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북쪽 경계 너머
스케티의 성채를 둘러싼 외성은 고층 건물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높이와 폭을 감안하면 꼬마빌딩을 줄줄이 세워놓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구조물이 무너진 것이다.
고층 건물이 무너지면서 발생하는 먼지는 대낮에도 앞을 보지 못할 정도로 짙고 규모도 크다.
화재 때 발생하는 짙은 연기와 구별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피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먼지가 땅으로 퍼지고 하늘로 솟았다.
우리가 박살난 외성문을 지나서 성안으로 들어올 때 외성벽 위에 많은 병력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보았다.
스케티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병력이었으니까 정예병인 것은 물론이고 정치적으로도 의미있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직접 기른 길러낸 기사 집단이라든가, 세습 영지군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스케티는 방금 자신의 가장 중요한 기반 중 일부를 잃은 셈이다.
10미터가 넘는 높이의 성벽이 붕괴했는데 그 위에 있던 사람들이 멀쩡할 리가.
모두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대부분이라고 할 정도는 사망 또는 부상일 것이다
“외성벽이 이렇게 붕괴하다니···... 먼지가 걷히면 정확한 피해 규모를 알 수 있겠지만, 지금 대충 보는 것만으로도 절반 가까이 붕괴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할름은 이 정도의 피해라면 스케티가 계속 자신이 황제임을 주장하기가 불가능하다면서 남아 있는 병사들의 수를 추산하기 시작했다.
외성벽이 왜 붕괴했는지는 아직 멀쩡한 성벽을 보니 짐작이 갔다.
성벽 사이에 기둥처럼 끼어든 나무와 중간중간 파고든 가지가 문제였던 것이다.
숲의 현자가 이곳에서 떠나면서 중앙정원의 모든 식물이 말라서 가루가 되어버린 것처럼, 성벽에 지지대처럼 끼어들었던 나무도 생기를 잃고 말라 붙었다.
마른 나무로는 10미터나 쌓아 올린 돌덩이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가장 약한 곳이 무너지면서 다 함께 우르르 무너진 것이다.
“백작 각하. 숲을 보십시오. 숲도 정상이 아닙니다.”
에할름의 말대로 숲 역시 바싹 마른 상태였다.
초록색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불을 지르면 진짜 잘 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른 숲을 보고 화공부터 생각하다니, 내가 이곳에 익숙해지기는 했구나.
잠시 엉뚱한 생각이 들었지만, 마른 숲을 보니 내 예상 하나가 확신으로 변했다.
아무래도 숲의 현자는 생명체의 기운을 끌어다가 능력의 매개체나 동력으로 쓰는 모양이었다.
이번에 멀리 도망칠 때도 필요한 기운이 너무 많아서 주변의 숲에서까지 기운을 끌어다 쓴 것이 틀림없다.
나는 바람을 다루던 여인들이 떠올랐다.
그녀들은 자신의 힘을 다루다가 모두 노인이 되어 죽었다.
자신의 생명과 힘을 맞교환 한 것이다.
그러나 숲의 현자는 다른 이의 생명을 끌어다가 썼다.
그자가 가짜 몸과 싸울 때도 용병들을 흡수했고, 도망칠 때는 숲의 기운을 사용했다.
스케티의 손자를 성장시킬 때 사람들을 흡수했다는 첩보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신비에 접한 자들 중 아주 강한 힘을 갖게 된 자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평판이 있다.
생각과 행동에서 인간의 논리와 감성을 더 이상 찾아볼 수없기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다.
그것은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떤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이미 숲의 현자에게 부상을 입혔고, 먼 거리를 격하고 서로 알아보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대로 숲의 현자를 방치한다?
태연하게 인간을 배터리로 쓰는 자를?
미친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편하게 잠을 자려면 지금 당장 추격해서 죽이는 것이 낫겠다.
내 입장에서는 그게 논리적인 귀결이다.
