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두 가지 조건
“조건을 듣고 싶군요.”
내 말에 엑사드는 알라드와 잠시 시선을 마주쳤다.
알라드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엑사드는 자신의 요구 조건을 내게 말해 주었다.
“자치권은 당연하겠고, 덧붙여서 병력 동원과 세금 납부에 대한 거부권을 가지고 싶소.”
예상대로 엑사드의 조건은 평범한 내용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과한 요구다.
권력이 지나치게 분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아니었다.
“내부적인 의논을 거쳐야 하니 지금 당장 확답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긍정적으로 고려하겠습니다.”
어차피 자치권을 가진 영주들을 얼기설기 엮어서 급조한 것이 귀족연합자치령이다.
강제로 병력을 동원하고 싶다고 해서 따를 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세금을 걷고 싶다고 해서 걷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부적인 혼란을 막기 위해 암묵적인 질서를 수립하고, 명시된 최소한의 권력조차 없는 우두머리 몇 명이 자연스럽게 부각되었을 뿐이다.
병력 동원이나 세금 납부에 대한 거부권?
원한다면 가지라고 해도 된다.
우리 모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일이 생기면 싫어도 내놓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니, 잠깐.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데? 이러다가 나중에 다른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다른 의견을 내기는 힘들 겁니다.”
“아니 왜? 지난번에 자네 쪽에서 우리 쪽을 약탈해서 꽤 이익을 보았다고 들었는데? 이익을 본 자들이 우리의 제안을 핑계로 삼아서 다시 약탈을 시도하지 않을까 싶소만?”
아무래도 엑사드는 귀족연합자치령의 내부 상황을 내부자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오래전부터 첩자들을 서로 잔뜩 박아놓은 후일 테니 우리 쪽의 내부 상황을 모를 리는 없고, 아마 확신을 갖기 위해 내 의견을 묻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왜 전쟁이 우리에게도 나쁜 선택인지 설명해 주었다.
“일단 칼마르는 추가적인 원정에 반대합니다. 사실, 지난번 전쟁도 우리 입장에서는 별로 이익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잃는 대신 황금을 번다는 것은 우리 같은 상인에게는 별로 좋은 선택지가 아닙니다. 사람을 잃지 않고도 그에 못지 않은 황금을 벌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베르그렌은 전쟁 자체를 싫어합니다. 그의 분야는 내정이지 군략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서 전쟁은 경쟁자들의 권력을 강화시켜주는 일에 지나지 않지요.”
“그래도 다른 귀족들이 연합해서 전쟁을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않겠소?”
“몇몇 귀족들이 작당해서 전쟁을 선동한다면 자기들끼리 하라고 내버려 둘 겁니다. 거의 대부분의 귀족이 전쟁을 원했던 지난 원정과는 경우가 다릅니다. 심지어 지난 원정에서 칼마르와 막시밀리안과 글렌까지, 3개 파벌의 병력이 모였는데도 아르보그에게 우세를 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감히 영주 몇 명이 모였다고 해서 전쟁이 가능할까요? 그 정도면 아르보그 공작가의 힘만으로도 제압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덧붙여서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만약 교전 당사자가 모두 귀족연합자치령에 속한 귀족들이라면 전쟁이 아니라 영지전에 지나지 않습니다. 관례에 따라서 자기들끼리 알아서 처리할 문제죠. 귀족연합자치령에 속한 자들이 전부 나서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귀족연합자치령에 가입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완벽한 설명이었다.
엑사드는 내 설명에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알라드는 여전히 불퉁한 표정이었다.
아니, 이제는 어딘지 모르게 적대적인 분위기까지 풍기고 있었다.
내가 이 사람에게 실수한 것이라도 있나?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알라드의 ‘조건’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알라드 경께서 원하시는 조건은 엑사드 경이 원하시는 것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군요.”
“눈치가 없지는 않군. 윌리엄 경. 내가 원하는 조건은 간단하오. 나는 당신이 칼마르를 떠나는 일이 없기를 바라오. 당신이 살아있는 한.”
내가 이해력이 딸리는 사람은 아니다.
종류는 다르겠지만, 그래도 이 시대의 사람에 비해 많은 교육을 많았고, 머리도 나쁘지 않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나는 알라드가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귀족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정공법으로 나갔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나는 칼마르의 백작인 리네아와의 결혼으로 인해 칼마르에 대한 의무와 권리를 가지게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는 칼마르의 백작이고 내가 살아있는 한 칼마르에 대해 헌신할 겁니다. 설사 내가 백작위를 잃게되는 사태가 벌어져도 내게는 칼마르 백작가에서 부여한 세습 남작위가 남습니다. 칼마르에 대한 나의 충성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 선언에도 알라드의 태도는 변한 것이 없었다.
내가 한 말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가 다음에 내게 던진 말이 폭탄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래? 그렇다면 왜 아르보그 공작을 죽이고 그의 모든 것을 흡수했나? 칼마르를 떠나서 자신의 길을 가려는 것도 아니라면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엑사드는 알라드의 말에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알라드가 하려는 말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스워드는 나와 비슷한 처지였다.
사전에 알고 있던 정보가 전혀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이 들은 말이 과연 제대로 정확하게 들은 것인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주먹을 쥐고 부들거리고 있는 꼴을 보니 신호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내게 공격할듯 했다.
아스워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내게 덤벼들지 않은 이유는 전적으로 엑사드 때문이었다.
