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14화 (214/248)
  • 214. 블레인, 오해하다.

    아스워드는 입을 다물고 귀를 열었다.

    두 원로는 세상의 비밀을 그들의 후계자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

    다음날 나를 안내하러 온 자는 아스워드였다.

    어제의 그와 오늘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어제는 같은 편에게 배반이라도 당한 것처럼 흥분하더니 지금은 과묵한 기사의 전형처럼 행동했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입을 열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르보그 공작이 남긴 것에 대해서는 질문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인족 혼혈이라고 해도 저렇게 무게를 잡고 있으니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풍기는 위엄이 보통이 아니었다.

    과연 차기 아르보그 공작위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었던 자답다고나 할까?

    부족한 경험만 제대로 쌓는다면 공작까지는 아니더라도 괜찮은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해 보였다.

    아스워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공작성 내부 깊은 곳까지 안내했다.

    외부인이라면 접근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경계를 서고 있는 기사나 일과를 위해 돌아다니고 있는 시종들의 복장을 보아하니 공작가의 서재는 공작 개인의 공적인 장소와 사적인 장소 사이의 경계에 있는 느낌이었다.

    서재의 규모는 작지 않았다.

    놓여 있는 가구와 그 규모로 미루어 보건대 아르보그 공작의 개인적인 집무실을 겸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규모에 비해서 책의 숫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대량 출판기술이 없는 시대이니만큼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아직 책은 사치품이었다.

    제국 공작의 개인 서재에 있는 책들이 서재의 벽 한 면을 간신히 채울 정도로 초라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제국의 통치를 위한 자료가 필요했기 때문에 대놓고 돈을 퍼부어대며 문서를 생산하던 황궁 도서관같은 조직이 예외인 것이다.

    그래도 덕분에 아르보그 공작이 내게 남긴 말을 따르기는 쉬웠다.

    서재 위에서 두번째 줄에 있는 3, 8, 12번째 책을 꺼냈다.

    무겁고 두꺼운 책이었지만, 책의 제목도 보지 않았다.

    책을 꺼낼 때마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미리 정신을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면 듣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책장에 무엇인가 장치가 설치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아르보그 공작이 언급한 3권의 책은 그 장치를 움직이는 트리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과연 3권의 책을 모두 꺼내자 책장 구석에 있던 책 한 권이 앞으로 밀려 나왔다.

    [인간의 신화와 신비에 대해]

    제목부터가 학자라면 모를까 고위귀족이 읽을만한 책이 아니었다.

    심지어 저자의 이름도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우연히 다른 사람의 손을 타는 일을 막고 싶었다면 나쁘지 않은 표지라고 하겠다.

    별로 두꺼운 책은 아니었다.

    이곳의 종이가 한지를 닮아서 질기지만 두껍다는 것까지 감안해도 불과 30페이지 남짓한 분량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10페이지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비슷한 내용을 다른 언어로 3번 반복했으니까.

    제국 공용어, 영어, 한국어.

    나는 잠시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 출신과 맞부딪친 것이 이것까지 해서 벌써 두 번째다.

    거기다 최소한 영어사용권에 속한 사람도 하나 있고.

    이 정도라면 누군가가 한글을 퍼뜨렸다고 해도 말이 되겠다.

    “이곳에 지나치게 오래 머무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소. 원로들께서 공작 부인에게 양해를 구했지만, 그녀 말고도 이곳을 보는 사람의 눈이 많으니까.”

    아스워드의 충고는 시의적절했다.

    책의 내용에 시선을 빼앗겼던 나는 즉시 책을 내 가슴에 집어넣었다.

    뽑았던 책들을 다시 책장에 원상복구를 시킨 후 아스워드를 따라 서재를 나섰다.

    보는 사람의 눈이 많다는 아스워드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분명히 내성 깊숙이 있는 공작가의 사적인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서재에 갔다가 나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등장한 사람만 벌써 2명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모두 아스워드에게 적대적이라는 점이었다.

    내게는 아직 중립적인 태도였지만, 어디까지나 그들 주인의 태도에 달린 문제였다.

    “아스워드 경이 이곳에 다시 얼굴을 드러내다니 너무 뻔뻔하신 것 같군요. 죽은 제 동료들은 아스워드 경을 믿었습니다만, 경은 아무 말도 없이 이곳을 떠나셨지요.”

    “윌리엄 백작 각하께서는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블레인 경께서 백작을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금방 도착하실 겁니다.”

    영지를 가진 계승 귀족임이 분명해 보이는 두 명의 귀족이 내성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가 나가는 것을 막은 것이다.

    말은 정중했지만 필요하다면 무력사용도 불사하겠다는 태도가 엿보였다.

    그러나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우리가 들어올 때 내성 입구를 지키고 있었던 기사는 물론이고, 지나가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2명 말고도 손을 써서 주변을 봉쇄한 자들이 더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보니 블레인이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유력한 경쟁자인 아스워드가 탈락한 지금, 블레인은 대체할 수 없는 후계자로 간주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스워드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노골적인 비난을 듣고도 아무 대꾸 없이 조용히 내 옆에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아스워드의 태도에서 무엇인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나는 어제 원로원의 실세 노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새로운 아르보그 공작을 옹립할 생각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소한 가까운 시일 내에는 말이다.

    이를테면 5년 정도라든가?

