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사냥 준비
비엘리는 남부 해상 교역망의 중요 거점 중 하나로, 바다 건너 대륙으로 건너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르는 교역항이다.
떠오르는 해를 왼쪽에 두고 4일만 항해하면, 별다른 문제 없이 바다 건너 대륙의 쿠나 왕국에 도착할 수 있기에 많은 상단에서 마지막 기항지로 선택하는 곳이다.
세르케티의 사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두 개의 섬나라를 경유해 온 그들은 마지막으로 비엘리에 들러서 물과 식량을 보충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비엘리에 입항한 세르케티의 함선은 두 척이었다.
몇 년에 한 번 사용하기 위해서 상선까지 여러 척 소유할 생각은 없었던지 한 척은 상단으로부터 임대한 상선이라고 한다.
종교적 영향력이 약한 이 세상에서 이 정도의 자원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백작같은 대귀족에게는 못 미치겠지만, 제법 세력있는 남작급은 된다고 봐야 한다.
역시 두 개의 대륙에 걸쳐서 조직을 구성해 놓은 종교다웠다 .
나는 상선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부두에서 떠났다.
사제로 보이는 사람은 몇 명 안 보이고 나머지는 모두 선원인 것을 보면 대부분의 사제는 대사제와 함께 배에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사제가 아니라 경호 기사일까?
나는 잠시 부두를 살피다가 다리클리프의 용병사무소로 향했다.
용병사무소장은 세르케티에 대해 이렇다 할 정보를 수집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소식을 모아놓고 내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해 주었다.
“그렇다면 두 척의 배에 있는 자들은 모두 세르케티의 신자라고 보면 되겠군.”
“그렇습니다. 윌 님. 신자가 아니더라도 세르케티의 신전에서 병을 고친 자들로 채웠을 겁니다. 임대한 배에는 그 정도로도 충분하지요.”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생각보다 넓은 세르케티의 영향력에 나는 놀라고 있었다.
두 척의 배를 자신의 신자로만 채울 수 있다니 종교적 영향력이 약한 이곳에서는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원래 비엘리에도 세르케티의 신전이 있어서 선원과 용병들의 치료를 전담했다고 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불가능하지는 않지요”
“역시. 그런데 왜 이곳에서 이틀이나 머무른다고 하지? 물과 식량을 보충하는 것이라면 반나절이면 되지 않나?”
“신전의 재건에 대해 비엘리 국왕과 의논하기 위해서랍니다. 사제들이 내일 방문할 예정입니다.”
순례 중에 겸사겸사 정치적인 일도 해결하는 모양이다.
비엘리에 신전을 세우는 것은 저들에게도 분명 중요한 문제니까.
어서 대신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대사제의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신전의 재건을 위해 며칠 정박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왕에게 기부를 요청하겠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왕은 가난뱅이라서 별 소용은 없을 겁니다. 개인 재산이 없어요. 세금은 모조리 비엘리의 재건에 쏟아붓고 있어서 따로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귀족들이 연합해서 세금 사용처를 감시하고 있거든요.”
“귀족들의 세력이 강한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왕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왕의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데 귀족들에게는 지원해주는 출신 가문이 있으니까요. 바다 건너 왕국이라고 해도 뱃길로 겨우 4일입니다. 언제든지 지원군이 몰려올 수 있습니다. 왕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요.”
다리클리프의 용병사무소 소장에게서 나오는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왕과 귀족 사이의 속사정까지 하나하나 이름을 거론하며 설명해 주었다.
비엘리의 재건국 초기부터 활동을 시작한 다리클리프의 용병사무소는 비엘리 곳곳에 촉수를 뻗고 있었다.
사소한 일이라면 모를까 비엘리에서 다리클리프의 눈을 피해서 큰일을 저지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소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용병사무소에서 알기 원한다면 금방 알 수 있다.
칼마르의 백작이 직접 부탁해온 정보수집 따위는 그들의 입장에서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리클리프와 칼마르 사이의 유대를 생각하면 자신의 일처럼 처리해 주는 것이 당연했다.
다리클리프에게 칼마르는 믿을 수 있는 거래처이자 최후의 보루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다리클리프 역시 칼마르에게 믿을 수 있는 동업자이자 전우다.