그리고 내 예감 역시 지금 당장 추격하면 그자와 다시 얼굴을 맞댈 수 있겠다는 주장을 강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스케티가 붙여준 사람을 가까이 불렀다.
“숲의 현자라는 자는 어디로 갔을까? 경은 알고 있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짚이는 곳은 있습니다.”
“그래. 그곳이 어딘가?”
“과거 지슬리 공작령이 있던 곳에서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거대한 숲이 있습니다. 그곳이 그가 주로 머무르던 곳입니다. 다른 장소는 몇 군데 있기는 합니다만 일단 그곳이 가장 유력합니다.”
감이 왔다.
그곳이 맞는 것 같았다.
“그래. 경의 추천대로 그곳을 최우선으로 가도록 하지.”
그래서 나는 제국의 북쪽 경계 밖으로 가게 되었다.
제국의 경계 밖으로 완전히 나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
선제후였던 자들, 또는 그들의 후계자들 중 제대로 세력을 유지한 채 남아있는 자는 단둘뿐이었다.
선제후였던 자들 중에는 프리시오가,
그들의 후계자들 중에는 아르보그가 남아있는 둘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 중 하나인 아르보그가 분란에 휩싸이고 있었다.
실전을 겪은 수만에 달하는 강력한 군대.
충성스러운 정예 병사.
믿을 수 있는 기사.
신뢰와 혈연으로 묶여있는 수인족과 거인족.
제국 중부와 동남부를 아우르는 패자로 우뚝 설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세력이 바로 아르보그였다.
그러나 현재 아르보그는 발이 묶인 채 외부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르보그 공작의 행방불명 때문이었다.
그리고 후계자를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한 분란 때문이기도 했다.
초기에는 아르보그 공작의 생존을 기대하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르보그 공작의 생존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들 아르보그 공작의 사망을 기정사실로 놓고 있었다.
아르보그 공작의 사망을 선언하지만 않았을 뿐 모든 이들이 아르보그 공작의 죽음 이후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문제는 아르보그 공작이 한창때여서 후계에 대해서는 미리 논의된 것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의 자식들은 아직 너무 어렸고, 지금 같은 시대에 어린애를 후계자로 내세우는 것은 너무 속이 보이는 짓이었다.
그래서 유력한 후계자가 둘로 압축되었다.
거인족 혼혈 아스워드.
인간 블레인.
아르보그 공작가가 둘로 쪼개지기 딱 좋은 후보군이었다.
그러나 그들 둘은 서로가 서로를 상잔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
적어도 현재로는.
“멍청한 놈들. 이대로라면 내전이 벌어질 판이야.”
“정신이 없는 놈들이지. 우리끼리 싸우면, 프리시오는 어떻게 상대할거야? 우리에게 그럴 여력이나 남아 있을 것 같아?”
블레인은 아스워드의 불만에 맞장구를 쳤다.
그 역시 휘하의 멍청이들이 떠드는 헛소리에 점점 질려가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도 그 말을 했지. 프리시오를 어떻게 상대할거냐고. 그랬더니 귀족연합자치령에서 약속한 병력이 1만이나 되니까 프리시오와 싸울 때 전면에 내세우자고 하더라고. 그게 무슨 헛소리야!”
“젠장. 다들 위기의식이 없어서 그래. 주변이 다 망했다 이거지.”
한바탕 분노를 쏟아낸 그들은 뱅트손과 스케티가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었다는 보고서를 다시 읽다가 던져 버렸다.
겉으로 보는 것과 달리 그들 둘의 입지는 그리 튼튼하지 못했다.
“블레인. 이모가 움직이고 있어.”
“공작 부인이?”
“그래. 주변 세력이 다 병신이 됐으니 여유를 좀 가지는 것이 어떻겠냐며 백부의 측근들을 만나고 다닌다고 해.”
“미치겠군. 주변 세력이 뱅트손과 스케티뿐인가? 귀족연합자치령은 생각하지도 않는 거야?”
