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01화 (201/248)
  • 201. 어부는 조개를 먼저 줍는다.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학살이 자행된 흔적이 남아있는 성 밖과 달리 성 안쪽에서의 죽음은 그나마 인간적이었다.

    갑자기 열린 성문에 부딪혀 죽은 병사가 몇 명.

    부러진 채 튀어 나간 빗장에 맞아 죽은 기사가 하나.

    그리고 가짜 몸이 지나가는 길에 있었던 사람들로 만들어진 길이 하나.

    피와 시체로 만들어진 길이 내성으로 쭉 이어져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는 오직 하나.

    운이었다.

    그것은 성 안쪽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이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외면했다.

    부서진 성문을 지나 내성으로 들어설 때까지 우리 앞을 막은 기사나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병사들은 뻔히 우리를 보면서도 슬금슬금 도망가기까지 했다.

    군기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단신으로 성문을 박살내는 자를 방금 보내고 한숨을 돌렸는데, 바로 그 뒤를 따라오는 수상쩍은 자들의 앞을 막을 만큼 용기 있는 자가 없었을 뿐이다.

    내성은 성벽을 가진 거대한 저택이었다.

    스케티령에서는 자칭 황궁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진짜 황궁을 보았던 내게는 그냥 커다란 건물에 지나지 않았다.

    에할름은 내게 내성의 구조에 대해 다시 한번 집고 지나갔다.

    “이곳은 거대한 중앙정원으로 유명합니다.”

    “평면도를 본 적이 있지요.”

    “그렇다면 이곳의 중앙정원이 얼마나 커다란 정원인지도 아시겠군요. 수백 명의 병사들이라도 훈련을 할 수 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지요. 스케티는 중앙정원을 둘러싼 저택 내부에서 기사들 간의 대련을 지켜보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스케티의 눈에 띄어서 출세한 자도 간혹 나오기도 했다지요.”

    설계도와 평면도를 검토하면서 중앙정원이 정말 크다고는 생각했는데 그곳을 연병장으로 사용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다면 스케티는 저택 내부에는 복병을 두고 자신은 아예 중앙정원으로 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시체와 피가 표식이 되어주니 가짜 몸을 놓칠 우려는 없겠지만, 이대로 시체를 따라 가기만 한다면 가짜 몸은 물론이고 스케티까지 한꺼번에 마주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가짜 몸 못지않게 스케티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살짜리 후계자를 하루 만에 성인으로 키워내다니!

    가짜 몸과 달리 스케티에게서는 뭐가 튀어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숲의 현자라는 자일 수도 있고, 다른 자일 수도 있다.

    그러니 무턱대고 저들 사이에 뛰어드는 것은 절대 사양이었다.

    스케티와 가짜 몸을 동시에 상대하기보다는 그들 사이에서 어부지리를 노리는 것이 정석이다.

    나는 피로 이어진 길을 벗어나서 저택의 이층으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

    가짜 몸은 자신을 부르는 달콤한 냄새를 따라 계속 걸어갔다.

    그의 예감이 가리키는 곳과 다르지 않은 방향이었다.

    그는 내성문을 지난 후, 정원을 지나고, 저택의 정문에 들어섰다.

    내성에는 병사들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기사들이었고, 일부는 저택을 관리하는 민간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외성에서 덤벼들던 자들에 비해 한결 수준이 높았다.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죽어가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저택을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손에 걸리는 생명은 모두 죽였다.

    식전 입가심 같은 것이었다.

    저택을 가로지른 가짜 몸은 다시 햇볕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중앙정원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선명한 초록색의 풀들이 중앙정원의 바닥에 두껍게 깔려 있었다.

    푹신푹신한 것이 고급 카펫 못지않는 느낌이었다.

    가짜 몸은 비로소 맛있는 냄새가 어디서 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예감도 같은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중앙정원 한가운데.

    누더기를 걸친 남자였다.

