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신의 파편을 모으는 자들
지구에서 신이 죽었다고 할 때의 신은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신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적인 선언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와 도덕으로 대표되는 절대적인 가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이 죽었다는 말로 빗대어서 대중에게 도발적으로 화두를 던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지구가 아니다.
이 책자를 읽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지구에서 쌓은 상식을 버려야 했다.
우선 한 번 내용을 읽고 난 후 책자를 전체적으로 살펴보았다.
혹시, 책자 안에 숨겨놓은 메시지가 있을까 싶어서 책을 묶은 끈을 풀어서 제본을 해체하고, 책등과 표지까지 샅샅이 살폈다.
심지어 낱장으로 된 종이를 물에 담가보거나 촛불에 가열해 보기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별도로 발견한 것은 없었다.
그런 나를 조용하게 보고 있었던 사람들은 내가 해체했던 책을 다시 묶기 시작하자 침묵을 깼다.
“윌리엄 백작은 무척 꼼꼼한 사람이었군요. 숨겨져 있는 증거를 찾기 위해 책을 해체하는 것은 본 적이 있지만, 종이를 불에 대어보는 것은 처음 봅니다. 대충 이유는 짐작하는데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짐작하시는 이유가 맞을 겁니다. 엑사드 경.”
“특별한 잉크겠지요? 재료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저도 모릅니다. 잉크 장인이 자신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하하하.”
이 노인네가 진짜!
분위기를 타서 얼렁뚱땅 날로 먹으려고 하다니!
어색하게 웃는 모습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옆에서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알라드 역시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뚱한 표정이었다.
블레인을 내버려 두고 공작 내성에서 벗어난 나와 아스워드는 내가 어제 머무르던 곳으로 돌아갔다.
조용한 장소에서 책자를 검토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이 두 늙은이가 태연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스워드는 나를 이곳에 두고 곧장 밖으로 나갔지만, 두 노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두 노인의 관심은 책자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죽은 아르보그 공작이 아는 것은 자신들도 모두 안다는 말로 내 항의를 봉쇄했다.
엑사드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책자의 첫머리를 암송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억지로라도 내보내는 것은 별로 의미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자를 해체한 것이다.
아무래도 그들의 관심은 책자를 읽은 후의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끈으로 책을 다시 묶은 후 한 번 더 정독했다.
제국 공용어뿐 아니라 영어와 한국어로 기록된 부분까지 살피는 나를 보던 알라드가 끼어들었다.
“혹시 윌리엄 백작은 그 낯선 문자들을 읽을 수 있는 건가?”
조금 전의 불퉁했던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기대에 찬 얼굴로 변한 알라드의 기대를 만족시켜 줄 생각 따위는 내게 없었다.
나는 그를 향해 대놓고 거짓말을 했다.
“모릅니다. 이런 것은 처음 봅니다.”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열심히 살펴본 건가?”
“혹시나 해서 살펴보았을 뿐입니다.”
내 말에 알라드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책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저자의 이름도 없는 책이다.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되어 있고,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도발적인 첫 문장과 달리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어디선가 본 것처럼 평범했다.
특히, 별의 의지가 미쳐버린 신을 죽였고, 죽은 신의 몸은 이 세상에 흩뿌려졌다는 앞부분은 평범한 창세신화의 한 장면이었다.
지구에도 비슷한 신화가 여럿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죽어버린 신적인 존재의 육신으로 땅과 하늘을 만드는 신화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다음은 지구에서는 못 본 내용이었다.
이 세상에 흩뿌려졌다는 죽은 신의 몸은 그 자체로 신을 향한 여정의 출발점이 되고,
우연이라도 죽은 신의 파편을 흡수한 자는 신의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신비에 접한 자들이며,
신의 파편을 모으면 모을수록 다양하고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고,
신의 파편을 모두 모으게 되면 결국 신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 책의 저자는 이 모든 내용이 별의 의지에게 직접 들은 것을 이해하기 쉽게 윤문해서 기록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기록이 근거없이 일방적으로 떠드는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다른 세상에서 왔음도 드러냈다.
3개의 언어로 기록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것들 중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기는 했다.
내 추측과 부응하는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이 세상의 사람들이 과연 글쓴이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아무리 3개의 언어를 증거로 내밀었다고 해도 주장의 근거로는 미약할 뿐이다.
가상의 문자까지 만들어내다니 학식있게 미쳤다는 말이나 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나는 글쓴이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글쓴이와 마찬가지로 지구에서 왔으니까.
비록 오래전에 죽은 자겠지만, 그는 나와 같은 뿌리를 공유하는 자였다.
나는 이미 그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별의 의지라는 것은 뭔데 왜 사람을 차별하지?
책자의 저자는 직접 만나서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으면서 내게는 왜 아무 정보도 주지 않고 이 세상에 던진 거야?
그것도 두 번이나!
살짝 빡치는 느낌이었다.
그런 내게 엑사드가 말을 걸었다.
“아르보그 공작 가문에 속하지 않은 자가 그 책을 본 것은 처음이 아닐까 싶군.”
“그렇습니까?”
“읽어 본 소감이 어떤가?”
“많은 부분에서 맞아 떨어지기는 하는데 이거 믿을 수 있는 겁니까?”
