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배반자는 배반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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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슬리 공작가에서 계승권을 주장할 만한 자들은 황도에서 지슬리 공작과 함께 죽었다.
그나마 영지에 남아 있던 몇 명도 아르보그 공작군과 싸우다가 전사했고.
그래서 지금 지슬리의 이름을 달고 활동하는 자들은 평소라면 공작위 계승권은 입에 올릴 수도 없을 정도로 직계와는 거리가 먼 자들이었다.
그나마 아르누트는 방계 중에서도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어서 몇몇 도시에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가 레인저병들의 지휘관이라는 직위 때문이었다.
현재 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항구도시 마함의 영주인 컷허드였다.
컷허드는 항구도시의 영주답게 금속괴의 수출과 식량을 비롯한 각종 물자의 수입을 장악하고 차근차근 세력을 불리는 중이었다.
아르보그 공작군에게 뇌물을 먹이고 평화세를 건네면서 전투를 피하는 바람에 비겁자라는 불명을 뒤집어 썼지만, 그가 베푸는 식량에게까지 비난을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심지어 아르누트의 지지세가 강하다는 크르달에서조차도 컷허드를 대놓고 비난하는 것은 피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아르누트가 레인저병들의 지지를 받고 있고, 몇몇 도시에서는 사실상 공작으로 대우를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작 세력이라는 면에서는 컷허드가 훨씬 규모가 컸다.
얼마 안 되는 귀족은 물론이고 돈이 있는 상인계층이나 교육을 받은 관리들 중에는 컷허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컷허드가 지슬리 공작으로 추대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듯했다.
그래서 아르누트에게는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산속 깊숙한 곳까지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폐광이군요.”
“그렇지. 이미 2백 년 전에 폐광된 구리 광산이야. 금과 은도 같이 나왔다고 하던데 광맥이 말라붙어서 문을 닫아버렸다지.”
“그렇습니까?”
물론 고프리는 자신의 눈앞에서 입구를 들어내고 있는 폐광산이 평범한 폐광산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르누트가 자신에게 무슨 비밀 장소가 있는 것처럼 말한 후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고 자신의 직속 부하들만 데리고 온 곳이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기록이 그렇다는 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도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속내를 말하고 있었다.
지금은 말을 아낄 때였다.
고프리가 중요한 인재로 대우를 받고 있다지만, 그것은 아르누트에게 쓸만한 인재가 없기 때문이었다.
숲에서 싸우는 것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보급과 전략을 이해하는 사람은 전무했기 때문에 그나마 고프리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식물이 싹을 틔우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서로 간에 신뢰가 형성될 만큼의 시간은 필요했다.
아직은 그 시간이 부족했다.
막아놓았던 입구를 다시 여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은 이미 썩어서 의미가 없었고, 오히려 덩굴식물과 얽힌 채 입구를 막고 있는 나무와 돌을 제거하는 것에 더 시간이 걸렸다.
레인저병들이 여럿 달려드니 입구를 막고 있던 나무와 돌무더기를 제거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르누트는 레인저병을 뒤로 물리고 고프리와 함께 나란히 동굴 앞에 섰다.
“지금은 우리 가문이 방계지만, 몇 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공작위를 계승할 후계자를 정할 때면 당연하다는 듯이 명단에 포함이 될 정도였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르누트 님도 직계 못지않은 혈통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들 하더군요.”
“그래. 방계의 방계인 컷허드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지. 컷허드는 지슬리 공작께서 바닷일을 맡기려고 마함의 영주로 삼은 것에 지나지 않아. 그냥 일꾼 같은 것이지. 레인저병을 통솔하던 나와는 격이 달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도시들이 아르누트 님께 복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프리는 열정적으로 아르누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누구라도 고프리의 긍정적인 지지를 받다보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영주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후계자로 오를 정도면 가문의 일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알게 돼. 그 당시의 일이라면 후대에 공작이 된 자보다 가문의 비밀에 대해 아는 것이 더 많을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가문에 남은 과거의 기록을 보면서 종종 놀라곤 했지. 과연 현재의 공작이 이런 사실을 알까 싶은 것도 있었거든.”
고프리는 침을 삼켰다.
주인이 부하에게 자신의 내밀한 비밀에 대해 말하는 경우는 오직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너무 신뢰해서 자기 몸처럼 생각하는 경우.
다른 하나는 어차피 조만간에 죽일 예정이라서 상관이 없는 경우.
아르누트에게 자신은 어떤 경우일까?
고프리는 자신의 도박이 과연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다시 한번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이 자리까지 온 이상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은 거절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 살아날 확률을 높이게 될 것이다.
“가문의 비밀이라면 저 같은 사람이 듣기에는······”
“이제는 뭐 가문의 비밀이랄 것도 없고. 자네도 나와 같이 저곳으로 가야 하니 알 건 알아야지.”
아직 어떤 결론이 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던 고프리는 미소를 지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 동굴은 아르보그 공작이 들어갔던 곳과 동일한 곳이야. 규모는 다르겠지만 본질은 같지.”
“예?”
예상 밖의 말을 들은 고프리는 멍청하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고프리가 아르누트로부터 가문의 숨겨놓은 장소라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 상상했던 것은 엄청난 규모의 재화였다.
