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05화 (205/248)

205. 진정한 후계자

아직 잠자리에 들 시간은 아니었다.

당연히 다들 깨어서 무엇인가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는다든가 자수를 놓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무장을 하고 있는 공작 부인과 대면하는 것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공작 부인의 곁에는 무장을 하고 있는 시녀들이 그녀를 호위하고 있었다.

귀족 가문 출신의 여기사들이었다.

그리고 아스워드의 어린 사촌이 공작 부인 옆에 있었다.

공작 부인의 두 아이 중 첫째였다.

몇십 명이 어우러져 난투를 벌여도 여유가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에 공작 부인까지 포함해서 불과 여덟 명이 무장을 한 채 아스워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함정일까?

아스워드는 자신도 모르게 옆에 있던 라그닐드를 슬쩍 보았다.

공작성 가장 깊은 곳까지 아무런 방해없이 들어온 것은 라그닐드 덕분이었다.

만약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분명 마지막에 가로막는 자가 나왔을 것이다.

공작의 사적인 공간을 지키는 기사들을 매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라그닐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라그닐드는 복잡해진 아스워드의 속내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태연한 신색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공작 부인의 앞에 도착하자 몸을 돌려서 아스워드를 마주 보았다.

라그닐드의 눈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제서야 아스워드는 인정하고 말았다.

갑옷을 입고 있는 공작 부인과 조우한 순간, 예상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라그닐드는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공작부인의 편이었다.

결국 자신은 함정에 스스로 걸어들어온 셈이었다.

아스워드는 여유를 찾기 위해 오히려 농담을 건넸다.

“라그닐드. 내 여자가 되라는 제안은 아직 유효하다만?”

“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제안이군요. 더구나 이곳은 그런 개인적인 용건을 논할 장소가 아닙니다. 공작 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라그닐드는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고 아스워드의 질척거림을 단호하게 끊어냈다.

결국 아스워드는 자신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여인에게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죽은 아르보그 공작의 부인.

자신의 이모이기도 한 여인이었다.

“며칠 만에 또 뵙는군요. 이모님.”

“아스워드. 네가 엉뚱한 짓을 벌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믿고 싶지 않았는데 무장을 하고 여기까지 온 것을 보니 이제는 나도 어쩔 수 없구나.”

“어쩔 수 없다기에는 행동이 너무 빠른 것 아닙니까? 이모님.”

아스워드는 이제 처음의 여유를 되찾았다.

그는 자신의 이모가 아니라 그녀의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사촌 동생. 네 엄마가 너를 공작으로 만들고 싶은 모양인데 네 생각은 어때? 정말 공작이 되고 싶나? 나를 죽이고?”

아스워드는 으르렁거렸다.

거인족 혼혈이 진심을 담아 뿌리는 살기는 열 살짜리 아이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르보그 공작의 첫째 아들은 파랗게 질려서 비틀거렸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고 버텨냈다.

그 모습을 본 라그닐드가 살짝 움직여서 아스워드의 시선에서 첫째를 감춰버렸다 .

“적을 맞이해서 당당하게 나서기는커녕 여인의 치마 뒤에 숨어 버리는 자가 아르보그 공작가의 가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감히 이 거대한 세력의 수장이 되겠다고?”

“그런 점이라면 네가 더 문제겠지. 너는 너무 무모하다. 아스워드. 생각보다 행동이 빨라서 발밑에 있는 돌부리도 살피지 않고 달려들지. 천인대 몇 개를 지휘하는 정도가 너의 한계다. 심모원려해야 할 공작가의 주인으로서는 미달이야.”

아스워드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공작 부인의 어조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공작부인이 발언권을 가진다면 절대로 아스워드에게 기회가 가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아스워드는 공작 부인의 어조에서 그런 사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애초에 자신은 아들의 안전을 미끼로 공작 부인의 양보를 받아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런 선택지를 공작 부인이 아예 치워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은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가장 빠르고 확실한 해결책.

죽음이었다.

그래서 아스워드는 자신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죽여!”

머뭇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 자리까지 아스워드를 따라왔다는 것은 이미 선택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죽어서 없는 공작은 이제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죽은 자의 부인이나 아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아스워드가 죽이라고 명령하면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이행할 사람들뿐이었다.

열 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공작 부인과 그의 아들을 지키던 여기사들도 조금도 밀리지 않고 반돌격을 감행했다.

공작 부인 앞에는 라그닐드만 남았다.

거인족 혼혈인 아스워드는 싸움을 좋아하고, 전투에서도 언제나 선두에 서는 자였다.

자신의 실력이 뛰어난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실력을 평가하는 안목도 뛰어난 편이었다.

그래서 그의 눈에 들고, 심지어 이곳까지 데려올 정도면 기사들 중에서도 정말 실력이 뛰어난 자라고 할 수 있다.

공작 부인의 시녀들이 어릴 때부터 훈련받은 귀족가의 여식이라고 해도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은 절대 아니었다.

양쪽의 충돌은 격렬했다.

귀족 가문 출신의 여기사도, 아스워드를 따르는 기사도 서로의 목숨을 노리며 맹렬하게 맞붙었다.

실력도 전의도 비등비등했다.

차이가 나는 것은 숫자뿐.

바로 그 숫자의 차이가 4명이나 되는 아스워드의 기사들이 공작 부인을 향해 달려들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들을 막은 것은 라그닐드였다.

전형적인 시녀 복장을 한 라그닐드는 공작 부인을 향해 달려가는 기사들에게 달라붙었다.

