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09화 (209/248)
  • 209. 한국인은 김치를 먹는다

    웬만한 사이코패스가 아니고서야 자신이 한 일로 인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대충은 이해하기 마련이다.

    자신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는 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은 심각하게 느끼고 비난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가 좋은 사이코패스일수록 일반인 코스프레를 썩 잘 해내기 마련이다.

    내가 보기에, 만약 이자가 사이코패스라면 머리가 나쁜 쪽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정말 억울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아니면, 대배우의 가능성을 가진 자가 여기서 재능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겠고.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당당한 태도는 설명이 안 된다.

    “원하는대로 해주었다고? 20살의 육체를 가진 2살짜리 아이를 만들어 놓고? 당신이 알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스케티의 손자는 기저귀를 차고 있다고. 20살의 덩치를 가진 건장한 남자가 똥오줌을 못 가려서 기저귀를 차고 있는데 스케티가 제정신일 수 있을까? 당신도 눈치가 있다면 스케티의 성에서부터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 텐데?”

    나는 숲의 현자가 알아듣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숲의 현자는 여전히 거리낌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육체는 자연의 힘을 빌리면 몇 시간만에 키우는 것도 가능하지만, 경험과 지식을 쌓는 것은 시간이 필요해. 사람의 머리속에 있는 것은 근육과 다르다고. 시간을 들여서 배우고 익혀야만 하지. 컴퓨터에 프로그램 까는 것처럼 단숨에 되는 것이 아니야.”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칼을 뽑았다.

    등에 메고 있던 칼집에서 빠져나온 커다란 칼은 사람의 몸뚱어리 정도는 손쉽게 토막 쳐 버릴 것 같은 기세를 풍겼다.

    내 모습을 본 숲의 현자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스케티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없기는 해. 그렇지만 제대로 설명할 틈도 없이 난리를 친 것은 스케티였어. 거기다 당신들이 쳐들어와서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스케티의 오해를 풀 여유도 없었다고.”

    그러나 나는 그의 변명을 듣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오직 두 개의 단어에 내 신경이 모두 집중되어 있었다.

    “컴퓨터, 프로그램.”

    내 말에 숲의 현자의 입이 닫혔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이 역력했다.

    컴퓨터와 프로그램의 발음은 분명히 영어였다.

    그것도 성조가 없는 평탄한 발음이었다.

    한국인일까?

    “지구 출신인가?”

    내 질문에 숲의 현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나를 향해 손짓을 하며 더듬거렸다.

    “설, 설마. 어느 나라지? 한국인가? 제발 한국인이라고 해 줘!”

    성조가 없는 평탄한 영어 발음을 듣고 혹시나 했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 혼자가 아니었어! 혼자가 아니었다고!”

    숲의 현자의 반응은 과장스럽기까지 했다.

    망망대해에서 조난당한 사람이 구조선을 만나면 저런 반응이 나올까 싶은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태도에서 약간의 어색함을 느꼈다.

    수십 년을 살아왔다면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하지만 수백 년을 살아온 괴물이 저런 가벼운 반응을 보인다고?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너는 언제 왔지? 스케티의 의뢰를 받은 것을 보면 용병인가?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나도 처음에는 용병으로 활동을 했으니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지. 고향 사람을 만났으니 환영식부터 해야지. 여기는 내가 오랫동안 지낸 곳이라서 갖추어놓은 것이 많아. 잠시만 기다려 주게. 내가 쌀밥을 준비해 주지. 김치도 있다고!”

    미끼로 쌀밥에 김치라.

    한국인이라면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겠는데?

    나는 칼을 들어서 그의 목을 겨눴다.

    “스케티의 의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 말에 숲의 현자는 충격을 받은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겨눈 칼을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너 미쳤냐? 한국인끼리 이게 무슨 짓이야! 이런 엿 같은 곳까지 와서 서로 죽고 죽이자고? 스케티의 일은 오해가 섞인 것이니까 내가 잘 해결하도록 하지. 남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나도 꽤 하는 편이야. 그러니까 그놈의 칼은 좀 내려놓고 이야기를 하자고!”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칼을 휘둘렀다.