다음에 예상한 것은 지슬리 공작위의 계승을 주장할 수 있을 정도로 정통성을 가진 상징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지만 제국 밖에서 키우고 있는 세력을 지휘할 수 있는 신표 같은 것일까라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르보그 공작이 튀어나올 줄은 정말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이미 죽어버린 아르보그 공작은 여기서 왜?
고프리는 자신이 이름을 제대로 들은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아르보그 공작에 대해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행방불명되었고, 아마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정도였다.
아르보그 공작측에서는 아르보그 공작이 지슬리 공작령에서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조차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르보그 공작군과 전투를 이어온 아르누트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아르보그 공작은 지슬리 공작 가문의 기록에 남은 비밀스러운 장소인 별의 기운이 고동치는 곳에 접근했다가 죽은 것이다.
하필이면 그 장소가 동굴 깊은 곳이고, 우연찮게 지진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동굴 깊은 곳에서 매몰되어 죽었다고 아르누트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결론에 이의를 제기한 측근은 없었다.
그것은 지슬리 공작가문은 물론 아르누트로서도 더 이상의 행운이 없을 정도의 천재지변이었다.
만약 아르보그 공작이 지진으로 인해 죽지 않았다면 지슬리 공작 가문의 일원 중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아르누트도 별의 기운이 고동치는 장소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가문에 남은 오래된 기록에서야 진정한 지슬리 공작이 되려면 당연히 가야 하는 것처럼 기록해 놓았지만, 정작 본가에서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진 기록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아르누트가 기록에 주목한 진짜 이유는 아르보그 공작이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동굴로 갔다는 점 때문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것이 있길래 공작이 직접 행차를 한 것이었을까?
그래서 아르누트는 어차피 세력도 밀리고 반전의 기회도 안 보이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옛 문서에 기록된 장소들 중 아르보그 공작이 들어갔던 곳은 지진으로 무너졌고, 다른 장소는 너무 멀었다.
심지어 제국 밖에 위치한 장소도 있었다.
폐광으로 위장된 이곳에 가장 가까운 장소였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단지 매우 중요한 장소라는 것은 알고 있지. 얼마나 중요한 장소였는지 아르보그 공작같은 사람조차 직접 동굴로 갔을 정도였다는 것만 기억하라고.”
“예. 아르누트 님.”
고프리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아르누트를 따라 폐광으로 들어가야 했다.
7명으로 구성된 단출한 인원이었다.
나머지 레인저병은 모두 폐광 밖에서 경계를 서도록 명령받았다.
폐광은 상당히 깊었다.
그러나 의외로 동굴 특유의 축축함과 불쾌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심지어 깊숙하게 들어가면서 동굴 벽에서 살짝 빛이 나기까지 했다.
“야광 이끼로군요. 사람이 드나드는 곳에서는 자라지도 않는 진귀한 식물입니다.”
“횃불을 아껴야 하니 두 개만 남기고 꺼라.”
고프리의 말에 아르누트는 동행한 레인저병에게 건조하게 명령했다.
그러나 아르누트의 명령이 무색하게 깊이 내려갈수록 동굴은 점점 더 밝아졌다.
결국 일행은 횃불을 다 꺼버렸다.
이런 곳이 구리를 캐던 광산이라고?
고프리는 어디에서도 광산이었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동굴을 보며 자신이 무엇을 보게 될지 궁금해졌다.
정말 한참을 걸어내려와서야 그들은 막다른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거대한 공동의 한가운데는 빛의 기둥이 서 있었다.
지금까지 보던 야광 이끼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밝기였다.
“이게 뭐지? 여기가 맞는 장소인가?”
아르누트는 당혹스러워했다.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그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곳까지 와서 그냥 돌아간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일행은 빛의 기둥을 향해 가까이 접근해 갔다.
빛의 기둥은 사람 대여섯 명이 손에 손을 잡아야 완전히 둘러쌀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빛에서 풍기는 분위기도 상당히 안정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어디에서도 전혀 위험성이 보이지 않았다.
“빛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 위험하지는 않겠지? 손만 살짝 대볼까?”
아르누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고프리를 향했다.
의미는 명백했다.
고프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는 편하게 써먹기 위한 실험체로 온 것이었다.
그래도 보급이나 전략에서 제법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의 대우라니!
서로 간에 믿음이 생기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아니면 아르누트라는 사람 자체의 문제이었을 수도 있다.
고프리는 아르누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기록에는 정확히 뭐라고 되어 있었습니까?”
“글쎄. 외부인에게 말하기는 좀 그렇지.”
“외부인이라고요?”
“칼마르의 시의원이었던 자가 뱅트손의 관리 노릇을 하다가 내게 왔는데 외부인이 아니면 뭐라고 부를까? 첩자?”
아르누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레인저병들의 화살이 고프리를 겨눴다.
고프리는 두 손을 들어서 자신이 적대행위를 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
고프리는 침을 삼켰다.
차라리 떠돌이 상인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았으려나?
조금이라도 대우를 받으려는 마음에 신분을 밝힌 것이 독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런 것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성심껏 조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프리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레인저병의 눈에 살기가 어리기까지 했다.
결국 고프리는 설득을 포기했다.
“하나만 알려주십시오. 얼마나 위험한 겁니까?”
“그것은 저곳에 자네의 손을 넣어보면 알겠지.”
아르누트의 태도는 단호했다.
고프리는 빛의 기둥을 향해 떨리는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