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아르보그의 결정
내가 볼 때, 블레인이 이대로 물러서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선택이다.
그런 짓을 한다면 그의 세력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가 된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그의 세력은 소수의 열렬한 지지자와 다수의 관망자로 분리되고 말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 사람들은 아르보그 공작이 남겼을지도 모르는 유언을 의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유언을 남겼을까?
후계자에 대한 언급도 있겠지?
혹시 유언의 내용이 블레인에게 불리한 것은 아닐까?
만약, 블레인이 아닌 다른 사람을 후계자로 언급했다면?
유언의 내용은 한글자도 새어 나가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에 비추어 온갖 상상을 하기 마련이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블레인을 지지하는 귀족의 입장에서는 위태롭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블레인을 위해 열심히 노력을 하면 할수록, 얻을 수 있는 이익에 비해서 위험의 수위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것이다.
출세에 목이 마른 개인이라면 모를까, 가문의 존속을 생각해야 할 귀족의 입장에서 이것은 지나치게 위험한 선택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대다수의 귀족들은 유언의 내용을 확인한 후에야 움직이려고 할 것이다.
큰 이익은 없지만 큰 손해도 없는 선택.
어쩌면 그게 가장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도박판에 가문의 운명을 거는 귀족은 없는 법이니까.
게다가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블레인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나 같은 외부인조차 원로원의 움직임이 블레인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정도다.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던 블레인이 이런 상황을 모를 리가 없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블레인은 지금 당장 행동을 해야 했다.
아직 대세가 그에게 있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을 때, 반대자들을 제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스워드처럼 심부름꾼으로 전락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
지나치게 공작위에 가까웠던 경쟁자는 새로운 공작에게 위험한 존재일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블레인에게는 새로운 공작보다는, 새로운 공작에게 충성심을 입증하고 싶어하는 과거의 심복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과연 블레인도 나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을 간신히 펴고 내게 선언했다.
“윌리엄 백작. 나는 적의 맹세를 믿을 정도로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게다가 당신은 칼마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명예를 버리는 대가로 승리를 할 수 있다면 당신은 기꺼이 그렇게 할 겁니다.”
맞기야 맞는 말이지만 인정할 수는 없는 발언이었다.
나는 아직 명예를 저버린 적도 없고, 앞으로도 쉽게 명예를 저버릴 생각은 없다.
내가 명예를 버리게 하고 싶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정성있게 분노할 수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내 분노에는 약간의 가식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감히 내 명예를 모독하다니! 블레인 경. 확실히 해 두지요. 당신은 방금 귀족연합자치령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소. 그런데 당신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는 한 거요? 나는 당신이 공작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전쟁 선포라니! 귀족연합자치령이 언제부터 우리와 같은 편이었습니까? 우리 사이에서 벌어졌던 전쟁은 끝난 적이 없습니다. 잠시 쉬고 있었던 전쟁을 다시 시작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자격이 있느냐고 묻고 있지 않소? 대답하시오! 당신이 새로운 아르보그 공작이오? 당신에게 멈췄던 전쟁의 수레바퀴를 다시 돌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거요?”
꼬투리를 잡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블레인이 말을 얼버무린다면 그는 자신이 대세가 아님을 스스로 선언하는 셈이 된다.
그를 지지하던 귀족들에게 당분간 상황을 관망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을 쥐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싫다고 기분대로 내지르기에는 말의 책임이 무겁다.
자신에게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주장을 했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정치적 위험을 지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차라리 그것이 더 나았다.
외부의 위협을 명분으로 삼아서 힘으로 공작위를 탈취하는 것이 가능하니까 말이다.
전쟁이니 유언이니 하는 것은 그다음에 해결할 문제다.
블레인은 선택의 기로에 서서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상황에 빠진 그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가는 것이 내게도 보일 정도였다.
그러니 그의 옆에 있던 귀족들에게는 어떻게 보였을까?
“내가 말이 지나쳤습니다. 나는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단지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블레인은 책임을 회피하기로 결심을 한 모양이다.
시간을 벌고, 휘하의 귀족들을 설득해서 최대한 빠르게 공작위를 탈취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아르보그 공작의 유언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제는 불가능한 선택지였다.
귀족들의 다수가 그를 지지한다는 것을 너무 믿는 것 같았다.
과연 현실은 냉정했다.
블레인을 위해 나를 가로막았던 영주들조차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블레인을 위해 무력행사를 불사하려던 자들의 태도가 변한 것이다.
블레인이 잠깐 망설인 순간이 결정적인 변곡점으로 되어버렸음이 분명했다.
이 정도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넘치도록 해주었다.
책자에 대한 대가는 충분했다.
이제부터는 아르보그 공작의 사람들끼리 알아서 할 일이다.
“나는 이미 진실을 이야기 했소. 블레인 경. 내게서 더 이상 들을 말은 없을 거요.”