    숲의 현자는 내 공격에 반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역시 예상대로 그는 전투 훈련을 받지 않았고, 그렇다고 반사 신경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육체적인 면에서는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능력은 전투가 아니었다.

    어깨 부위를 지나간 칼은 그의 넝마를 잘라냈다.

    넝마같은 옷은 그대로 흘러내리며 그의 왼쪽 어깨를 드러냈다.

    마르고 윤기없는 피부였다.

    이것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피부색으로 보나 체형으로 보나 확실히 한국인이 아니라 제국인의 육체임이 분명했다.

    빙의인지 환생인지 모르겠지만, 그도 나처럼 정신만 이곳으로 온 것이 분명했다.

    “원하는 것이 뭐지?”

    숲의 현자는 신경질적으로 옷을 추스르며 내게 물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죽일 수 있는데 죽이지 않는 것을 보고, 무엇인가 이유가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눈치가 빨라서 좋군. 3백 살을 넘도록 살아남은 이유가 있군그래.”

    그러나 3백 살을 언급한 순간, 그의 표정에서 나타났던 감정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섰다.

    그때 에할름과 부하들이 나타났다.

    생각보다 빠른 등장이었다.

    나는 기록자 하나만 남기고 밖으로 내보내기로 했다.

    “에할름만 남고 나머지는 동굴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도록 하라.”

    “예. 백작 각하.”

    “아, 저는 여기 남는 것입니까?”

    “아니, 자네도 동굴 아래로 가게.”

    아스빈은 남아있고 싶어했지만, 나는 그를 밖으로 보내버렸다.

    이제부터 여기서 나오는 말은 다른 세력에게 들어가면 안 되는 내용이었다.

    “백작이라고? 스케티의 성채에 윌리엄 백작이 오고 있었지. 그 유명한 윌리엄 백작이 바로 당신이었군. 그럴 만도 해. 남과 다른 지식을 가졌을 테니.”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내 질문에 집중했다.

    “3백 년 전에 있었던 제국의 내전에 당신도 관여했지?”

    “......그렇다.”

    내 질문에 옆에 서 있던 에할름이 흠칫하는 것이 내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

    그리고 숲의 현자의 답변에 한 번 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

    아마 에할름에게는 3백 년이라는 시간이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전 자체에 관여한 것은 아니었다. 용병 생활 중에 만났던 귀족에게 지구의 정치제도를 가르쳐 주었을 뿐이다. 신비에 접한 후 가문에서 나와서 떠돌던 자라서 편견없이 내 가르침을 받아들이더군. 그는 귀족들이 전쟁 놀이를 하면서 제국을 붕괴시키는 것을 보고, 내 가르침에 따라 제국을 재편했다. 하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나는 그가 부재하게 되면 일어날 혼란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는 오히려 현재의 평화가 중요하다면서 나를 설득했지. 그러나 내 예상대로 그가 없어지니 얼마 안 가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유감스러운 일이지.”

    이제서야 나는 제국의 정치체제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선제후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의 정치 구조를 보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 구조를 이해못하는 자가 어거지로 선거제도만 이식했다는 인상을 받아왔다.

    처음에는 내전 중에 상황이 꼬여서 우연히 생긴 정치 체제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존재라는 것이 있고, 선제후를 죽이면서까지 선거 제도에 간섭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나 말고도 지구 출신이 더 있을 가능성을 의심해왔다.

    그것도 나이가 어리거나 교육 수준이 낮은 자로 말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실제로 지구 출신이 민주주의가 결여된 선거제도를 전파한 것이다.

    “폴포토를 네가 가르쳤다고?”

    “폴포토? 당시의 그는 그런 이름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은 운명이었고, 그의 존재는 신을 향한 여정 그 자체였다. 그는 신비를 접한 자들 중 가장 강력한 자였고, 많은 자들을 흡수할 수 있었지. 나는 그가 신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 여기에 올 당시에 진짜 나이가 어렸던 모양인데?