나는 이런저런 소식을 내게 전해준 다리클리프의 용병사무소장에게 한웅큼의 금화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윌 님.”
“너무 일을 잘해 줘서 오히려 내가 감사하지.”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가?”
“세르케티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비엘리의 귀족들 중 일부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비엘리의 내정은 비엘리 사람끼리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하네. 범위를 넓혀도 포를라나 펠트리아라면 모를까 우리는 자격이 없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도 귀만 열어놓고 입은 다물고 있습니다.”
“알겠네. 그 일도 감안을 하지.”
나는 조용히 용병사무실을 떠났다.
칼마르의 백작이 신분을 숨기고 가명으로 방문했으니 알아서 입단속을 할 것이다.
그 정도 눈치는 있는 자였다.
비엘리의 국왕이 된 남작은 상당히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곳에 칼마르가 손을 뻗을 생각이 아닌 이상 함부로 관여할 수는 없다.
나는 출항 전날 밤을 기다리며 부두 근처의 숙박 시설에서 조용히 대기하기로 했다.
깊은 밤에 조용히 나가서 임대한 상선의 항해가 불가능하도록 망가뜨릴 계획이었다.
전깃불이 없는 세상에서 빛은 사치재다.
해가 지면 잠을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다.
밤 10시가 초저녁이나 다름없는 지구와 달리 이곳에서 밤 10시는 모든 이가 잠자는 아주 깊은 밤이다.
나 역시 이 세상의 상식에 맞추어 깊은 밤에 방화 재료를 짊어지고 숙박 시설에서 조용히 나섰다.
아무도 보지 않는 거리를 가로질러서 부두에 정박 중인 상선으로 접근했다.
상선에는 보초를 서고 있는 선원이 부두 방향으로 서 있었다 .
부두에 접안하고 있는 상선도 여러 척이고, 부두 방향을 지켜보고 있는 선원과 상인도 여러 명이었다.
부두 방향에서 들키지 않고 상선까지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즉시 부두 외곽으로 빠져서 미리 준비해 둔 작은 조각배를 바다로 띄웠다.
나를 감싸는 바람이 조각배를 조용히 상선으로 밀고 갔다.
노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돛을 올린 것도 아니니, 멀리서 보면 그냥 표류하는 조각배로 보일 것이다 .
나는 조각배에 누운 채 목표로 한 상선을 향해 바다 쪽에서 천천히 접근했다.
상선이 항해를 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방법은 많다.
돛을 불에 태워버려도 되고, 키를 박살내도 된다.
물을 담아놓은 통을 부수거나 식량창고에 불을 지르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요지는 선체를 부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나무라고 해도 배를 만들기 위해서는 만든 판자는 철판 못지않게 튼튼하다.
도끼질을 한참 해야 어느 정도 구멍을 낼 수 있을까?
몰래 상선을 파손시켜야 할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이럴 때는 내 남작령에서 연구를 하고 있을 화약이 아쉽기만 하다.
쓸만한 폭탄만 있으면 이런 목선 따위는 단숨에 가라앉힐 수 있는데 말이다.
세르게티에서 임대한 상선에 도착한 나는 조용히 상선을 기어올라갔다.
보초를 서고 있던 몇 안 되는 선원들은 모두 부두 방향을 바라본 채 술을 마시며 잡담을 하고 있었다.
웬만한 소음이 아니면 들킬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소리를 죽인채 돛대로 향했다.
돛대 밑에는 정박 중이라서 돛대에서 내려놓은 돛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곳에 기름을 넉넉하게 부었다.
그때 멀리서 고함소리같은 것이 들렸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음도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비엘리의 왕성이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예상대로였다.
멀리 비엘리의 왕성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 불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은 잠깐 사이에 덩치를 키워서 하늘로 기둥을 세웠다.
조만간 일어나리라고 다들 예상하고 있었던 귀족들이 반란이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하필이면 날을 잡아도 이런 날을!
나는 도와주지 않는 머저리들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멍청한 놈들!
근본없는 자들이 비엘리의 귀족이 되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섬 밖의 사람들이다.