본심과 달리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내게 엑사드는 가문의 비사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믿지. 이 기록을 믿은 덕분에 살아남았으니까. 과거에는 다른 가문에도 우리와 같은 자들이 좀 있었네. 그러나 지금은 없지. 우리는 이 기록을 믿고 3백 년 전에 등장한 그자를 철저하게 피해 왔었지만, 다른 가문의 늙은이들은 이 기록에 대해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었거든. 그 결과는 참담했지. 신의 파편을 모은다는 기록에 주의했던 우리만 남고 말았지 뭔가. 다들 그자에게 잡아 먹힌 것이지. 다른 공작 가문에는 신비에 대해 제대로 된 전승이 내려오지 않는 것이나 내전 당시의 기록이 부실한 것은 그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네.”
“설마 두 분의 나이가?”
“그래. 우리 둘 다 4백 살이 거의 다 되어가네. 인간의 나이가 100살을 넘기 힘든 것을 생각해 보면 이것도 신비의 영향이겠지.”
어째 원로원의 실세이면서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싶었더니만.
머리가 복잡해진 내게 알라드가 끼어들었다.
“다들 신비를 무슨 인간을 초인으로 만들거나 이적을 행사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던데, 원래 신비는 신이 되는 여정에 서 있다는 증거일 뿐이야. 신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부분을 벗어던지는 것뿐이지 특별한 힘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어.”
“좋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아르보그 공작은 왜 내게 이런 것을 줬을까요? 두 분의 태도 역시 어제와 다릅니다.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내 질문은 진작에 나왔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지금 두 사람의 태도는 정상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르보그 공작의 태도도 이상했다.
죽어가는 와중에 내게 유언을 남겨?
그가 볼 때 나는 적이 아니었던가?
아무래도 다들 내게 원하는 것이 있음이 분명했다.
서두는 엑사드가 열었다.
“우선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지. 제국은 붕괴했네. 그 존재가 다시 등장한다면 모를까 재통일의 가능성은 없어. 제국의 영토가 너무 넓어서 아무리 세력이 큰 귀족이라도 동원해야 할 원정군의 규모를 감당하지 못할 거야. 세력이 깎일대로 깎인 스케티나 뱅트손 같은 자들은 물론이고 프리시오 공작조차 가능한 일이 아니지. 기껏해야 주변 세력을 평정하는 것으로 끝니지 않을까 싶네. 아마 백작도 그 때문에 귀족연합자치령이라는 것을 만든 거겠지.”
그렇다.
그것이 내가 한사코 전쟁을 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국이 모양새를 잡아가던 시기와 달리 지금은 전쟁 기술이 발달해서 돈과 자원이 지나치게 많이 필요하다.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멀리 가는 것은 영지를 파산시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행동이다.
내가 볼 때 귀족연합자치령이 진출할 수 있는 한계는 아르보그 공작령 정도가 된다.
뱅트손령까지는 절대 불가능하다.
프리시오 공작령 쪽에서는 뱅트손 정도까지가 한계일까?
결국 제국은 2개 아니면 3개 정도로 분할될 것이다.
이것은 군사력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통신 및 이동 수단의 한계 때문에 그어지는 선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엑사드는 그런 내게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나 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귀족연합자치령의 가능성에 대해 매우 긍정적일세. 귀족연합자치령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도 크다네. 게다가 최악의 경우 우리가 프리시오 공작과 귀족연합자치령 사이에 끼어서 찢겨질 수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그래서 가문 내 구성원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네. 우리 태도에서 무엇인가 변화된 것이 있다면 그래서였을 걸세.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 바로 어제였으니까.”
싸우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아르보그령의 군대는 다른 곳과 달리 아직 건재했다.
만약 전면전으로 붙는다면 양쪽 모두에게 파멸적인 결과가 닥쳐왔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알라드가 입을 열었다.
“아르보그 공작은 신이 되는 여정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 사실 지슬리 공작령을 쳐들어갔던 이유 중의 하나가 그 때문이기도 해. 그곳에는 신의 육체가 떨어졌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 있거든. 만일 전설이 사실이라면 신의 파편이 부지기수로 쌓여 있었겠지. 나는 그가 공작이 되지 않았다면 신의 파편을 모으는 여정에 나섰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백작이 공작의 유언을 전달할 때 많이 놀랐어. 어쩌면 아르보그 공작은 자신이 하지 못했던 일을 백작이 하기 원했을지도 몰라. 그래서 그런 유언을 남겼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
알라드는 내 앞에서 손을 움직였다.
두 개의 팔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 역시 신비를 접한 자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의 신비는 빠름이었다.
갑자기 그의 어조가 무거워졌다.
“신의 육체가 세상에 흩뿌려졌다고 했지?”
“그렇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비에 접했을까?”
“......아주 많이?”
“그런데 신비를 접한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지. 적어도 흔하게 볼 수는 없어. 그렇다면 어떻게 된 걸까? 혹시 누가 신의 파편을 모으고 있는 걸까? 그것도 지나칠 정도로 잘? 어떤 수단을 사용하는 걸까? 백작이라면 어떤 수단을 사용할 텐가?”
나는 침을 삼켰다.
질문이 거듭될수록 답은 점점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영주가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것은 그의 영지 한정이다.
다른 지역에는 힘을 쓸 수가 없다.
대귀족이라고 해도 영지가 더 커지는 것뿐이지 본질은 같다.
그렇다면 귀족은 아니다.
여러 영지에 약한 영향력이라도 끼칠 수 있고, 또한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은 한 종류의 집단 뿐이었다.
나는 알라드 못지않게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종교단체. 세르케티처럼 규모가 큰 종교단체겠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