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성벽 돌파
“설마 화살촉을 빼놓은 건가?”
“도대체 뭐지? 어떻게 단 한 발의 화살도 박히지가 않지?”
공성용 대형 쇠뇌를 담당하던 병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옆에 있던 화살을 다시 확인했다.
그의 옆에서 도르래를 돌리던 병사 역시 손을 멈추고 한마디 보탰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빗발치듯 화살을 쏘아 보냈는데!
공성용 대형 쇠뇌에서 발사하는 금속제 볼트부터 궁병이 쏘아대는 화살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공격은 아무런 타격도 가하지 못했다.
판금갑옷이 아니라 금속덩어리에 화살을 쏘아도 이 정도로 쏘아댔으면 흠집이라도 났을 것이다.
하지만 성문 쪽에 홀로 서 있는 남자는 판금갑옷은커녕 가죽갑옷조차 입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향한 날아간 화살들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튕겨져 나갔다.
적을 향해 돌격 준비 중이던 기사들은 성벽 위의 병사들과는 달리 바로 코앞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맹수 기병을 때려 죽이던 광경에서부터 화살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 것까지의 모든 상황을 말이다.
눈앞의 사내가 맹수 기병을 일방적으로 때려 죽이던 것도 분명히 놀랍고 두려운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이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대한 두려움은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적이 너무 강해서 일방적으로 당하는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이곳에 있는 기사들 중 일부는 뱅트손의 거인 기사를 상대하면서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패배는 낯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적이 강한 것과는 별개로 약간의 부상조차 입힐 수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낯선 일이었다.
원래 그들은 이 새로운 적이 양 떼 사이에 뛰어든 늑대나 닭장 안에 들어간 족제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늑대라고 하더라도 양 떼에게 짓밟힐 수 있고, 족제비라고 하더라도 닭에게 쪼일 수 있는 법이다.
기사들이 쇠스랑 하나 들고 항의하는 농민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할 때도 재수 없으면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스케티의 기사들은 기사 앞의 농민이 되었다는 마음가짐으로 나선 참이었다.
숫자로 밀어붙이고, 기습을 하다 보면 농민이라도 어쩌다가 기사를 죽일 수 있는 것처럼 자신들도 저자를 죽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죽어서 겹겹이 쌓인 맹수와 기병들.
그 위에 숱하게 박혀 있는 화살들.
그리고 긁힌 상처 하나 없는 적의 모습.
맹수 기병의 근본이 기마병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름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맹수 기병이 조금의 피해도 입히지 못하고 절반 가까이 죽어나갔고, 기습적으로 가한 화살 공격 역시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지금도 날아온 화살이 저자의 몸에 부딪힌 후 튕겨나가고 있었다 .
뭔가 현실이 아닌 광경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 광경을 보던 선임 기사는 스케티의 당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기사의 명예와 자존심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에게 스케티는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설명해 주었다.
스케티 자신을 지지하는 가문의 기사들을 잃게 된다면, 자신의 미래도 없다는 사실을 담백하게 말한 것이다.
만약 상대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망설이지 말고 후퇴해달라는 부탁도 뒤따랐다.
기사단의 선임 기사이며 스케티의 가까운 측근이라면 애초에 평범한 기사와는 거리가 먼 존재다.
사실상 정치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선임 기사는 지극히 정치적인 판단을 내렸다.
기사들 중 일부는 돌격시키고 나머지는 대기하도록 한 것이다.
피가 끓고 있는 젊은 기사들에게 싸울 기회도 주지 않고 뒤로 물린다면 항명하는 자가 나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사들 중 일부를 적에게 던져준 것이다.
그렇다.
던져 준 것이다.
선임 기사는 자신의 동료들이 뱅트손의 거인 기사들조차 몰살시켰다는 저 남자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조금도 없었다.
가짜 몸은 옆에 굴러다니던 기병용 창을 하나 집어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기사들을 향해 던졌다.
가장 앞에 쇠로 된 방패로 몸을 가리고 돌격해 오던 기사들은 눈앞의 적이 창을 집어들고 던지는 것까지는 보았다.
그러나 창이 날아오는 것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뭔가 터지는 것 같은 낯선 소리를.
그들 중 몇 명에게는 그것이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였다.
방패가 뚫리고 방패를 들고 있던 기사의 몸도 뚫렸다.
아니 터졌다.
몸뚱이가 통째로 분쇄되었다면 터졌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팔 다리 머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창을 한 번 던지는 것만으로 네 명의 기사가 단숨에 즉사했다.
만약 기병창이 중간에 박살이 나서 파편으로 흩어지지 않았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몸을 부수어 버렸을지 몰랐다.
상상 가능한 범주의 전투라면 일방적인 패배라고 하더라도 전의를 불태우며 싸우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동료가 전사하는 것 자체가 전의를 북돋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벼락에 맞아서 죽었다고 하늘을 향해 전의를 불태우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
천재지변은 감수해야 하는 것이지 저항하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번의 일격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것을 일반적인 전투라고 해야 할까?
이것은 차라리 천재지변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그러나 돌격하던 기사들은 생각하고 고민하기보다는 훈련에 따른 반사적인 반응에 따랐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두려움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고함을 지르며 더 필사적으로 뛰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한 발자국도 채 걷기 전에 다시 창이 날아왔다.
