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06화 (206/248)
  • 206. 제국의 경계를 넘기 전에

    “밤늦게 고생하셨습니다. 두 분 원로님.”

    블레인의 정중한 인사에도 인간과 거인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블레인을 무시하고 의식을 잃은 아스워드를 짊어진 채 성 밖으로 향했다.

    블레인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말았다.

    아스워드와 함께 유력한 가주 후보로 꼽히고 있다지만, 귀족연합자치령과의 전투에서 추태를 보인 이후로 경쟁에서 확실히 밀리고 있다는 것은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무엇인가 분위기 전환을 위한 계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아스워드가 그의 사촌에게 위해를 가하겠다고 선언하자 자신에게 기회가 왔음을 직감하고 행동에 나설 것을 결심할 수 있었다.

    어쩌면 아스워드를 아예 경쟁에서 탈락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가능성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왔다.

    블레인은 주저하지 않고 곧장 행동에 나섰다.

    공작 부인부터 말단 경비 기사까지 그의 손이 안 닿은 곳이 없을 정도로 뛰어다녔다.

    그 결과가 오늘 밤의 성공이었다.

    아스워드가 제압당한 채 홀로 잡혀가는 모습을 보니 아스워드의 시도는 실패한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저 두 원로의 성정상 아스워드가 데리고 온 기사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블레인은 아스워드가 가주 계승 경쟁에서 탈락했음을 확신했다.

    자신이 비록 귀족연합자치령과의 전투에서 추태를 보이기는 했지만, 아스워드조차 탈락한 이상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10살짜리 아이를 가주로 삼아서 황제의 관을 씌워주는 해프닝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것은 아르보그 가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원로원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두 늙은이는 자신에게 어떤 긍정적인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인사도 받지 않고 무시한 채 지나가 버린 것이다.

    말 한마디에 기회를 보고 과감하게 행동에 나섰던 블레인의 촉에 경고등이 켜졌다.

    블레인은 좌우로 목을 움직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

    경쟁자를 제거했던 행동력으로 이번에는 자신을 가주로 밀어올리면 그만이다.

    원로원의 실세라고는 하지만 평소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 원로원 구석에 처박혀 있는 자들이었다.

    영주들과 가문의 구성원들, 그리고 동맹 관계인 아인족의 지지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원로원도 어쩔 수 없으리라.

    특히, 공작부인.

    자식들의 안위를 조건으로 내걸고 협상을 한다면 지지를 끌어낼 여지가 있을 것이다.

    블레인은 공작 부인부터 공략하기로 했다.

    *

    “블레인은 가주로 어울리지 않아. 알라드”

    “엑사드. 자네의 의견에 나도 동의하네. 그 아아는 머리가 좋고, 부지런하지. 가주의 측근으로 조언을 올리는 일이라면 잘 할 걸세. 그러나 그것이 그 아이의 한계야.”

    “아르보그 공작이 그립군. 몇 대만에 나온 진정한 가주였는데.”

    엑사드의 한탄에 알라드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블레인에 대한 평가에 못을 박았다.

    “블레인이 가주가 된다면 잔머리를 굴리며 이익을 계산하다가 결국은 소탐대실하고 말 거야. 이런 혼란기라면 가문을 말아먹기 딱 좋은 성격이라고 보네.”

    “알라드.”

    “응?”

    “죽일까?”

    “음······”

    엑사드의 제안에 알사드는 망설이는 티가 역력했다.

    그러나 엑사드의 설득은 집요했다.

    “내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이놈은 단순하지. 이놈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뻔해. 하지만 블레인은 그렇지 않지. 기대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큰 사고를 칠지도 몰라.”

    “사람을 하나 붙이도록 하지.”

    “그것으로 괜찮겠나?”

    “블레인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뿐이니까. 경험도 부족하고. 그렇다면 붙여주기 적당한 아이가 하나 있네.”

    “음······ 일단 자네 말에 따르도록 하지. 하지만 죽여야 할 때는 망설임이 없어야 할 걸세.”

    “그러지.”