    덥수룩한 머리칼과 다듬지 않은 수염 때문에 그의 나이를 어림잡기는 어려웠지만, 그가 발산하는 생기는 말라죽은 나무조차 다시 생생하게 되살릴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내가 여기로 그렇게 오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당신 때문이었던 모양이군. 맛있는 냄새가 나.”

    “도발이라면 너무 격이 떨어지는군. 폴포토.”

    숲의 현자는 어이가 없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자신을 이름을 듣게 된 가짜 몸은 분위기가 자체가 달라졌다.

    어딘지 모르게 장난치듯 여유있던 모습에서 칼날같이 날카로운 분위기로 바뀐 것이다.

    “폴포토? 그게 누구지?”

    “......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말해. 그게 누군가?”

    “3백 년 전에 선거후 제도를 만든 존재. 그게 바로 너다. 네가 나를 설득하지 않았나?”

    “내가?”

    가짜 몸은 잠깐 혼란에 빠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금방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너는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가짜 몸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칼날 같이 날카로운 분위기에서 더 나아간 모습이었다.

    그것은 마치 날을 바싹 세운 칼날 같았다.

    숲의 현자는 일변한 가짜 몸의 분위기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가짜 몸은 숲의 현자의 반응은 알 바가 아니라는 식이었다.

    그는 태연히 모욕적인 말을 입에 올렸다 .

    “그렇다면 너를 잡아먹으면 그만이야. 그러면 네가 아는 것을 나도 알 수 있게 되겠지.”

    “이 미친놈이! 폴포토 정신 차려라! 네 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숲의 현자가 호통을 쳤지만, 가짜 몸은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오히려 분노가 치솟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폴포토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이유없는 불쾌감과 거부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가짜 몸은 더 이상 숲의 현자와 대화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숲의 현자를 흡수하면 그만이었다.

    가짜 몸은 숲의 현자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중앙정원에 발을 들이밀기가 무섭게 중앙정원 바닥에 깔려 있던 풀들이 가짜 몸의 다리를 휘감았다.

    풀들은 실시간으로 자라나면서 다리뿐 아니라 몸통도 휘감으려고 했다.

    그러나 풀은 풀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질긴 풀이 여러 겹으로 달려들어도 가짜 몸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투두둑!

    툭툭!

    온갖 풀들은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소리를 내며 끊겨 나갔다.

    하지만 다음에 벌어진 일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끊어진 풀들이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지더니 가루로 변해서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가짜 몸이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듯 풀들이 몰려들었다.

    풀들은 몸집을 키우고, 숫자를 불려서 가짜 몸을 휘감았다.

    다리를 휘감고, 몸통을 휘감으며 가짜 몸을 구속하려고 했다.

    그러나 가짜 몸의 발걸음은 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는 끊어진 풀들만 말라비틀어지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가짜 몸에 닿는 것만으로도 노랗게, 그리고 갈색으로 변하면서 부서졌다.

    가짜 몸이 풀들의 생기를 흡수하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가짜 몸을 잡을 수 없을 것이 뻔히 보였다.

    그제서야 숲의 현자는 오른손을 들었다.

    숲의 현자 뒤쪽의 저택 내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일을 할 시간이었다.

    그것은 중앙정원의 나머지 구성원도 마찬가지였다.

    중앙정원에 있는 식물은 풀만이 아니었다.

    정원 바닥에 깔려 있는 족보있는 잡초들 말고도 잘 가꾸어진 나무가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숲의 현자가 오른손을 든 순간 중앙정원의 나무들이 덩굴식물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무의 몸체는 구불구불 확 자라나고, 나뭇가지는 촉수처럼 움직였다.

    가짜 몸을 잡는 나뭇가지,

    창처럼 찌르는 나뭇가지,

    몽둥이처럼 후려치는 나뭇가지 등등.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정의 절반이 꿈틀거리는 나무로 가득 찼다.