“그들의 위험성에 대해 느끼는 자는 우리뿐일걸. 모래알은 뭉쳐봐야 모래알이라며 얕잡아 보는 자들이 대부분이야. 심지어 우리가 쥐고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어.”
“도대체 누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이모가.”
“끙.”
블레인은 답답하다는 듯 신음을 내고, 술을 병째 들어서 단숨에 들이켰다.
블레인은 귀족연합자치령의 실력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고 있었다.
귀족연합자치령과의 전투를 사람들은 승리도 패배도 아니라고들 했다.
하지만 그가 느끼기에 그것은 분명히 패배한 전투였다.
그 이후로 그는 연합자치령에 대해 많은 정보를 수집해 왔다.
그리고 연합자치령에 대해 알면 알수록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구심점 노릇을 하는 몇몇 귀족들은 섬찟할 정도로 냉혹하고 효율적이었다.
특히, 칼마르의 백작인 윌리엄과 리네아는 더욱 그랬다.
그들은 돈과 무력으로 연합자치령의 귀족들을 철저하게 묶고 있었다.
만약 연합자치령에 구심점이 없었다면 갈라쳐서 일부는 흡수하고 일부는 토벌하는 식으로 끌어들일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전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블레인. 이모가 주제넘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나 역시 연합자치령은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해.”
“아니 안돼. 연합자치령은 우리와 프리시오 사이에서 균형추가 되어주어야 해. 적어도 당분간은 절대로 안돼.”
블레인 단호하게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아스워드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블레인이 그렇게 주장한다면 동의하지는 않지만 일단은 넘어가겠다는 의미였다.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귀족연합자치령에 대한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사촌동생은 지금 10살이야. 이모부의 작위를 이어받기에는 너무 어리지.”
“그래서?”
“주제 파악을 하도록 해 줄까 해.”
“죽이는 것은 안돼. 원로원의 늙은이들이 길길이 날뛸 거다.”
“나도 죽일 생각은 없어. 그냥 큰 부상을 입고 칩거하거나 아니면 갑자기 병이 생겨서 휴양을 하러가는 것 정도를 원할 뿐이지.”
“너답지 않은데? 누구야? 너에게 그런 제안을 한 자가?”
“예쁜 수인족 아가씨.”
“수인족이라고? 알아서 해. 나는 모르겠다.”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오랫동안 전투를 치렀다고 해서 병사들의 충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사는 인맥에 따라 충성하는 귀족이 다르고, 영지군 출신은 자신이 속한 영지에 충성한다.
용병들은 돈을 주는 사람이 충성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귀족의 미래에 투자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찍 그의 휘하에 들어갈수록 미래에 얻게되는 보상이 더욱 클 것이라는 것도 자명했다.
유력한 가주 후보인 블레인과 아스워드에게는 그런 자들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아스워드는 기사부터 병사까지 제법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를 따르는 10여 명의 기사와 함께 공작성의 입구를 지날 때, 막는 사람도 없이 정문이 열려 있었던 것도 그런 도움의 하나였다.
밤에 공작성의 내부를 지켜야 하는 기사들도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순찰을 도는 병사들도 없었다.
모두가 그에게 미래를 맡긴 자들의 작품이었다.
아스워드는 거침없이 걸어갔다.
공작성에는 아직 선대 아르보그 공작의 일가가 머무르고 있었다.
공작성 깊은 곳에 죽은 공작의 아내와 그녀의 어린 아들이 권리를 주장하며 남아 있었다.
그곳의 경비 기사는 아스워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공작의 개인 공간을 지키던 경비 기사들은 아스워드의 일행을 무시해 버렸다.
그곳에서 한 여인이 아스워드에게 합류했다.
“라그닐드. 소문대로 일처리가 확실하군.”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너는 내가 중용하지. 아니면 내 여자가 되는 것은 어때?”
“대답은 일을 다 마친 후에 하도록 하지요.”
“좋아. 빨리 일을 마치도록 하자고.”
아스워드는 마지막 문을 활짝 열었다.
무장한 채 들어서는 그들을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