    어쩌면 10년?

    아르보그 공작의 첫째 아들이 10살이었던가?

    심지어 그들은 내게 사절을 파견하겠다고 확답을 하기까지 했으니 그들의 결정이 바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력한 후계자로 알려져 있고, 자신도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블레인은 어떻게 되는 걸까?

    설마 나를 미끼로 삼아서 블레인을 쳐내려는 계획일까?

    무엇이든 명분만 제대로 세울 수 있다면 블레인을 쳐내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는 아직 정식으로 후계자가 아니니까.

    그런데 나를 미끼로 써 먹기에는 칼마르의 백작인 내게 치러야 하는 대가가 만만치 않을 텐데?

    순간, 나는 내 가슴 속의 책을 떠올렸다.

    그제서야 모든 것이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왜 그렇게 쉽게 나를 내성의 서재까지 안내하고, 보란 듯이 아스워드와 돌아다니게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평소였다면 진작에 눈치챘을 상황인데, 아르보그 공작이 남긴 책에 신경이 온통 쏠려있다보니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다.

    노인들이 나를 미끼로 써먹은 것도 맞고, 나를 써먹는 대가를 이미 치른 것도 맞았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미끼답게 내 역할이나 마저 하기로 했다.

    잠시 후에 블레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몇 명의 기사를 거느린 그는 당당한 태도로 내게 다가왔다.

    그의 일행에는 안면이 있는 자도 있었다.

    “라그닐드 경. 오랜만입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윌리엄 백작 각하.”

    수인족인 라그닐드가 블레인의 일행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의외였다.

    라그닐드는 죽은 아르보그 공작의 심복이었다.

    막시밀리안 공작을 제거하기까지 했으니 심복 중의 심복이라고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런데 블레인과 함께 나타난다고?

    공작 부인이나 아들이 아니라?

    만약, 내가 원로원의 노인들이 블레인을 이미 제거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몰랐다면, 블레인이 새로운 공작으로 옹립되리라는 증거의 하나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블레인의 목을 겨눈 칼을 보는 느낌이었다.

    “블레인 경도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라그닐드 경과 함께라니 놀랍군요. 라그닐드 경의 능력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원로원의 알라드 경께서 소개해주셨습니다.”

    블레인은 대화의 주제가 라그닐드에게 쏠리는 것에 살짝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위세등등하게 나타났지만 내가 당황한 기색도 없이 말을 섞으니 이게 뭔가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용건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저 역시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갑기는 합니다만, 조금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윌리엄 백작이나 되는 분이 미리 통고도 없이 방문하시다니요. 어떤 일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개인적인 일이라서 곤란합니다.”

    “윌리엄 백작이 칼마르와 귀족연합자치령의 대외적인 일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일이라고요? 언제부터 전쟁과 외교가 개인적인 일이 되었습니까?”

    “내가 한 말을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귀족이, 그것도 대귀족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고 대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적어도 블레인은 그 정도로 막 나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윌리엄 백작의 말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단지 칼마르의 백작께서 공작 부인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에 대해 의심하거나 걱정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아마 윌리엄 백작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을 겁니다.”

    블레인의 본심이 나왔다.

    그는 내가 공작 부인과 의견을 조율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작 부인의 세력은 아주 작고, 자신의 세력은 아주 크다고 내게 협박하는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상상이다.

    전쟁과 외교를 담당하는 칼마르의 백작이 이제는 후계 경쟁에서 탈락한 아스워드의 안내까지 받으며 내성 깊숙한 곳까지 방문했다.

    이런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기가 오히려 더 어렵지 않을까?

    칼마르가 되었든 아니면 귀족연합자치령이 되었든 상관없이 공작 부인이 외부의 조력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한다고 가정하면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해진다.

    나는 그의 의심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그래서 협박을 당한 사람답게 굳은 표정으로 그에게 반문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대화 내용을 알려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의심이나 걱정이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진실이 있는 곳에는 의심이 싹을 틔울 수 없는 법입니다. 게다가 공작 부인은 이제 일개 여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귀족의 대화상대로는 아무래도 자격이 부족하지요.”

    블레인은 협박이 먹혔다는 생각에서인지 어조가 조금 밝아졌다.

    그러자 아스워드가 끼어들었다.

    “개인적인 이유로 방문한 것이 맞다. 블레인. 윌리엄 백작은 아르보그 공작님의 유언을 집행하기 위해 방문했을 뿐이다. 전쟁이나 외교같은 것은 한마디도 없었다. 내가 맹세하지.”

    블레인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들은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심지어 그의 입조차 일그러졌는지 간신히 내뱉듯이 말했다.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 대 맞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유언이라고? 아르보그 공작의?”

    “이것은 블레인 경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일이고, 경과 경의 사람들이 걱정하는 부분은 없었으니까 의심이 생길 여지도 없습니다. 나 역시 맹세하지요.”

    그러나 나와 아스워드의 맹세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을 들은 블레인은 이성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아니, 너무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해서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아르보그 공작의 유언이 존재한다면 다른 어떤 명분보다도 강한 명분이 된다.

    그런데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블레인을 후계자로 지정하는 유언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어떤 면에서 블레인이 폭주하는 것은 당연했다.

    한 번 탈락하면 두 번의 기회는 없을 테니까.

    심부름꾼으로 전락한 아스워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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