    그러나 나무 역시 풀처럼 말라비틀어지기는 매한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말라비틀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다르다는 정도였다.

    가짜 몸을 휘감은 나뭇가지는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지면서 뚝뚝 끊어졌다.

    찌르고 후려치는 나뭇가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들은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말라서 부서졌다.

    가짜 몸의 발걸음을 막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그때였다.

    저택 내부에 있던 기사들이 포로들을 중앙정원으로 끌고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뱅트손의 부대에서 낙오했거나 뒤로 쳐졌다가 사로잡힌 자들이었다.

    대부분 용병이었고, 귀족과 기사도 약간 섞여 있었다.

    포로들은 모두 멍한 얼굴로 스케티의 기사들의 인도에 따라 중앙정원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중앙정원에 발을 들인 포로들은 그대로 흙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바닥의 풀들이 포로들을 휘감더니 그대로 아래로 끌어들인 것이다.

    분명히 단단한 땅일 텐데도 늪에 가라앉는 것처럼 발목이, 무릎이, 허리가, 가슴이, 목과 머리까지 차례대로 땅속으로 가라앉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리가 땅속으로 사라질 때까지도 멍한 얼굴이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예외는 없었다.

    모두가 중앙정원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포로들이 사라질수록 식물은 더욱 생생한 초록색이 되었고, 나무는 더욱 질겨졌다.

    가짜 몸에게 닿자마자 말라비틀어지던 풀과 나무가 버티는 시간이 좀 더 길어졌다.

    가짜 몸은 무기처럼 다가오는 나뭇가지를 쳐내기도 했다.

    그 결과 가짜 몸의 발걸음이 느려지더니 결국 제자리걸음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가끔은 발목이 땅에 파묻히기도 했다.

    숲의 현자와 가짜 몸의 대치는 평행을 이루고 말았다.

    그것도 가짜 몸이 약간 불리한 상태로 말이다.

    그때 숲의 현자를 향해 비도가 날아왔다.

    *

    미니맵은 적들의 대부분이 저택 반대편에 몰려 있음을 알려주었다.

    덕분에 그나마 몇 안 되는 기사의 몸통에 칼을 박아주는 정도만으로도 스케티의 저택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2층 발코니에서는 중앙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중앙정원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장발 괴인은 물론이고 풀과 나무에 휘감긴 채 고군분투하고 있는 가짜 몸까지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나는 가짜 몸을 보자마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폴포토는 분명히 빛의 기둥 속에서 산산이 부서져서 흡수되었는데?

    그렇다면 지금 내 눈 아래에 있는 저자는 뭐지?

    가짜 몸은 폴포토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의 몸까지도 똑같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에할름 역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에 영향을 끼쳤던 폴포토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저 아래에 있는 자가 폴포토와 같은 외양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우리가 지금까지 추격을 해왔던 가짜 몸이 아니라 스케티의 배후라고 생각되는 자와 그 주변을 주목할 수 있었다.

    넝마를 입은 자는 잔뜩 인상을 쓴 채 가짜 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나무와 풀이 움직이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주목한 것은 넝마를 입고 있는 장발이 아니라 그의 뒤쪽이었다.

    줄지어 사람들이 중앙정원으로 걸어들어오고 그대로 땅속으로 가라앉아서 사라지는 모습은 내게 역겨움을 불러일으켰다.

    내게 있어서 저 모습은 빛의 기둥 속에서 먼지로 부서지며 흡수되던 자들과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빛의 기둥 내부와 땅속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으로 같은 시스템이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비도를 잡았다.

    내 경험상 신비에 접한 자라고 하더라도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무기에 찔리면 죽는다.

    제국을 배후에서 주물럭거렸던 폴포토조차도 근본은 인간이었다.

    가짜 몸도, 장발 녀석도 다 똑같은 놈들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내 확신을 비도에 싣고 장발을 향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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