    뭐 이런 감성이.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폴포토는 죽었지. 그것도 둘 다. 어느 쪽이 진짜 폴포트인지는 모르겠지만 똑같이 생긴 그들 둘이 모두 다 죽었으니 이제는 의미없는 의문이겠지.”

    “별의 의지를 받아들인 자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그의 모든 것을 가져간 자가 결국 신이 되는 여정에 나설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깨어날 때 그것에 대해 들었다.”

    뭔가 억울한데?

    깨어날 때 들었다고?

    그런데 나한테는 왜 설명이 없었지?

    누군지 모르지만 내 경우는 알아서 생존하라는 식으로 그냥 이세상에 던져놓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설명서를 보지 못하고 게임을 시작한 것과 다름이 없는 처지인 것이다.

    내게는 정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폴포토가 죽은 지금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뭔가? 단순히 오래 살기 위해 그 많은 사람을 흡수했을 리는 없지 않나?”

    내 말에 숲의 현자는 창백한 안색을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부상을 입은 그로서는 같은 한국인을 만났다는 흥분이 가시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앉은 채 뒤로 움직여서 나와 멀어지려고 했다.

    혹시라도 도망친다는 오해를 받고 공격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대답도 하지 않고 어디로 가나?”

    나는 성큼성큼 그를 향해 걸어간 후 그자의 목을 잡으려고 했다.

    조금만 힘을 주면 연약한 인간의 목뼈 따위는 단숨에 부러뜨릴 수 있다.

    그러나 내 의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숲의 현자를 따라간다고 하다가 풀밭에 들어선 것이다.

    갑자기 풀이 갑자기 자라나면서 나를 얽어맸다.

    한국인을 만났다는 흥분은 무슨!

    이런 간단한 수에 빠지다니.

    나는 에할름을 향해 풀밭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고함을 질렀다.

    숲의 현자는 계속 뒤로 물러서며 내게 떠들어댔다.

    “내가 너 같은 놈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다. 신이 되겠다고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눈이 시뻘게져서 날뛰던 놈들. 폴포토가 그자들을 모두 흡수해버렸지. 이제 몇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너 같은 자가 갑자기 튀어나왔구나. 한국 출신이라고? 가장 지독한 놈들이었지. 독선적인 놈들. 내가 틀렸다면서 다들 한마디씩 하는데 귀가 아플 정도였지. 물론 폴포토에게 다 넘겨 버렸다. 쌀밥에 김치를 준비해두었다고 하면 어디든 따라오더라고. 퍼킹 김치맨!.”

    나는 안색을 굳히고 숲의 현자를 향해 걸어갔다.

    발목까지 풀밭으로 푹푹 빠져들었고, 자라난 풀들이 나를 얽어맸지만 걸어가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걸어갈수록 점점 기운이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

    풀밭이 눈에 띄게 누렇게 변해갔다.

    숲의 현자는 하나밖에 안 남은 눈을 치켜뜨며 내게 고함을 질렀다 .

    “너는 뭐냐! 왜 흡수가 안 돼!”

    풀밭이 오히려 내게 흡수당하는 중이었다.

    모두가 말라비틀어져서 더 이상 초록색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결국 나는 숲의 현자의 목을 손에 움켜쥐었다.

    “대답해봐. 그래서 네가 원한 것은 뭔가?”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간다고? 어디로?”

    “너는 이곳에 만족하는 모양이군. 하지만 나는 이런 곳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

    그리고 숲의 현자는 그대로 무너져서 내 손아귀에서도 빠져나갔다.

    마치 모래로 만든 사람처럼 부서져서 흩어졌다.

    잠시 후 땅 위에 남은 것은 찢어진 넝마뿐이었다.

    나를 중심으로 회오리가 불었다.

    회오리가 멈춘 후 동굴에는 마른 풀조차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빛을 잃은 동굴을 떠나서 밖으로 나왔다.

    동굴 입구에 선 내게 새가 날아와서 어깨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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