그리고 다시 창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메이스였다.
그리고 다음에는 모닝스타였다.
죽어나간 맹수 기병이 사용하던 무기가 투척 무기로 변해서 기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백 명에 달하던 기사들은 한꺼번에 몇 명 씩 무리 지어 죽어나갔다.
공격을 당한 자는 상처를 입고 죽는 것이 아니라 몸이 터져나가서 죽었다.
메이스 같은 쇳덩어리는 한꺼번에 십여 명을 죽여버리기도 했다.
이것은 전장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던 그 누구도 이런 광경을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다.
시체가 아니라 부서진 육신과 살점이 땅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피 역시 일부러 흩뿌린 것처럼 땅바닥을 물들였다.
반사적으로 공세를 취하던 기사들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공격이었다 .
그제서야 그들은 생각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선임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예상했던 것은 돌격해 들어간 기사들이 주먹에 맞아서 즉사하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인간이 박살이 나서 모습도 알아볼 수 없는 덩어리로 흩어져서 땅에 굴러다니는 장면은 전혀 아니었다.
이런 장면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
“후퇴해. 도망쳐!”
선임 기사는 뒤늦게 고함을 질렀다.
성벽 위에서도 다시 나팔을 불기 시작했다.
맹수 기병에게 후퇴를 명령했던 바로 그 곡조였다.
아직 대기하고 있었던 3백 명에 달하는 기사들은 신호에 따라 일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타던 전의가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을 보고 완전히 사그라든 후였다.
그들의 일부는 성문 쪽으로, 나머지는 성벽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가짜 몸은 이미 전의를 잃고 도망치기 시작한 기사들에게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유혹적인 냄새를 풍기는 자가 성안 깊숙한 곳에 있는데 이곳에서 씨앗이나 줍고 있을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그래서 대형을 무너뜨리면서 물러서고 있는 기사들을 무시하고 성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정쩡하게 뒷걸음치던 기사들은 가짜 몸이 가까이 다가가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몸을 돌려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뭐하나! 성문을 닫아!”
제정신이 돌아온 지휘관 한 명이 성벽 위에서 고함을 질렀다.
비명을 지르는 것과 비슷한 어조였다 .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그의 명령을 반복하며 전달하기 시작했다.
3중으로 된 성문이 닫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방금 고함을 질렀던 지휘관은 계속 병사들을 다그치며 공격준비를 시작했다.
그제서야 병사들이 충격에서 벗어나 움직였다.
병사들은 성벽 위에 있는 대형 쇠뇌를 다시 장전하기 위해 도르래를 돌리고 활을 겨누었다.
가짜 몸은 귀찮음을 느꼈다.
이곳에서 영양가도 없는 자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성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점점 더 빠르게.
성문 쪽으로 도주하던 기사들은 무서운 속도로 자신들이 있는 쪽으로 쇄도하는 가짜 몸을 보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짜 몸이 달려가는 속도는 기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따라잡힌 기사들은 짓밟히고 부딪치고 이리저리 튕겨져 나갔다.
날아오는 무기에 맞아 죽은 자들과 달리 그들의 시체는 비교적 멀쩡했다.
가짜 몸은 그대로 성문에 부딪혔다.
거대한 바위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가장 바깥의 성문이 두 쪽으로 쪼개져서 엎어졌다.
성문을 고정하는 돌쩌귀가 부서져 나간 것이다.
그 안에 있는 성문도 비슷하게 망가졌다.
나무와 철로 만든 중간 격자문은 아예 박살이 났고,
가장 안쪽에 있는 성문도 빗장이 박살나며 활짝 열려 버렸다.
단 한 명이 3중으로 막아놓은 성문을 박살 낸 것이다 .
성문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개미떼가 흩어지는 것처럼 도망을 쳐 버렸다.
성벽 위에서도 더 이상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하고 얼어 붙었다.
그제서야 만족한 가짜 몸은 성의 중심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
나는 스케티의 성채를 향해 말을 달렸다.
에할름과 아쉬리프의 기사들 역시 끝까지 나를 따라오겠다는 의사를 밝힌 후 나와 함께 했다.
스케티의 성채가 보일 정도로 가까이 접근했을 때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투석기로 던진 바위가 건물에 부딪히면 이런 소리가 나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경험이 풍부한 아쉬리프의 기사 한 명이 내게 대답했다.
투석기?
가짜 몸이 바위라도 던졌나?
그자가 뱅트손의 영역에서 저지른 짓을 생각해보면 투석기 대신 자신이 직접 바위를 던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에할름은 가짜 몸의 능력이 볼포토를 상회할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사람을 지배하고 조정하는 능력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폭력이라는 면에서는 에할름의 걱정이 일리가 있다고 나도 생각했다.
어쩌면 나보다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스케티의 성채에 도달한 것은 금방이었다.
각종 맹수의 시체와 사람의 시체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조각난 사체 역시 숱하게 흩어져 있었다.
적어도 삼사백은 되는 사람들이 성벽 앞에서 죽은 것으로 보였다.
사람이 저질렀다기에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성문이 열려 있습니다.”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박살이 나 있군요.”
조금 전에 났던 큰 소리가 무엇 때문에 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성문을 통과하는 동안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