바로 방금 전에 반역이라면서 발작을 하다가 엑사드에 의해 제압되었던 기억이 있어서 일단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 역시 이를 악물고 침착함을 가장했다.
내 입으로 아르보그 공작을 죽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파투 내버리기에는 걸린 것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실제로 죽이지도 않았다고!
“누명을 씌우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아는 것을 남도 안다고 지레짐작으로 넘겨짚지 마시고 정확한 설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윌리엄 백작은 이제 인간이 아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상태창을 켜고 첫머리를 확인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여전히 인간이었다.
이 사람 진짜!
넘겨짚어도 어디 이런 것을!
그러나 알라드의 넘겨짚기는 계속되었다.
“신비에 접한 자들 중 일부는 인간임을 벗어버리게 되지. 상위의 존재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로 되는 것인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어. 하지만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윌리엄 백작 역시 이미 인간이 아니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칼마르조차 백작에게는 의미가 없어지겠지.”
당신은 틀렸다.
알라드.
전제부터 결론까지 몽땅 다.
나는 아직 인간이야.
“여전히 이상한 말을 하는군요. 나는 어디서도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신비를 접한 자들 중 일부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도대체가 알라드 경 같은 분이 상위의 존재니,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니 하는 그런 이상한 말을 증거도 없이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알라드 경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아르보그 공작가를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분입니다.”
“빛이 이렇게 선명한데도 아직 깨닫지 못한 모양이지? 백작은 같은 길에 서 있는 자들을 많이 흡수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무엇인가 부족한 모양이군. 시간이 지나면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게 될 걸세.”
알라드는 자기만 아는 말을 계속했다.
내게 설명까지 할 생각은 아예 없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그는 내게 맹세를 강요하기까지 했다.
“윌리엄 백작이 진짜 칼마르를 떠날 생각이 없다면 어떤 경우가 되어도 칼마르를 떠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것은 리네아와 결혼할 때 이미 맹세한 것입니다. 그래도 알라드 경이 요구하니 다시 한번 약속하지요. 어떤 경우든 내가 리네아를 버리고 칼마르를 떠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맹세합니다.”
“그래. 그거면 되었네.”
알라드는 비로소 만족한 얼굴이 되었다.
엑사드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되기는 뭐가 됩니까? 윌리엄 백작! 당신이 아르보그 공작님을 죽였습니까?”
아스워드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것처럼 자세를 취한 채 내게 따져 물었다.
엑사드와 알라드는 아예 안중에도 없는 태도였다.
내 대답 여하에 따라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일어날 판이었다.
그래서 나는 단호하게 답변을 해주었다.
“아니요. 내 명에를 걸고 맹세하건대 나는 아르보그 공작을 죽이지 않았소!”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천장에서 떨어진 바위가 죽였지.
나는 그를 흡수했을 뿐이고.
정말 일말의 꺼리낌도 없이 맹세할 수 있었다.
실제로 죽이지 않았으니까.
너무나도 단호하고 명확한 대답에 아스워드는 멈칫하고 말았다.
그는 알라드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알라드 님! 안 죽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아까 말씀하신 것은 뭡니까!”
“시끄럽다!”
알라드는 오히려 아스워드를 윽박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엑사드 역시 그를 따라 일어섰다.
알라드는 두 명의 거인족 사이에 끼어있음에도 풍기는 기세가 대단했다.
흥분해서 날뛰던 아스워드가 그의 한마디로 제압될 정도였다.
“조만간 정식으로 사절이 갈 거요. 백작.”
“알겠습니다. 엑사드 경. 그런데 저도 한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게.”
“아르보그 공작의 서재에 방문을 하고 싶습니다. 그가 제게 남긴 것이 있습니다.”
“좋소. 안에 미리 말해놓도록 하겠소. 내일 아스워드를 보낼 테니 함께 가보도록 하시오.”
그들은 나를 남기고 떠났다.
*
아스워드는 윌리엄이 서재를 방문하겠다는 말을 할 때 다시 한 번 폭발할 뻔했다.
아르보그 공작이 윌리엄에게 남긴 것이 있다니!
아르보그 공작의 죽음과 관련이 없다는 윌리엄의 주장을 믿어준다고 해도, 그가 공작의 임종을 지켜보기는 했다는 말 아닌가!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간다고?
심지어 나보고 내일 안내까지 하라고?
아스워드는 두 명의 원로가 반역을 꾀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늘의 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그가 들으라는 듯 엑사드가 알라드에게 말을 걸었다.
“어느 정도였나? 알라드.”
“지금까지 그런 자는 보지 못했을 정도로 다채롭고 밝게 빛나더군.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였네.”
“아르보그 공작의 색도 포함이 되어 있던가?”
“유감스럽게도.”
“음······ 그렇다면 역시 그가 흡수를 했나보군.”
“그렇겠지.”
그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아스워드는 이해할 수 없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아르보그 공작께서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흡수는 또 뭡니까?”
“그래. 이제는 자네도 알아야지. 그래야 우리가 없어도 그자들에게 대처를 할테니까.”
아스워드는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말하는 두 원로의 반응에 불안감을 느꼈다.
심지어 그를 대하는 어투조차 변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도 두 원로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였다.
“우리가 지금부터 하는 말이나 아르보그 공작이 윌리엄 백작에게 남긴 것이나 사실상 같은 것이니 잘 들어두도록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