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가짜 몸 또는 분열된 자아
비도는 너무 빨라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이런 속도라면 보고 막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넝마를 걸친 장발은 비도가 아니라 나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비도가 내 손을 떠나는 순간 그는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비도는 아슬아슬하게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의 일부가 허공 중에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연달아 날아간 비도 역시 장발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했다.
따라잡았다고 생각한 순간에는 움직이는 나무가 비도를 막아섰다.
갑자기 땅바닥에서 솟아오른 나무가 장발 대신 비도를 맞은 것이다.
비도는 나무를 관통했지만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왼쪽 팔에 두른 비도집에서 출발한 12개의 비도는 숨 한번 쉴 시간에 하나도 남김없이 날아갔지만, 머리카락 약간을 제외하고는 넝마 걸친 장발에게 위협조차 되지 못했다.
아쉬웠다.
백 미터도 안되는 이런 짧은 거리에서는 총으로 쏘는 것보다 내가 던지는 비도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더 위력적이고, 더 치명적이고, 조용하기까지 하다.
맞추기만 했다면 신비주의를 두르고 있는 저자의 낯짝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내가 아니더라도 한 방 먹여줄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짜 몸이 장발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장발이 내가 던진 비도를 피하느라고 가짜 몸을 방치한 결과였다.
가짜 몸은 자신을 휘감으며 전진을 방해하던 식물들의 힘이 약해지자 거침없이 장발을 향해 달려들었다.
뒤늦게 가짜 몸을 휘감으려던 풀이나 나무는 어이없을 정도로 툭툭 끊어져 나갔다.
장발이 신경을 써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풀이나 나무 역시 별것 아니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가짜 몸은 순식간에 장발에게 육박해 들어갔다.
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꽝!
철로 된 거대한 덩어리가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그리고 둘의 충돌은 유형화되어 주변을 휩쓸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우리 일행에까지 그 여파가 미칠 정도였다.
“윽!”
에할름은 짧은 비명을 토하며 귀를 막았다.
아쉬리프의 기사들 역시 비틀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에할름의 귀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냥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다는 느낌뿐이었다.
덕분에 나는 가짜 몸과 넝마를 걸친 장발의 충돌에 집중할 수 있었다.
넝마를 걸친 장발은 가짜 몸의 주먹을 한 대 맞고 거의 20미터는 나가떨어졌다.
처음 몇 미터는 허공을 날랐고, 그다음은 양탄자처럼 빽빽하게 자라 있는 풀 위로 쭉 미끄러졌다.
일반인이라면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설마 그럴 리가.
역시 예상대로 장발은 곧장 몸을 일으켰다.
미끄러지는 동안 반쯤 벗겨져 버린 넝마는 옆으로 던져 버리고 상반신을 드러낸 채, 무서운 눈빛으로 가짜 몸을 노려보았다.
눈빛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다면 저런 눈빛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살벌한 느낌이었다.
나는 가짜 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만들어 줄 생각으로 비도에 다시 손을 댔다.
그 순간 가짜 몸에게 돌아가 있던 시선이 내게 옮겨졌다.
왼손을 오른쪽 상완으로 뻗자마자 장발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장발의 시선을 똑같이 노려보면서 다시 한번 비도를 날렸다.
비도집이 텅 비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물론 이 공격이 저자에게 적중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불시에 가했던 공격조차 피해내고 막은 자였다.
하지만 내가 기대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가짜 몸의 협공이었다.
과연, 내 기대는 배반당하지 않았다.
비도집에서 비도가 튀어나오는 순간 가짜 몸도 장발을 향해 튀어 나갔다.
등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나 장발은 똑같은 방식으로 당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장발의 앞에서 솟아났던 나무들은 순식간에 덩치를 키웠고, 풀도 사람키보다 더 크게 자라났다.
그 숫자 역시 급격하게 불어났다.
덕분에 비도는 장발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중간에 자라난 나무들이 비도를 막아버렸다.
어중간한 크기의 나무는 비도에 맞아서 단숨에 부러지기까지 했지만 12개의 비도 모두가 중간에 막혀버린 것이다.
가짜 몸 역시 중간부터 자신을 막는 풀과 나무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거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풀과 나무에 휩쓸려 결국 파묻히고 말 것 같았다.
“에할름이 알아서 다 함께 움직이시오. 그러나 중앙정원으로는 절대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백작 각하께서는?”
에할름의 질문에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이층에서 중앙정원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장발을 향해 질주했다.
바닥에 깔린 풀이 내게도 휘감겨왔다.
중간중간 서 있는 나무 역시 나를 노리고 나뭇가지를 뻗어왔다.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려는 힘 역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 모든 방해가 약하게만 느껴졌다.
풀도 나무도 나를 막지 못하고 연달아 끊기기만 했다.
나를 지하로 끌어내리려는 힘 역시 내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움츠러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풀과 나무, 땅에서 내게로 기존에 느끼지 못했던 기운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내게 닿은 풀과 나무는 말라버리고, 땅 역시 단단하게 변했다.
방해 같지도 않았던 방해는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되기 시작했다.
가짜 몸보다 더 빨리 장발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나는 장발의 경악하는 얼굴을 보며 등에서 칼을 빼 들었다.
사람을 토막내기 딱 좋은 거대한 칼이었다.
장발은 이제 바로 코앞이었다.
