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03화 (203/248)

203. 또 한 번 경험하다.

무엇이든 수를 내지 않는다면 가짜 몸에게 이대로 짓눌려 죽는 것은 확정적이었다.

그러나 마땅히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나를 압도하는 것은 순수한 힘이었고, 그 힘은 이미 증명되었듯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몸통 박치기 한 번으로 3중으로 된 성문을 단숨에 박살 내다니!

그런 자를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윌리엄 버로스라는 이름으로 깨어난 후 지금까지 겁도 없이 잘도 날뛰며 살아왔다.

이전 생에서는 상태창에게 선택받은 자의 선민의식을 바닥에 깔고, 다른 자들의 경외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왔다.

그러나 지금.

단순히 내 힘이 더 약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금까지 내가 이룬 모든 것이 부정당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곧 죽을 것이다.

가족만을 남기고.

젠장.

얼굴은 보고 싶었는데!

그때.

무엇인가가 부딪쳤다.

충격은 없었다.

그냥 반탄력에 튕겨 나갔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과 후회에 빠진 채, 마음 깊숙한 곳으로 침잠하던 나는 그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아쉬리프의 기사였다.

그들이 몸통 박치기로 가짜 몸을 타격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하고, 오히려 튕겨내는 반발력에 나가떨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약간의 자극이 나를 다시 현실로 불러왔다.

그제서야 나는 비웃는듯한 눈매의, 그러나 턱까지 부들부들 떨어대며 용을 쓰는 가짜 몸의 얼굴을 정면으로 직시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 못지않게 가짜 몸 역시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내게 상태창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체력 : MAX]가 단순히 체력이 좋다는 의미만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리고 실전을 거치면서 내가 점점 강해지는 느낄 수 있었다.

몸을 사용하는 경험이 쌓이게 됨에 따라, 나는 [체력 : MAX]라는 것이 현재의 육체에서 발휘할 수 있는 최대치의 한계까지 육체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빛의 기둥을 통해서 기운을 흡수하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신비에 속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둘째 치고, 내 힘 자체가 이제는 인간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신비에 접하지 않은 자들을 상대로 할 때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신비에 접한 자를 상대로는 어떨까?

여전히 인간적으로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가짜 몸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압도적인 힘으로 죽여왔다.

수백 명의 기사단조차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쓸려나갈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나와 손을 맞잡고 힘을 겨루는 그는 압도적인 강함으로 상대를 휩쓸며 공포로 군림하던 자가 아니었다.

그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방금까지의 나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맞잡은 손을 통해 그와 나 사이를 흐르는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를 향해 흐르는 기운이었다.

하지만 그 흐름은 확연히 느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흐름이 멈추는 순간,

나는 허리를 펼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아쉬리프의 기사들의 공격도 먹혀들어가기 시작했다.

가짜 몸에게 아무리 칼로 찔러도 미끄러지기만 해서 몸통 박치기를 할 정도였는데 칼이 박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흐름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빛의 기둥에서 밀려들어 오던 기운과 비슷한 느낌의 기운이 나를 향해 밀려들기 시작했다.

가짜 몸은 조금 전의 나처럼 땀을 흘리며 여유를 잃어갔다.

“별의 의지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른다고 했던가?”

여유가 생긴 나는 가짜 몸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가짜 몸은 내 질문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별의 의지도, 자신의 의지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흐름이 바뀐 기운의 기세가 점점 강렬해졌다.

우리를 감싸듯 회오리치던 기운이 유형화되며 빛의 기둥이 생겨났다.

가짜 몸은 폴포토가 그랬던 것처럼 빛의 기둥 안에서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희번덕거리던 그의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제서야 내 질문에 뒤늦은 대답을 했다.

[별의 의지? 우리는 결국 하나만 남겠지]

조소가 섞인 한탄이었다.

그 말과 동시에 가짜 몸은 완전히 무너져 가루로 변해 사라졌다.

아주 잠깐이라고 하기에도 어색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가짜 몸이 완전히 사라지고 빛의 기둥까지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바로 그 순간 내 시야는 저택을 벗어나 성벽을 꿰뚫고 도시와 산을 가로질렀다.

나는 머리가 반쯤 으스러진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숲의 현자와 눈을 마주쳤다.

내 시선을 느끼고 경악하는 숲의 현자를 보는 순간 내 시야는 거꾸로 돌린 영화처럼 순식간에 다시 중앙정원으로 들어왔다.

그제서야 주변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엄청난 소음이 저택을 울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천 명이 넘는 포로가 갑자기 날뛰는데 시끄러운 것이 정상이기는 하겠다.

“이거 끝내주는군.”

“예? 무슨 말씀이신지?”

“에할름. 믿기지 않겠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것 같군요.”

천리안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시야는 맛만 보고 말았지만, 다른 감각은 내게 남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예감이었다.

예언자 또는 직감이 유달리 뛰어난 자가 앞일에 대해 느끼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 이제는 약간이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스케티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나는 저택의 2층 구석 쪽으로 가고 싶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쪽이 신경이 쓰였다.

물론 스케티가 그쪽에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쪽으로 가면 스케티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없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나는 에할름들을 뒤에 달고 저택의 복도를 달렸다.

곳곳에 죽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대부분 용병이었지만 스케티의 기사들 역시 섞여 있었다.

문제는 용병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는 점이었다.