나는 더 이상 질척거리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블레인은 그런 내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자신과 함께 온 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표정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내 예감은 그가 곧 죽을 사람임을 예고했다.
이곳이 그의 죽을 자리가 될 예정이었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그의 결정이 오히려 그의 죽음을 앞당긴 모양이다.
아니면 설마 지금 당장 움직이려고 했던 것일까?
그런 짓을 했다가는 옆에 있는 칼이 단숨에 그를 찌를텐데.
어쨌든 이제부터는 아르보그의 사람들끼리 알아서 할 문제였다.
나는 블레인에게 마지막으로 정중한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떴다.
*
윌리엄 백작의 최후 통고는 명확했다.
블레인은 그가 절대로 태도를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로원 아니면 공작 부인이 윌리엄 백작을 포섭한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둘 다 일지도.
그래서 블레인은 지금 당장 자신을 따라서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있는지 헤아려 보았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설득한다면 모를까 지금 당장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만큼 숫자를 모으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간이 부족하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다면 가능성이 확 높아질 텐데!
그러나 그 시간을 만들 수가 없었다.
아르보그 공작의 유언 때문이었다.
아르보그 공작의 유언이라니!
윌리엄 백작의 방문 이유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유였다.
블레인은 윌리엄 백작이 유언에 대한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자신이 세웠던 모든 전제가 무너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르보그 공작의 유언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심지어 윌리엄 백작을 신뢰할 수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르보그 공작의 유언이 갑자기 튀어나왔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
사람들이 아르보그 공작의 유언을 인식한 순간, 온갖 종류의 가짜 유언이 범람할 것이다.
가짜 유언이 노리는 목표는 공작위에 가장 가까운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군대를 장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군대를 지휘하게 내버려두면 그 목적지가 귀족연합자치령이 아니라 다음 대의 아르보그 공작위가 될 것이 뻔했다.
블레인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다.
숫자가 충분하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윌리엄 백작이 나가지 못하도록 입구를 막았던 두 명의 영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블레인의 지지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신뢰가 두터운 자들이었다.
블레인은 윌리엄 백작과 아스워드가 떠나자마자 그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경들이 지금 즉시 해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경들의 휘하에 있는 기사들을 이끌고 원로원을 장악해 주십시오. 반항하면 죽여도 됩니다.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아! 그리고 알라드 경은 나를 지지하니까 정중하게 대하도록 하십시오. 나는 공작 부인을 만난 후 곧장 원로원으로 향하겠습니다.”
블레인의 말에 두 명의 영주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블레인은 그들에게 다시 부탁한다고 말하며 자신과 함께 온 기사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고개를 든 영주들의 눈빛은 별로 복종적이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서 행동을 서두르던 블레인은 그런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블레인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데리고 온 기사들에게 공작 부인에게 갈 예정이니 자신을 호위하도록 명령했다.
“공작 부인을 제압하려는 건가요?”
“공작 부인보다는 두 아들이 우선이다. 모두 인질로 잡아갈 생각이지만 반항하면 죽여도 돼. 시간이 없으니까 서둘러야 한다.”
블레인은 바로 옆에 선 채 질문해온 라그닐드에게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설명해 주었다.
라그닐드는 블레인의 대답을 듣자마자 곧장 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라그닐드의 행동은 블레인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블레인의 옆구리에 갖다 댄 그녀의 손에서 손톱이 단검처럼 자라났다.
단검보다 더 날카롭고 단단한 손톱은 마땅히 있어야 할 장소 즉, 인간의 피와 살 사이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어!’
비명이라고 하기에는 약간은 멍청하게 들리는 외마디 단말마였다.
블레인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라그닐드를 바라보았다.
라그닐드가 자신의 옆구리에 손을 대었을 때, 블레인은 이것이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라그닐드의 간단한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오해였다.
블레인의 옆구리 깊숙이 찔러들어온 라그닐드의 손톱은 치명적이었다.
블레인은 비틀거리며 그녀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라그닐드는 망설이지 않고 다시 한번 블레인을 찔렀다.
이번에는 아랫배에서 심장과 폐를 향해 위로 올려 찔렀다.
그것으로 블레인은 끝이 났다.
방금까지도 아르보그 공작위를 쟁취하기 위해 욕망을 불태우던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평범한 시체 하나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경악한 기사들과 영주들이 상황을 파악한 것은 블레인이 죽은 후였다.
많은 질문이 담긴 그들의 얼굴을 보며 라그닐드가 선언했다.
“블레인은 죽었다. 당신들이 죽은 자를 위해 무기를 들겠다면 기꺼이 상대해 주겠다.”
“왜?”
“원로분들과 공작 부인의 합의에 따른 것이다. 나는 아르보그 공작가에 충성한다.”
죽은 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책자에 있는 첫머리의 문장은 익숙한 내용이었다.
[신은 죽었다.]
물론 그 의미는 내가 지구에서 배운 것과 전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