가짜 몸과 거의 동시에 도착할 듯싶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장발은 나를 쏘아보더니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중앙정원에 들어온 포로들은 늪에 빠지는 것처럼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장발이 눈을 감자마자 갑자기 물에 빠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것은 포로들을 인도하던 스케티의 기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중앙정원을 걸어다녀도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장발은 더 이상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았다.
중앙정원에 들어와있던 인간 모두가 순식간에 땅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예외는 나와 가짜 몸 뿐이었다.
그랬다.
장발 역시 땅속으로 몸이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도주였다.
둘을 동시에 감당할 수 없으니 도망치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크게 도움닫기를 하며 장발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러나 약간, 아주 약간 늦어버렸다.
거대한 칼로 강하게 땅을 내리찍었지만 장발은 이미 땅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그래도 타격이 들어갔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마치 비명이 들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직후에 중앙정원의 색깔이 변했다.
눈을 아프게 할 정도로 생생했던 초록색이 순식간에 갈색으로 변했다.
풀과 나무는 말라비틀어지다 못해 밟을 때마다 가루로 부서져 버렸다.
생명력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땅조차 푸석푸석하게 변해 버렸다.
중앙정원은 사막이 되어버렸다.
넝마를 걸쳤던 장발은 더 이상 이곳에 없는 모양이었다.
곧 혼란이 닥쳤다.
지금까지 멍하게 정신을 놓고 있던 포로들이 정신을 차렸다.
무기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손발은 자유스러운 상태였다.
게다가 나름 한가락 하던 용병들이 대부분이라서 당장에 소란이 벌어졌다.
비명과 전투의 소음이 중앙정원에까지 울렸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이제는 가짜 몸과 대화를 나누어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근처에 있던 가짜 몸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짜 몸은 장발이 사라진 땅을 보고 있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정말 똑같이 생겼네.
“폴포토를 기억하나?”
“너도 내게 폴포토에 대해 이야기하는군.”
가짜 몸은 정색을 하고 오히려 내게 반문했다.
“폴포토는 너를 가짜 몸이라고 불렀다고 하던데.”
“가짜 몸? 왜 그렇게 불렀는지 이유를 아나?”
“나도 모르지. 나는 그 이유를 네게 물으려고 했는데?”
나를 보는 가짜 몸의 눈빛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약간 맛이 간 눈이었다.
“너는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모양이군.”
“글쎄.”
지구에서 살고 있었을 때, 중국에서 영업을 하기 위해 그쪽 문화를 공부한 적이 있다.
한국과 달리 도교가 아직 남아 있는 곳이라서, 관련 서적을 읽다가 양신이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자신의 몸 말고 수련을 통해 진정한 몸을 하나 더 만든다는 개념이었다.
폴포토가 둘로 쪼개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바로 양신이었다.
이곳에는 지구와 달리 신비가 있고, 지구에서라면 기적이라고 할 만한 일을 인간이 행하는 것이 상식인 곳이다.
그런 것이 없는 지구에서도 몸 밖에 몸을 하나 더 만든다는 개념을 생각해 낼 정도인데, 기적이 현실인 이런 세상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폴포토가 뭔가를 하려다가, 스스로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둘로 나누어져 버리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일 것 같았다.
선과 악이 나누어지고,
인간에 대한 좋고 나쁨이 나누어지고,
세상에 대한 간섭과 방관이 나누어진다.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는 모순이 그의 정신을 둘로 나누고, 둘로 나뉜 정신 때문에 육체 또한 두 개로 세상에 현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폴포토이고 다른 하나가 가짜 몸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망상만은 아닐 것 같았다.
“글쎄라니? 안다는 것인가 아니면 모른다는 것인가?”
“모든 것은 추측이라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없으니까.”
가짜 몸의 눈빛이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그냥 봐도 이놈 이거 정상이 아니구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 너도 잡아먹도록 하자. 그러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나도 가지게 되겠지. 예감이 나를 이곳으로 이끈 이유가 너를 만나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모양이다. 웃기지도 않던 늙은이가 아니라.”
“잡아먹는다니! 도발치고는 불쾌하고 저급하군.”
“도발이라고?”
가짜 몸의 손이 내게 뻗어왔다.
아무 변화 없는 직선적이고 정직한 움직임이었지만 빠른 속도 한가지 만으로 모든 단점을 덮어버릴 수 있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빠른 속도라고 하더라도 내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내 손목을 잡아오는 가짜 몸의 손을 쳐내며 오히려 그의 목을 손날로 가격했다.
단숨에 목뼈가 나가 버릴 정도의 위력이었지만, 내 손은 오히려 고무덩어리를 친 것 같은 탄력에 튕겨져 나왔다.
이거 인간 맞나?
의외의 반응에 빈틈을 보인 내 손을 가짜 몸이 잡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마주 서서 움켜잡고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까지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거인족을 상대로 할 때조차 그랬다.
힘이 나보다 강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가짜 몸의 손아귀힘은 분명히 나를 상회했다.
전체적인 힘 역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필사적으로 힘을 쥐어짜 내는 나에 비해 가짜 몸은 분명히 여유가 있었다.
다른 자들이 나를 상대할 때의 암담함을 이번에는 내가 느끼는 중이었다.
나는 천천히 밀리기 시작했다.
팔이 뒤로 밀리고, 허리가 꺾여갔다.
거대한 바위를 홀로 지지하는 느낌이었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