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07화 (207/248)

207. 아르누트의 결심

여관주인은 혹시나 남이 들을세라 우리에게 조용히 말했다.

“장인 거리에 장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대장장이도 가죽장이도 소목수도 모두 도제나 한두 명 남겨 놓았을 뿐입니다. 공방에 직접 가셔도 제대로 된 주문은 어려우실 겁니다.”

“왜 그렇게 된 거요? 약탈도 없었다면서.”

“약탈은 없었지만 징발은 있으니까요. 식량과 물자는 물론 사람까지 말입니다. 아르누트 남작이 계승권을 주장하며 병력을 모으는 중입니다.”

아스빈의 질문에 여관주인은 우울하게 대답했다.

지슬리 공작령 전체를 통틀어서 전쟁에 휩쓸리지 않은 도시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공작령 가장 북단에 있다는 크르달조차 아르보그 공작군이 도달해서 평화세를 강탈해 갈 정도였으니 보다 남쪽에 위치한 도시의 상황이 어떨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하지만 군대는 생산과는 관련이 없는 소비 일변도의 조직이다.

군대를 조직하고 유지하려면 물자와 인원이 계속 보충되어야 한다.

아르누트는 그 조달처를 크르달로 삼은 모양이었다.

“식량은 별문제가 없습니다. 항구는 열려있고 식량을 사 올 정도의 금속괴는 계속 생산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특히, 사람이 그렇지요. 공방으로 물자를 구하러 가셨다가는 그대로 징병되실 수도 있습니다. 장인 거리 쪽은 아르누트 남작의 지지세가 강하거든요.”

“그렇다면 주인장이 물품을 대신 구입해 줄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무엇인가 우려하는 바가 있는지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여관주인은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아무래도 현지인이니까 우리와 달리 제대로 된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끈도 있을 것이고, 40대의 배 나온 중년 아저씨를 징병해 갈 것도 아니니 그냥 맡기는 것이 맞다.

게다가 원래 이런 구매대행은 여관주인들의 부수입이기도 하다.

여관주인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품과 여행용 식량을 잔뜩 구매해 왔다.

하지만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우리를 보고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묵으실 예정은 아니었습니까? 돈도 다 지불하셨는데······”

“급하게 떠나야 할 사정이 생겨서 말이지. 돈은 되돌려 줄 필요 없네. 그냥 가지게.”

우리는 여관주인이 구입해온 물품을 챙기자마자 곧장 출발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서두른 것은 내 예감 때문이었다.

여기에 하루라도 더 머무르면 목적지에 제때 도착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나를 엄습해왔다.

물론 내가 예언자도 아닌데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숲의 현자가 어디론가 사라질 수도 있고, 아르누트란 자와 충돌이 생길 수도 있다.

다만 내 예감은 서둘러야 한다는 것을 가리킬 뿐이었다.

물론 내 예감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신경과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불안함을 느낀다면 움직이는 것이 맞다.

그 점에 있어서는 에할름 역시 내 의견에 동의해 주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후 나는 내 예감이 근거가 없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일행을 따라잡은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

보나마나 아르누트에 속한 자들일 것이다.

도시를 떠날 때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우리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는 자는 있었지만, 따라오는 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이 지난 후 멀리서 우리를 추격해 오는 자를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발견하자 산속임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접근해왔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우리를 멀리 우회해서 포위하려고 했다.

그들의 목적을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지금 보이는 태도는 우호적이 아니었다.

“누구냐!”

아쉬리프의 기사 한 명이 전면에 나서서 고함을 질렀다.

잘 손질되어서 기름까지 먹인 칼이 그의 살의를 대변하듯 번득였다.

그러나 그들은 가쁜 숨을 내쉬며 우리와 대치할 뿐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시간을 끈다는 태도였다.

과연 잠시 후 일단의 기마병이 나무 사이를 뚫고 나타났다.

크기는 작았지만 탄탄한 체격을 가진 말이었다.

길도 없는 산속을 다니기에 정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말 위에 타고 있는 자들은 모두 기사였고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는 지슬리 공작처럼 건장한 체격에 두꺼운 팔뚝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얼굴도 비슷했다.

“윌리엄 백작. 나는 지슬리의 공작 아르누트다. 지금 즉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지슬리 공작과 얼굴이 닮았다 싶었는데 역시나 아르누트였다.

그런데 투항이라니 이건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걸까?

“지슬리 공작은 전사했고, 아직 계승의식이 치러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감히 누가 공작의 이름을 사칭하는가?”

내가 나서지 않아도 에할름이 아르누트의 말을 받아쳤다.

아르누트는 사칭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발작하듯 외쳤다.

“나는 지슬리 공작위의 정당한 계승자다.”

“그렇게 주장하고 싶다면 좋을 대로 하라.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대귀족들의 인정은 물론 원래 지슬리 공작에게 속한 귀족들의 지지도 받지 못할 것이다.”

아픈 곳을 찌른 모양이었다.

에할름의 대꾸에 아르누트는 잠시 말을 하지 못하다가 나를 가리키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이 마함의 영주인 컷허드를 지지하고 있는 것을 안다. 컷허드는 아르보그에게 저항하지 않고 평화세를 바치며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던 자다. 그는 지슬리의 적이다. 그런 자를 지지하는 당신 역시 마찬가지다!”

컷허드는 금속괴의 수출입을 전담하라고 지슬리 공작이 항구도시 마함의 영주로 임명한 자다.

지슬리 공작의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주에 앉혀 놓았지만 도시를 운영해 나가는 실력은 나쁘지 않다고 들었다.