출신국의 도움을 받아 국왕을 끌어내리면 과연 주변의 섬나라에서 가만히 있을까?
프리시오 공작의 함대조차 격퇴해낸 자들이다.
바다 건너 남쪽 대륙의 왕국들이 섬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이번에 비엘리면 다음에는 펠트리아라고 생각할 것이다.
얼마 후면 이곳은 다시 전투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나는 잠에서 깨어난 자들이 눈치채기 전에 내가 올라온 뱃전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기름을 먹인 종이 뭉치에 불을 붙여서 돛대를 향해 던졌다.
작은 불덩이는 호선을 그리며 내가 기름을 부어 놓은 곳에 떨어졌다.
불길은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돛을 삼켜버린 불길이 돛대를 감싸고 치솟았다.
돛과 돛을 연결하는 밧줄 그리고 돛대까지 다함께 활활 타올랐다.
나는 당황한 선원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면서 조각배로 뛰어내렸다.
조각배에 다시 누운 채 바람을 움직여 상선에서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불길이 돛대 끝까지 치솟았다.
*
돛대가 불에 휩싸인다.
돛대 아래에 쌓아놓은 돛도 함께였다.
“불이야! 불이야!”
“이게 무슨 난리야! 저쪽에서 불난 것을 보고 있었는데 왜 우리 배에서 불이 난 거야?”
“낸들 아나. 어서 불이나 꺼!”
보초를 서던 선원들은 다급하게 불을 끄려고 했다.
그러나 도구가 없었다.
방재를 위해 물과 모래를 담아놓은 통을 준비해 놓았지만, 그런 것은 모두 선실 안에 있었다.
이렇게 간판에서 불이 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작은 불이라면 바지라도 벗어서 두들기면서 끄겠지만, 이 불은 아니었다.
척 봐도 사람 여럿 잡아먹을 것처럼 순식간에 덩치를 키우는데 함부로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뒤늦게 상황을 알고 합류한 선원들이 물과 모래를 퍼부으면서 소화를 시도했지만 너무 늦었다.
불은 태울만한 것을 다 태우고서야 스스로 꺼졌다.
상선 전체로 불길이 번지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다.
불을 다 끄고 난 뒤에야 뒤늦게 나타난 선장은 갑판장에게 화를 내며 고함을 질렀다.
“도대체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해야 배에서 화재가 나나!”
“방화입니다.”
“뭐?”
선장의 분노는 갑판장의 보고를 받자마자 사그라들었다.
“기름이 부어져 있었던 것이 분명해요. 선장. 누군가가 방화를 했습니다.”
“아니 왜?”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지만······”
“하지만 뭐?”
“그래요. 갑판장. 하지만 뭐라고 생각합니까?”
갑자기 끼어든 사람은 흰색 옷을 입고 있는 젊은 사제였다.
대사제의 비서장 노릇을 한다는 그는 순례단의 전체적인 여정을 담당하는 자였다.
갑판장은 입을 닫고 손을 들어서 점점 불길이 커지고 있는 왕궁 방향을 가리켰다.
선장은 갑판장의 반응에 그 역시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반란과 관련이 있다는 거야?”
“낮에 사제님들이 왕궁에 갔었지 않습니까? 협조자로 찍힌 것이겠지요. 나대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는 협박일 겁니다.”
“그럴듯해.”
선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갑판장의 추측에 동의했다.
그러나 갑판장의 추측을 들은 젊은 사제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즉시 출항이 가능합니까? 선장.”
“안 됩니다. 사제님. 이 배는 대수리를 해야 합니다. 조선소로 들어가서 윗간판을 뜯어내고 돛대를 교체하지 전까지 못 움직입니다.”
“이런! 어떻게 방법이 없겠소? 일행이 많단 말이오.”
“안 됩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즉시 출항하지 않으면 곤란할 수도 있습니다. 전투가 끝나면 분명히 상선들을 억류하러 올 겁니다.”
과연 선장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주변의 상선 중에서 닻을 올리기 시작한 상선이 벌써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광경을 본 젊은 사제는 다급하게 자신의 배로 돌아갔다.
자신이 결정하기에는 너무 큰 사안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대사제의 결단을 필요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