스케티의 기사들은 숫자로 밀려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반면에 제정신을 차린 용병들은 어느새 무기와 갑옷을 갖추고, 제대로 된 지휘편제까지 갖춘 채 움직이고 있었다.

“인질을 잡아야 해!”

“함부로 밖으로 나가면 그냥 죽어! 내성 밖에는 병사들로 쫙 깔렸다고!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용병들이 고함을 지르며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다.

왜 아직도 저택 내부가 용병들로 붐비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목표를 향해 가는 동안 덤벼드는 용병들은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무리지어 이동하는 살기등등한 기사들의 무리를 향해 덤비기에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입고 있는 복장이 스케티측의 기사와는 확연히 다른 것도 이유였을 것이다.

우리는 목표로 삼은 장소 근처에까지는 금방 도달할 수 있었다.

목표로 삼은 2층의 공간 앞에는 30여 명의 기사들이 경호 중이었다.

이미 한바탕 붙은 후였는지 그들 앞에는 수십구의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모두 용병이었다.

나는 서슴지 않고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의 복장은 스케티의 기사들과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챙겨입은 용병들과도 달랐다.

그 덕분에 곧장 공격을 받지는 않았다.

“스케티 공작 전하께 칼마르의 백작 윌리엄이 면담을 요청한다고 전해주게.”

스케티의 경호기사들은 뜻밖의 면담 요청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잠시 후 우리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칼마르의 백작이라고?”

“칼마르의 백작 윌리엄입니다. 스케티 전하. 멀리서 뵌 적은 있지만 이렇게 인사를 드리는 것은 처음입니다.”

스케티를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인생이 다 끝나가는 노인이었다.

“유명인이면서 행운의 사나이라고 할 만한 자라면 윌리엄 백작 이외의 사람을 떠올리기 힘들지. 숲의 현자가 언급한 자는 역시 윌리엄 공이었군.”

“숲의 현자라는 자가 저를 언급했습니까?”

“그래. 흥미있는 자가 온다고 했다네. 그자는 새를 정찰병으로 부려서 멀리까지도 파악하곤 했으니까 소식이 빠를 수밖에.”

동물을 다루는 능력이라면 특이하기는 하지만, 위험도가 높지는 않다.

문제는 순식간에 아주 먼 거리까지 도망쳤다는 점이다.

위험하다기 보다는 귀찮은 능력이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어쩐 일인가? 자네는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닌데? 귀족연합자치령을 정비하려면 한창 바쁠 때가 아닌가?”

“그런 일은 리네아 백작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내가 할 일은 죽여야 할 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내 말에 스케티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의심스럽다는 투로 내게 말했다.

“그 괴물을 죽였나?”

“예.”

“그 괴물을 죽이다니! 윌리엄 백작. 그대 역시 괴물이었던 모양이군.”

스케티는 허탈하다 못해 기운이 빠진다는 어투였다.

지금까지 가짜 몸으로 인해 입은 피해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괴물이라는 평가는 별로 기분좋은 평가가 아니었다.

“공작 전하. 모욕적인 언사는 자제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의는 아니었네.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서 평생을 고귀한 신분으로 살아오다 보니까 실수를 한 것뿐일세.”

“이해합니다. 벼락치기로 귀족이 된 저 같은 사람조차도 종종 다른 사람을 낮춰보다가 내가 언제부터 귀족이었다고 이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하면서 놀라곤 합니다.”

“이해해줘서 고맙군. 그래도 나보고 멍청하다고 돌려 말하는 것은 조금 지나쳤네. 내가 그래도 나름 황제인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 사람, 황제 선언을 했다고 해서 꽤나 권력 욕심이 있는 자인 줄 알았는데 선입견과는 다른 인상이었다.

자기비하를 웃음거리로 삼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공작 전하.”

“내게 죄송하다고 생각한다면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게. 괴물을 처리한 자네라면 어렵지 않겠지.”

설마?

같은 편 아니었나?

“그래서 부탁하실 일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숲의 현자를 죽여주게.”

역시나였다.

그 이유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스케티의 분노가 터져나온 것이다.

“그놈은 나를 속였어. 그놈은 내게 장성한 후계자를 안겨주겠다고 약속했지. 그래서 2살짜리 아이가 20살 청년이 되었을 때 나는 진심으로 감복했네. 그러나 그놈은 20살 청년이 2살짜리 아이의 정신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는 이야기하지 않았지. 사기꾼 놈은 죽어야 해.”

스케티가 왜 변했는지 알 것 같았다.

후계를 잃은 셈이다.

황제고 뭐고 다 의미없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놈을 잡기 위해 필요한 정보는 건네주도록 하지. 우리 가문은 그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많이 있으니까. 그리고 대가는 충분히 치르도록 하겠네. 황제의 일을 하는데 인색하게 굴 생각은 없네.”

“대가에 대해서는 리네아 백작과 의논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이곳에 올 때 스케티를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케티를 제거하면 누군가가 그를 대신할 것이고, 새로운 권력자가 어떤 짓을 저지를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나는 예측가능한 미래를 선택하기로 했다.

저택을 나온 것은 잠시 후였다.

숲의 현자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사람과 함께였다.

“백작님. 성벽 위를 보십시오.”

갑자기 옆에 있던 에할름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먼지 구름이 뽀얗게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우리는 즉시 내성 위로 올라갔다.

외성벽이 무너져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