    알사드의 확답을 받아낸 엑사드는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아스워드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윽!

    짧은 비명과 함께 몸을 일으킨 아스워드는 엑사드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엑사드를 향해 칼을 뽑으려던 자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진작에 정신을 차렸으면 당장 내려와야지!”

    “죄송합니다. 엑사드 님.”

    “다 들었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무엇을 묻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아스워드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들은 것을 그대로 읊었다.

    “머리까지 나쁜 놈은 아니었군. 네 놈이 들은 바대로 블레인은 가주가 될 수 없다. 작은 사고라도 치면 죽을 거고.”

    아스워드는 어제까지만 해도 둘 중 한 명이 가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여곡절이야 있겠지만, 아르보그의 세력권에 속한 자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비록, 공작 부인이 설치고 있다지만, 그것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단 하루가 지난 지금.

    아스워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유력한 가주 후보?

    그런 것은 이 노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언제든 죽일 수 있는 대체재에 불과한 것이다.

    공작 부인 역시 이들의 말 한마디에 입을 다물고 물러섰다.

    아스워드는 무엇인가 자신이 모르는 진실이 가문의 배후에 있음을 깨달았다.

    “아스워드. 너를 지금 이대로 놓아줄 수는 없다.”

    어딘가에 감금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아스워드는 엑사드의 말에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의 기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 심부름이나 하나 하고 돌아오도록 해라.”

    “예?”

    “귀족연합자치령에 윌리엄이라는 귀족이 있다. 그에게 내 말을 전하고 함께 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엑사드 님.”

    윌리엄이라면 아스워드도 이미 만나본 적이 있는 자였다.

    귀족연합자치령과의 전투 당시 양쪽이 서로 적당히 타협해서 큰 피해없이 물러설 수 있도록 한 융통성 있는 귀족이었다.

    칼마르까지 가는 길 역시 잘 정비되어 있으니 그와 만나는 것이라면 큰 위험없이 금방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아스워드의 기대는 알사드에 의해 금방 깨어졌다.

    “윌리엄 백작은 지금 제국 중부에 가 있다는 첩보가 있다.”

    “제국 중부라면?”

    “뱅트손 아니면 스케티의 영역 어딘가에 있겠지. 급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빨리 전달했으면 한다.”

    아스워드의 여행은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았다.

    *

    지슬리 공작령은 엉망진창이었다.

    전에도 이곳에 와서 느낀 것이지만, 지슬리 공작령은 전쟁이 아니라도 원래부터가 제대로 된 땅이 아니었다.

    산에서 산으로 연이어 이어지는 지형 때문에 지슬리 공작령은 제대로 된 도시가 자연스럽게 생길 수 없다.

    산이 부양할 수 있는 인구는 평지에서 농사로 먹고살 수 있는 인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작은 규모의 산촌 마을 정도가 자생할 수 있는 한계치다.

    그나마 있는 도시들은 광산에서 파낸 광물들을 가공하고 수출하면서 규모를 키운 도시들이다.

    그런 도시들이라도 있어서 공작령으로서의 체면치레라도 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 땅에는 공작은커녕 백작도 과분하다고 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광물 수출로 돈은 많이 벌어서 몇 개의 도시는 규모는 작아도 볼만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아르보그 공작군이 대거 밀고 들어와서 벌어진 전쟁 때문에 지슬리 공작령은 초토화되었다.

    도시라고 할 만한 곳은 모두 약탈당했고, 끝까지 저항하던 일부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당하기까지 했다.

    지슬리 공작 가문에서 살아남은 자도 거의 없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르누트라는 자가 새로운 지슬리 공작으로 저항군을 이끌고 있다는 첩보는 있었지만, 지슬리 공작령의 사람이 아니라면 아르누트의 계승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일방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지슬리 공작령을 벗어나기 전 마지막 도시라고 할 수 있는 크르달에 도착한 참이었다.

    스케티가 붙여준 길안내자인 아스빈은 이곳에서 재정비를 한 후 제국 경계를 넘자며 도시에서 가장 큰 여관인 사슴머리 여관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사슴머리 여관은 크르달에서 가장 큰 여관답게 제법 큰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고, 1층에 있는 식당의 규모도 상당했지만,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 이게 술인가? 정말 말이 아니군.”