단 한 번 얼굴을 본 사이에 지나지 않지만 아무래도 해상교역망에 한발을 걸치고 있는 자라서 심리적으로 가까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를 지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게다가 지슬리 공작령은 이제 붕괴한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내 의견을 명확히 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딱히 누구를 지지할 생각도 없고, 그럴 상황도 아니다. 누가 지슬리 공작이 되든지 나는 알바가 아니니까 당신들끼리 알아서 했으면 한다.”

“믿을 수 없다!”

작위가 있는 귀족이 공개적으로 한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대놓고 모욕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백작쯤 되는 대귀족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영지전을 선언해달라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

나는 벼락치기로 백작이 된 기사다운 반응을 보였다 .

거칠고 단순한 분노를 참지 않고 표출했다.

“감히 나를 모욕하다니!”

나는 아르누트를 향해 한달음에 날아갔다.

도움닫기 한 번으로 단숨에 아르누트 앞까지 날아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을 후려치고 그의 목을 잡았다.

인간적이지 않은 내 움직임에 당황한 아르누트는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했다.

뒤늦게 그의 옆에 있던 기사들이 칼을 뽑았지만 너무 늦은 반격이었다.

나는 아르누트가 몸에 차고 있던 단검을 칼집째 뜯어서 그들에게 집어던졌다.

모두 3개였다.

투구를 썼음에도 머리가 터진 채 즉사한 자도 3명이었다.

나머지 기사들은 칼을 뽑지도 못하고 굳어버렸다.

나는 아르누트의 얼굴에 대고 화를 내며 폭언을 퍼부었다.

“감히 내 말을 거짓말로 치부해! 좋아. 그렇다면 네가 믿는 대로 해주지. 앞으로 나는 컷허드를 지지하겠다. 이해했나? 아르누트 남작!”

나는 목이 졸려서 얼굴이 하얗게 변한 아르누트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는 죽어버린 그의 말 옆에서 쓰러져서 목에 손을 대고 콜록거렸다 .

나는 더 이상 신경 쓸 것도 없다는 듯 일행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우리를 따라오는 자는 더 이상 없었다.

잠시 후에 에할름이 내게 다가왔다.

“아르누트가 모욕적인 언사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르보그를 견제하려면 다독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르보그에 대해서는 따로 고민을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저자로는 아르보그를 견제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아르보그를 상대로 저항군을 이끌었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모든 면에서 예상보다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지슬리의 남은 자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보다 분열되어 있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부러 그렇게 거칠게 나간 것입니다. 서로 상잔하다 보면 지금보다 세력이 더 줄겠지요.”

“생각이 있으셨군요. 그리고 아마 아르누트에게 괜찮은 측근이 있을 겁니다. 아르누트 대신 일하는 자가 있는 것이지요.”

“좋은 참모라도 앞으로는 별 소용없을 겁니다. 시야가 좁아진 자는 조언을 무시하게 되지요.”

내 말에 에할름도 동의한다는 듯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

아르누트는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직 주변에 같이 온 기사도 몇 명 있고, 유능한 레인저병들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도저히 공격 명령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윌리엄 백작은 소문보다 더 뛰어난 기사였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화살이 날아오는 것 같았다.

수십 미터의 거리를 한두 걸음도 안되는 거리마냥 단숨에 건너뛰어서 자신을 제압한 것이다.

만약 자신이 공격 명령을 내린다면, 이번에는 수십 미터가 아니라 수백 미터의 거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공포가 그를 막아섰다.

결국 아르누트는 윌리엄의 일행이 사라질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윌리엄의 일행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아직도 통증이 가시지 않는 목을 주무르며 옆으로 손을 뻗었다.

“물.”

“여기 있습니다. 공작님. 백작은 전에도 인간 같지 않았는데 이제는 뭐. 후~ 우리 둘 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에게 물을 건넨 기사는 안면가리개를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진정으로 안심하는 투가 역력했다.

“운이 없었다면 자네가 죽어버린 기사들 중 하나가 되었겠지. 그런데 고프리. 저자 정말 인간 맞나?”

“제가 아는 한 그렇습니다. 마스터 요한이 제대로 가르친 모양입니다. 무공을 통해 신비에 접한 자를 강화하는 법을 연구한다고 하더니 결국 성공한 것 같습니다.”

뱅트손에게 인생을 걸었다가 망해버린 고프리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재빠르게 손절한 후 이번에는 아르누트에게 새로운 기대를 걸고 있었다.

물론 뱅트손에게 인생을 걸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당연히 윌리엄에게 충성을 맹세했겠지만, 그에게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저런 자를 포로로 잡아서 칼마르와 협상하려고 했다니. 자네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몇 사람 안 데리고 잠행 중이니까 한 번쯤 시도할만했습니다. 공작님의 실수는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어. 역시 비동을 열어야겠어.”

“무슨 말씀이신지?”

“그런 것이 있어. 자네가 나를 좀 도와줘야 해.”

“제 충성은 아르누트 공작님께 향합니다. 뭐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고프리는 믿음직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은 요동치고 있었다.

비동이라니!

그런 것이 있다니!

대귀족이라면 만약을 대비한 보험 정도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칼마르 백작가에도 외국에까지 깔아놓은 자금과 인력이 있다.

고프리는 윌리엄의 정체도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칼마르 백작가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는 단체에서 파견된 자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백작가가 저럴 정도면 선제후 가문은 어떨까?

물론 자신같은 외부인이 함부로 접근할 수 있는 비밀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망해서 바닥까지 떨어진 대귀족이라면 어떻게 접근할 방도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자신의 도박이 이번에는 성공하는 것일까?

고프리는 요동치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기 위해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

숲의 현자가 있다는 숲은 제국 북쪽 경계를 넘어 일주일 이상 말을 달려야 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