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08화 (208/248)

208. 숲의 현자가 기거하는 곳

거대한 침엽수림이었다.

밀림과는 또 다른 의미로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숲이었다.

우리는 숲의 초입에서 말을 풀어주었다.

잘 훈련된 전투마이니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는 자기들끼리 잘 지낼 것이다.

“단단히 준비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숲오우거는 물론이고, 야생 오크에 강트롤까지 흔히 생각하시는 아인종 괴물은 다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종종 말이 통하는 놈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인간을 보자마자 공격해 오니까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스빈은 이제서야 밥값을 한다는 듯이 앞장서서 일행을 인도했다.

그가 숲의 초입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우리의 냄새를 숨기기 위해 그가 가져온 약초를 바른 것이었다.

인간 냄새를 숨기지 않으면 하루에 한두 번은 반드시 습격을 당할 것이라며 약초를 아끼지 말고 바르도록 했다.

우리 몸은 물론이고, 옷과 무기까지 약초 냄새로 뒤덮어 버렸다.

“숲에서는 습격을 당하기 쉽습니다. 아무래도 나무 때문에 시야가 제한되거든요. 절대로 따로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언제나 서로 시선이 닿는 곳에 계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잡혀갈 겁니다. 아니, 반드시 잡혀갑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일행에서 혼자 떨어지시면 안됩니다.”

더운 곳에 있는 밀림은 의외로 생명보다는 죽음이 많은 곳이다.

덥고 습한 기후 때문에 온갖 식물이 지나치게 잘 자라서, 결국은 가장 잘 자란 식물이 햇빛을 막아버리는 것이 그 이유다.

햇빛이 제대로 닿지 않는 땅은 결국 썩어버리고, 썩은 땅에서는 곤충이라면 모를까 동물이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알고 보면 인간이 거주하는 곳은 밀림에서도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면적에 비하면 아주 좁은 곳에서 모여 사는 것이다

반면에 지금 지나가고 있는 침엽수의 거대한 숲은 밀림과 달리 생명이 더 번성한 곳이다.

추운 기후 때문에 풀도 나무도 지나치게 번성하지 못해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햇빛이 숲속 깊은 곳까지 고루 비춘다.

덕분에 지금 지나가는 숲길까지도 유실수의 열매가 굴러다니고, 먹을 수 있는 식물이 길가에 자생하고 있었다.

숲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생존에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풍부한 식량이 숲에 널려 있는 것이다.

나는 피톤치드로 가득 찬 숲을 가로지르며 머리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지구에서 산책길을 걸을 때 느꼈던 감성이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곳은 지구가 아니다.

언제든지 습격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아스빈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나 역시 기습을 막기 위해 숲에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 미니맵을 켜놓고 있었다.

과연 미니맵은 내 기대에 부응해서 제 역할을 해 주었다.

미니맵 한구석에 붉은 점이 나타난 것이다.

붉은 점은 빠르게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느낌이 이상하군요. 주변 경계를 확실히 합시다.”

내 말에 사람들의 긴장도가 확 올라갔다.

“이 냄새는? 숲오우거다!”

가장 먼저 숲오우거를 발견한 사람은 아스빈이었다.

무엇인가 썩은 것 같은 악취를 맡자마자 그 정체가 숲오우거임을 깨닫고 우리에게 경고한 것이다.

아스빈의 경고에 일제히 무기를 뽑자마자 나무 사이의 어두운 곳에서 숲오우거가 튀어나왔다.

숲오우거에 대해서는 이야기만 들었다.

거인족을 방불케하는 덩치.

거인족보다 더 강함 힘.

그리고 야생동물이나 다름없는 움직임과 잔인함.

거인족과 닮은 부분이 많아서 거인족을 도발할 때는 숲오우거에 빗대어 욕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실제로 보니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는 얼굴과 몸전체에 나 있는 긴 체모가 아니라면 거인족으로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거인족과 닮기는 했다.

그러나 누구도 숲오우거를 아인종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숲오우거는 그냥 거인족을 닮은 맹수일 뿐이다.

“하앗!”

기합과 함께 단창이 숲오우거를 향해 날아갔다.

아쉬리프의 기사 한 명이 숲오우거를 향해 던진 것이다

사람조차 훈련을 받으면 화살도 피해내는데 야생 동물이나 다름없는 숲오우거가 단창에 맞아줄 리가 없다.

그러나 그가 던진 단창은 피하라고 던진 것이었다.

진짜는 다음에 날아간 단창들이었다.

두 명의 기사가 합을 맞추어 연달아 단창을 던졌다.

처음에 날아온 단창을 피하려던 숲오우거는 연달아 날아오는 단창을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맞아 버렸다.

하나는 아랫배, 다른 하나는 허벅지였다.

이 정도라면 아무리 강한 맹수라도 쓰러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숲오우거는 부상같은 것은 입지도 않았다는 듯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기사들을 제치고 가장 앞으로 나섰다.

야생동물의 본능에 기대어 사냥하는 숲오우거의 동작은 내게 너무 단순하게 보였다.

나는 달려오는 숲오우거의 앞에서 허공으로 몸을 띄우며 등에 묶어 놓은 칼을 뽑아서 크게 휘둘렀다.

내 칼은 걸리는 것 없이 단숨에 숲오우거의 몸을 갈라버렸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큰칼은 쇠로 만든 봉조차 일격에 자르는 칼이다.

숲오우거의 뼈가 쇠보다 단단하다면 모를까 이 칼 앞에서는 살이나 뼈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숲오우거는 피를 뿜어대며 엎어졌다.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냄새는 더욱 끔찍했다.

아무리 내가 이 세상의 비위생에 나름대로 적응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수준을 달리하는 악취였다 .

그러나 지금은 악취가 문제가 아니었다 .