라그닐드는 그녀를 향해 찔러오는 칼을 겨드랑이 사이로 빗겨 피하며 그대로 기사 하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단검처럼 날카롭게 솟아난 손톱을 얼굴가리개 사이의 구멍에 찔러넣었다.

그녀에게 안긴 기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그러나 라그닐드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기사를 끌어안은 채로 옆으로 지나가는 기사의 뒤통수를 잡아갔다.

수인족답게 그녀의 악력은 인간 남자보다 더 강했다.

하지만 기사 역시 실력이 없는 자가 아니어서 몸을 비틀며 칼을 뒤로 찔렀다.

날카로운 칼은 갑옷을 뚫고, 죽은 자의 몸도 다시 한번 꿰어버렸다.

그 순간 라그닐드는 이미 죽은 기사는 버리고, 새로운 기사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톱이 다시 한번 기사의 안면 가리개 사이로 파고들었다.

칼까지 놓은 채 라그닐드를 잡으려고 버둥거리던 기사는 더 이상의 저항이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공작 부인의 경호는 뚫려 버린 후였다.

여기사들이 분투하고, 라그닐드가 두 명의 기사를 죽이며 공격을 막았지만 그래도 손이 부족했다.

두 명의 기사가 공작 부인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공작 부인은 기사 훈련을 받지 않았다.

간단한 호신술을 익히기는 했지만 병사 정도나 상대할 수 있을 뿐 기사를 상대로는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공작 부인은 자신을 향해 공격해 오는 두 명의 기사를 담백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려움도 당혹감도 없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한 눈빛도 아니었다.

두 기사의 칼이 공작 부인의 가슴을 찌르려는 순간,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깡!

고막을 터뜨릴 정도로 강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실내에서 듣는다면 별반 차이도 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공작 부인의 바로 앞까지 돌격해 들어간 두 명의 기사가 뒤로 튕겨져 나가며 생긴 소리였다.

두 명의 기사는 공작 부인 앞에서 몇 미터는 뒤로 날아간 후 바닥에 뒹굴었다.

모두 머리가 으깨진 채 즉사한 상태였다.

전투가 멈췄다.

양쪽은 서로를 견제하며 한두 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

그 짧은 시간에도 양쪽 다 절반에 달하는 인원이 부상을 입거나 죽어버린 후였다.

그러나 아스워드는 전투가 멈춘 것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경악한 얼굴로 공작 부인 옆을 보았다.

그곳에는 처음부터 그렇게 서 있었다는 듯이 노인 한 명이 조용하게 서 있었다.

“알라드 경께서 어떻게······”

알라드는 원로원의 괴물 중 하나였다.

뒷방 늙은이들이 시간을 보내며 잔소리나 하던 곳을 권력 기관으로 만든 자이기도 하다.

원로원은 현재 중립이었다.

단지 되도록이면 피를 보지 말라는 권고를 할 뿐이었다.

아스워드 역시 지금까지는 그 권고를 따라왔다.

그런데 공작 부인을 죽이고 은폐하기도 전에 원로원의 괴물 중 하나인 알라드가 나타난 것이다.

아스워드는 알라드의 등장이 우연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한 사람은 아니었다.

분명 공작 부인이 불러온 것이리라.

아스워드가 친족을 죽이려는 모습을 보라고 말이다.

이번에는 입구 쪽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원로들 중 하나인 엑사드였다.

중년의 거인족이고 아스워드와도 안면이 있는 자였다.

그는 아스워드의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여전히 중년의 모습으로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자이기도 했다.

엑사드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오더니 아직 살아있는 아스워드의 기사들의 허리를 분지르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다급하게 칼로 찌르고, 메이스로 후려쳤지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마치 피부가 돌이나 쇠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엑사드는 묵묵하게 돌아다니며 한 명 한 명 허리를 꺾어버렸다.

아스워드는 그 모습을 보고 칼을 뽑으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칼을 빼앗겨 버렸다.

분명히 공작 부인의 옆에 있던 알라드가 아스워드의 옆에 나타나서 칼을 빼앗은 것이다.

거인족 혼혈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완력이었다.

아스워드가 데려온 자들을 모두 죽인 후에야 비로소 침묵이 깨어졌다.

“두 분 원로께서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중해라. 헤이린.”

“아르보그 공작의 실종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10살짜리를 가주로 세울 수는 없다.”

공작 부인은 인사도 받아주지 않는 원로들의 반응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목숨을 건 도발이 성공해서 아들의 경쟁자 중 하나를 치우는가 싶었는데 원로원 노인들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두면 아들의 생명이 위험했다.

적어도 아스워드는 공작 후보에서 탈락시켜야 했다.

“그래도 저렇게 단순하고 즉흥적인 자가 공작 후보자라는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아스워드는 가족의 생명조차 경시했습니다. 그런 자가 귀족들을 존중하고 포용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 점은 우리 역시 동의하는 부분이다. 아스워드는 더 이상 후보가 아님을 공표하겠다. 그 정도라면 너도 만족하겠지?”

“누구 멋대로!”

공작 부인인 헤이린과 알라드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던 아스워드는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목을 죄는 엑사드의 손에 더 이상 뭐라고 말도 하지 못하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

엑사드가 축 늘어진 아스워드를 어깨로 짊어졌다.

절반의 성공을 거둔 공작 부인을 뒤로 하고 두 명의 원로는 공작성을 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공작성은 그새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방금까지도 아무도 없었던 복도와 입구 곳곳에 기사와 병사들이 다시 돌아왔고, 순찰을 도는 병사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을 지휘하는 자는 블레인이었다.

블레인은 두 명의 원로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