    “전에 왔을 때는 괜찮았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스튜는 나쁘지 않으니 됐네.”

    “아니지요. 이런 싸구려 밀주라니. 뱅트손 공작령에서 생산한 질 좋은 독주를 언제든 마실 수 있었는데!”

    에할름과 아스빈은 싸구려 밀주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연신 잔을 주고 받았다.

    아쉬리프의 기사들 역시 내 옆에서 조용히 먹고 마셨다.

    고생스러운 여행은 아스빈을 우리 일행으로 녹아들게 해 주었다.

    아스빈 역시 낯을 익히고 우리에 대해 파악하자마자 곰살맞게 굴며 친근감을 최고치로 찍어 버렸다.

    그는 여행 동료로는 최고의 인재였다.

    술이 몇 잔 돌고 스튜가 바닥을 드러낼 때즈음 되어서 여관주인이 카트를 밀고 나타났다.

    “주문하신 사슴넓적다리 구이과 멧닭볶음탕이 나왔습니다. 사냥 후 잘 숙성시킨 고기로 만든 것이라서 맛이 정말 좋습니다.”

    여관주인이 직접 커다란 쟁반과 아직도 끓고 있는 넓적한 냄비를 카트에 얹어서 끌고 온 것이다.

    그는 테이블 위에 쟁반과 냄비를 놓은 후 뚜껑을 확 열었다.

    감자와 야채가 섞인 채 끓고 있던 멧닭볶음탕에서 맛있는 냄새가 퍼져나왔다.

    그리고 사슴넓적다리 구이는 생긴 것에서부터 압도적인 비주얼을 자랑했다.

    고기의 맛도 상당히 괜찮았다.

    향신료가 부족하기는 했지만 내게는 그 점이 오히려 더 좋았다.

    숙성된 고기에서 느낄 수 있는 감칠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근사하군. 이렇게 숙성이 잘 된 고기는 오랜만이야. 주인장의 실력이 정말 대단하군그래.”

    “감사합니다. 나으리. 전쟁통이라서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고기에 대해서는 양보가 없다는 각오로 노력을 했읍지요.”

    “여행 중에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이걸 받게. 내가 기분이 좋아서 주는 걸세.”

    “아이쿠. 감사합니다. 나으리.”

    은화의 위력은 놀라웠다.

    지금까지 불평하며 먹던 밀주와는 차원이 다른 품질의 밀주가 등장하고, 신선한 빵과 잼이 따라나왔다.

    여관의 하녀 하나가 우리에게 전담으로 붙어서 식사 시중을 들기까지 했다.

    나는 하녀에게도 동전을 몇 개 집어주며 말을 걸었다 .

    “크르달은 전쟁 피해가 없는 편이더군. 파괴된 건물도 없고, 불에 탄 흔적도 안 보였어.”

    “그렇습니다. 나으리. 아르보그 공작군이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전투는 없었으니까요.”

    “전투가 없었다고?”

    “도시 바로 입구까지 왔다가 자기들 땅에 무슨 일이 생겼다며 후퇴했지요. 시의회에서 평화세를 모아서 내는 것으로 그자들과 타협을 보았답니다. 덕분에 그들은 약탈을 하지 않고 돌아갔지요.”

    귀족연합자치령의 침공이 이런 식으로 제국 끄트머리까지 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다행이군. 약탈이 있었다면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없었을 것 아닌가?”

    내 말에 하녀는 그냥 웃기만 했다.

    “약탈이 없었다면 장인 거리도 그대로겠구만. 이것저것 구입할 것이 많은데 다행일세.”

    “아! 그곳은 좀.”

    아스빈의 말에 하녀는 난색을 보였다.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음? 공구와 여행에 필요한 장비를 좀 구입할 예정이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하녀는 곤란한 기색을 보이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

    그 모습을 본 여관주인이 다가왔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대화를 듣고 있었던지 굳어진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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