변경백들의 입장에서는 곤란한 구도였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유지되어 왔다.
제국의 중심에는 황제가 있으니까.
하지만 황제가 궐위된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변경백들에게 주어진 지원은 점점 줄어들었다.
황도가 불탄 후에는 지원이 완전히 끊겼다.
그런 상황에서 프리시오 공작이 황위를 주장하자 변경백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초기에는 프리시오 공작이 황위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까지 격렬한 반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관망하는 태도가 더 강했다.
그러나 프리시오 공작이 결혼 동맹을 선언하고 서쪽 경계 밖의 왕국들과 동맹을 맺기 시작하자 변경백들은 더 이상 관망만 하고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과거의 적이 프리시오 공작과 동맹이 되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게 된 것이다.
단순히 과거의 적이라고 하기에는 많은 사연이 쌓여 있다.
서로 간에 원한이 쌓여서 죽고 죽이는 관계로 발전한 사이였다.
그런 적이 새로운 황제의 동맹이자 황가의 사돈이 되는 것이다.
이러면 자신들이 아무리 프리시오 공작을 지지한다고 해도 숙청은 시간문제였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부딪친다고 봐야 했다.
그래서 변경백들을 격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변경백의 군대는 정예병이었고, 숫자도 공작군에 밀리지 않았다.
싸우면 반드시 이겼고, 약탈을 통한 보급도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프리시오 공작과 적당히 타협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설 정도였다.
그래서 변경백들이 프리시오 공작의 초대에 응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그 모든 기대가 무너졌음을 변경백들의 군대는 느끼고 있었다.
시작은 한 용병의 등장부터였다.
인간이라고 하지만 거인을 방불케하는 체격이었다.
말을 탄 기수보다 더 높은 키에, 약간은 비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육중한 몸매를 가진 그는, 몸놀림도 보통이 아니었다.
한 손에는 그의 몸을 절반이나 가릴 수 있는 통짜쇠로 되어 있는 방패를 들고, 다른 손에는 그의 키만큼이나 되는 거대한 칼을 들었다.
그런 괴물이 기사단과 정면으로 맞부딪친 것이다
괴물 용병에게 달려든 것은 30기로 이루어진 완편 기사단이었다.
그러나 무게와 속도를 만들어낸 충돌의 파괴력도 괴물 용병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쇠로 된 방패는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둔기라고 할 수 있었다.
방패에 맞은 군마와 기사가 동시에 나가떨어졌다.
그것도 한꺼번에 둘이나.
어딘가가 부러진 채 일어나지도 못하는 것은 말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사들 사이에 우뚝 솟아있는 괴물 용병이 이번에는 방패가 아니라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속도를 잃은 채 괴물 기사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은 자기 키의 두 배가 넘는 칼을 상대해야 했다.
충돌로 인해 먼저 쓰러진 자들이 오히려 행운이었다.
기사들이 뽑아 든 칼과 창은 괴물 기사의 거대한 칼과 비교하면 마치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였다.
실제로도 장난감으로 칼을 상대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막는 것이 아예 불가능했던 것이다.
거대한 칼에 맞은 기사들은 글자 그대로 찢겨나갔다.
가죽 갑옷 같은 것은 종이처럼 찢겨나갔고, 가죽 갑옷보다 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도 같은 꼴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철판 갑옷은 찢겨나가지 않았지만, 대신 우그러졌다.
철판 갑옷 안의 사람도 같이 우그러졌다.
얼마나 심하게 우그러졌는지 철판 갑옷의 앞판과 뒤판 사이가 손가락 마디 정도 크기도 안 될 정도로 찌그러지기도 했다.
그 안의 사람이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전의를 잃지 않고 가까이 접근하려는 기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괴물 용병은 모두에게 공평한 자였다.
가까이 접근한 기사들을 후려친 것은 철방패였다.
막는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허공을 날아서 멀리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어떤 방식으로 충격을 받았는지 구멍이 뚫린 곳은 모조리 피를 흘리며 즉사해 버렸다.