미니맵에 여러 개의 붉은 점이 나타나고 있었다.

뭐가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숫자가 여럿이니 만약 발목이라도 잡힌다면 피로 길을 뚫어야 할 판이었다.

“젠장. 아스빈. 숲의 현자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나?”

“이대로 걸어서 반나절이면 됩니다.”

“짐을 버려! 목표까지 달린다! 아스빈 선두에 서라!”

내 명령에 반문은 없었다.

이것은 내 말이 얻은 신뢰 덕분일 것이다.

모두가 즉시 짐을 버리고 무기만 챙긴 채 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우리를 향해 적대적인 맹수들이 다가온다는 것은 자연스럽지가 않다.

원인은 하나밖에 없다.

숲의 현자라는 작자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멀리서도 우리를 찾았을까?

나는 달리면서 하늘을 살펴보았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우리를 따라오는 몇 마리의 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스케티의 말대로 새를 이용해 우리를 감시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우리를 따라오는 새를 향해 비도를 던졌다.

내가 팔과 다리에 감아놓은 비도집에 보관하고 있는 비도가 48개다.

이 정도의 숫자라면 정찰병 노릇을 하는 새는 모두 죽일 수 있으리라.

과연 7마리를 떨어뜨리자 더 이상 우리를 따라오는 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수상하게 보이는 새라면 무조건 비도를 던져서 죽이면서 계속 숲속을 달렸다.

과연 새를 죽이는 것이 해답이었던 모양이다.

미니맵에 나타난 붉은 점은 대부분 우리를 따라오지 못하고 사라졌다.

가까이 접근하는 붉은 점은 피하고, 어쩔 수 없이 부딪쳐야 하는 붉은 점은 동료들에게 미리 경고한 후 일격에 처리해 버렸다.

결국 우리는 세 시간 정도 달린 후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산을 깎아서 만든 것 같은 거대한 절벽이 우리의 목적지였다.

“저곳입니다! 윌리엄 백작 각하. 숲의 현자는 대부분의 시간을 저 동굴에서 지냅니다.”

코끼리라도 여유있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동굴 입구였다.

나는 숲의 현자가 아직 저 동굴 안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를 만나려면 저 동굴로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저 동굴이 절벽 중간에 있다는 점이었다.

바닥에서 동굴까지 그 높이가 적어도 이십 미터는 넘었다.

아스빈의 정보가 필요했다.

“저곳을 어떻게 올라가나?”

“밧줄을 묶어놓은 길이 있습니다. 통로의 폭이 좁고 가파르지만 밧줄을 잡고 한 사람씩 올라가면 됩니다.”

아스빈은 자신있게 말했지만, 그의 정보는 과거의 것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밧줄이 사라지고 없었다.

밧줄을 고정하기 위해 박아놓았던 말뚝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밧줄을 제거한 것이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밧줄이 없는 것이다.

이러면 사실상 수직인 절벽을 20미터나 기어 올라가야 한다

등반용 도구가 있는 것도 아니니, 보통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고,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다.

“내가 먼저 올라가면서 길을 만들도록 하지. 자네들은 내가 만든 길을 따라서 올라오도록 하게.”

“위험합니다.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아쉬리프의 기사가 반대했지만 나는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손날을 세워서 절벽에 푹하고 박아버렸다.

내 손이 손목까지 절벽에 박혀버린 것이다.

바위와 바위처럼 단단한 흙으로 구성된 절벽이지만 내게는 부드러운 흙으로 된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효율적으로 하자고. 효율적으로. 내가 하는 것이 훨씬 빨라.”

내 설득은 효과적이었다.

나는 즉시 손을 박아 넣어서 구멍을 만들고 그 구멍에 발을 디디며 절벽을 올라갔다.

동굴 입구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나는 옷에 묻은 흙을 털고, 무기를 점검한 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대개 축축하고 어둡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동굴은 그렇지 않았다.

동굴 곳곳에 빛을 내는 풀이 자라고 있었고, 습기는커녕 건조한 모래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모래에는 사람이 왕래한 흔적이 역력했다.

숲의 현자는 우리가 오는 것을 살피기 위해 동굴 입구까지 나오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거의 50미터를 들어가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농구장 정도 되는 크기의 풀밭이 동굴의 끝에 펼쳐져 있었고, 숲의 현자는 풀밭 위에 앉아 있었다.

숲의 현자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의 머리는 한주먹 정도 떨어져 나간 것처럼 파여 있었고, 눈도 한쪽이 일그러져 있었다.

장발도 밀어버렸는지 머리는 대머리였다.

전과 다를 바가 없은 것은 넝마인지 누더기인지 모를 옷 하나뿐이었다.

그의 어깨에 앉아있던 새가 그의 귀에 대고 지저귀고 있었다.

아마 저렇게 새가 정보를 날라다 준 모양이다.

새는 전달할 소식을 다 전했는지 그의 어깨에서 날아올라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내 옆을 지나가는 새를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신비의 종류는 다양하고, 숲의 현자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다.

이 새를 통해 무슨 짓을 할지 내가 어떻게 아나?

나는 단숨에 새를 잡아챘다.

그리고 숲의 현자가 보는 앞에서 새의 목을 부러뜨렸다.

숲의 현자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풀 위에 앉아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아무래도 부상의 정도가 너무 커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이자는 맹수를 부리고 식물을 움직였을 뿐 자기 손으로 무엇을 한 적이 없었다.

이자, 의외로 약한 것은 아닐까?

“스케티가 그대의 죽음을 의뢰했다. 대귀족에게 사기를 쳤으니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 맞겠지?”

“어리석은 놈.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숲의 현자의 대답은 당당했다.

나는 그의 어조에서 조금의 부끄러움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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