30명의 기사들이 정말 한순간에 절반이 사라졌다.
구호나 명령조차 외칠 틈이 없었다.
그들에게 가능한 것은 비명뿐이었다.
기사들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싸울 의지가 있는 자들은 모조리 죽어버렸다.
설사 싸울 의지가 있었다고 해도 이런 장면을 바로 코앞에서 목격하게 되면 싸울 의지가 남아날 수가 없다.
“물러서!”
“도망쳐!”
공포에 사로잡힌 기사들은 다급하게 몸을 돌려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동료들에게 후퇴하라고 경고하면서 도망친 기사들은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한 자들이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주변을 살피지도 못하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공포가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들의 도주는 너무 늦었다.
미리 말을 멈춘 눈치빠른 기사 몇 명은 간신히 몸을 피했지만 나머지는 괴물 용병의 칼 아래서 모조리 찢겨나갔다.
괴물 용병은 더 이상 기사를 쫓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만든 작품 위에 서서 오연하게 적들을 노려보았다.
괴물 용병의 주면에는 시체밭이 펼쳐져 있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지금까지 괴물 용병이 죽인 병사들이었다.
마치 들판에서 낫질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병사들이 한꺼번에 죽어나가는 꼴을 보다 못해서 변경백 직속의 기사단이 한꺼번에 달려들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괴물 용병 앞에서는 기사들 역시 병사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폭로했을 뿐이다.
그 장면을 전투 현장의 모든 병사들이 보았다.
괴물 용병 앞에서는 귀족도 기사도 병사도 구분할 것 없이 모두가 평등했다.
전투의 흥분이 사라지고 공포가 뒤덮기 시작했다.
변경백의 정예병들은 자신들이 최악의 상황에 부딪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와아아아아!”
“밀어붙여라!”
“공격! 공격!”
함성이 울려 퍼졌다.
프리시오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었음을 깨달았다.
남은 것은 직접 가서 승리의 결과를 수확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을 막을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들을 막는다면 괴물 용병을 부르면 그만이었다.
프리시오의 병사들이 일제히 진군하기 시작했다.
프리시오를 따르는 기사와 귀족들은 병사들보다 더 흥분해서 먼저 튀어 나갈 정도였다.
변경백의 군대는 허무할 정도로 무너져 버렸다.
모든 병력은 각자 알아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아바르 변경백의 장남인 바르드레 남작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그는 소수의 측근들과 함께 전력으로 도주했다.
일단은 부친의 영지로 돌아가서 돌아가는 상황을 살필 생각이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복수만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친을 수행했던 가신이 탈출에 성공해서 프리시오 공작이 저지른 불명예에 대해 보고해온 것이다.
“회담에 참석하셨던 여러 변경백 각하들 중 탈출하신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회담장으로 진입하려던 모든 시도는 실패했고, 수행원들 중 살아남은 자 역시 몇 명 안 됩니다.”
“회담장에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프리시오 그 작자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분이 있었다면 분명히 밖으로 탈출하셨을 테니까요. 회담장 안에는 프리시오과 변경백 각하분들 이외에는 몇 명의 시녀가 전부였습니다.”
바르드레 남작의 눈에 핏줄이 섰다.
한쪽 눈의 핏줄이 터져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복수를 위해 프리시오에게 달려들고 싶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다.
더구나 새로이 등장한 괴물 용병을 생각하면.
그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떨렸다.
분노와 두려움이 동시에 그를 사로잡았다.
복수를 하고 싶다면 프리시오 공작의 군대뿐 아니라 선봉장 노릇을 하는 괴물 용병까지 처리해야 했다.
그리고 나서야 프리시오 공작의 목에 칼을 꽂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만한 자가 있을까?
지금 당장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황도가 불타던 날 남문에서 만났던 자.
제국이 전쟁에 휩싸일 것을 예언했던 자였다.
칼마르의 백작 윌리엄.
그 사람 이외에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바르드레 남작은 영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부친의 영지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지만 않기를 바라며 칼마르로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