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99화 (199/248)

199. 일방적인 격전

*

기사들, 병사들, 맹수 기병까지.

스케티의 직할 병력이 모여 있었다.

단, 한 명의 적의 상대로 하기에는 지나치게 과한 전력이었다.

아니, 이것은 지나치다고 하기보다는 좀 미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과한 대처였다.

그러나 스케티의 가신들은 이 정도로도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만인대가 몇 개씩 몰려왔어도 코웃음을 쳤으리라.

몇만 명이 공격을 해도 나무와 돌로 보호받는 성벽을 타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들의 보급품 창고가 불에 타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일반적인 군대의 공격은 그들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맞이해야 할 적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적이 아니었다.

압도적으로 강한 단 한 명의 적이었다.

스케티의 가신들은 지금 성 밖에서 태연하게 말 위에 앉아 있는 자가 뱅트손의 영역을 지나며 저지른 짓에 대한 소문을 이미 입수한 후였다.

심지어 전투 현장에서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여러 명 복귀해서 자신들이 목격한 것을 보고하기까지 했다.

단, 한 명이 천인대를 몰살시켰다는 이야기.

단, 한 명이 수백 명의 기사를 맨손으로 쳐 죽였다는 이야기.

무기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두 개의 천인대 역시 절반 이상 죽었다는 이야기까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의심하는 발언이 속출했다.

그러나 스케티는 모든 의심을 물리쳤다.

그의 가신들과 달리 그는 이미 비슷한 존재를 알기에 전력을 다해서 대응할 것을 명령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 진심으로 명령에 따르게 하려면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필요한 법이다 .

그 이해는 숲의 현자가 제공했다.

숲의 현자는 자신 역시 천 명 정도 되는 병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 가신들을 이해시켜 주었다.

숲으로 돌격해 들어간 병사들은 숲의 현자를 보지도 못한 채 나뭇가지에 칭칭 감겨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추태를 보였다.

게다가 나뭇가지가 허공에 매달려 있는 병사들의 목을 감고 있어서 언제든 사로잡은 병사들을 죽일 수 있다는 위협도 확실히 해두었다.

게다가 숲으로 돌입한 병사들은 일반적인 징집병이 아니라 세습 영지병이었다.

스케티 파벌의 귀족들은 뱅트손과의 전투로 인한 피해와 연이은 내부 숙청으로 인해 세력이 확 줄어든 상태였다.

대신 모든 권력과 자금, 병력은 오로지 스케티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그렇게 모은 병력 중에서 가장 정예스럽고 충성심이 높은 병력이 세습 영지병이다.

특권을 세습하는 대가로 영지군으로 복무하는 자들은 일반적인 징집병과는 배경부터가 다르다.

대개는 중농 이상의 부를 소유하고 있고, 특권을 세습하는 과정에서 전투기술 역시 세습을 하는 터라 기사 못지않는 실력을 갖춘 자도 드물지 않게 존재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주와 크기만 다를 뿐 같은 이익을 공유하는 이익공동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입장이라서, 영지를 위한 충성심이나 적극성이 징집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숲의 현자는 그런 병사들로 구성된 병력을 단숨에 제압해 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선언했다 .

숲에서라면 기사들 역시 병사들처럼 제압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 결과가 스케티의 성채를 가득 채운 병력이었다.

만약 여기에 모인 병력을 잃는다면 스케티의 가문은 황제는커녕 대귀족으로 남는 것조차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어떤가? 저자 정도라면 규격 외의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일반 병사도 아니고 수백 명의 기사를 때려죽였습니다. 저런 자를 규격 외라고 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규격 외라고 할 수 있을까요?”

“또다시 저런 자가 나오다니······”

“저 역시 저런 자에 속합니다만?”

스케티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속을 긁어대는 숲의 현자에게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성문 앞에 있는 자가 위험하다면, 성벽 위에 있는 자도 위험하다.

둘 다 규격 외이기는 마찬가지니까.

지금까지 자신에게 협력해 주어서 그 위험성을 눈감고 있었을 뿐, 본질적으로 둘은 동일했다.

어쩌면 바로 대꾸하지 못했던 것은 두려움 때문일지도 몰랐다.

스케티는 뒤늦게 중얼거렸다.

“준비하게. 어차피 성문에서는 못 막을 테니까.”

“그러지요. 그런데 포로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겠지요?”

“그래. 아직 남아 있는 포로들을 모조리 끌고 왔지. 3천 명은 돼. 모두 성의 중심에 가져다 놓았네.”

“그 정도라면 괜찮을 겁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씨앗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게 숫자로 승부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음? 왜 무슨 일이니?”

숲의 현자는 갑자기 그의 어깨에 내려앉은 새와 시선을 마주쳤다.

평소에도 숲의 현자가 정찰병으로 새를 활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스케티는 가볍게 놀라는 그의 표정에서 의외의 일이 발생했음을 눈치챘다.

“세상에나! 유명인이 오는 모양이네. 아무리 행운의 사나이라고 해도 이렇게 험한 곳에는 함부로 오는 것이 아닌데. 무리한 짓을 하는군. 그의 행운이 그를 지켜준다면 얼굴은 한 번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숲의 현자는 흥미를 잃었다는 얼굴로 내성을 향해 몸을 돌렸다.

포로들이 잡혀 있는 방향이었다.

숲의 현자가 입고 있던 누더기는 변함이 없었다.

그의 옆에 있던 흰호랑이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아닌 것처럼 보이곤 하는 태도 역시 그대로였다.

그리고 뱅트손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

가짜 몸은 자신을 향해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명령만 떨어진다면 당장이라도 자신을 향해 몰려올 자들이었다.

그리고 저들은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지르면서 여기까지 왔는지 알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들이 내뿜는 거센 기세에는 살기 못지않게 두려움도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두려움 때문에 저들이 너무 신중하게 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무엇인가 변화를 주지 않는다면 한참 동안 저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끌고 온 말들을 풀어버렸다.

주변을 장악하고 있던 자신의 기세를 살짝 약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말들은 일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겁이 많은 짐승다운 행동이었다.

남은 것은 그가 앉아 있던 전투마 한 마리뿐이었다 .

말들이 흩어진 것은 마치 도미노의 첫 번째 팻말이 넘어지는 것 같았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맹수 기병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그다음은 진형을 형성하고 있던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성벽 위의 병사들이었다.

흥분과 살기와 두려움으로 가득 찬 공기가 그들을 밀어붙였다.

맹수 기병은 본질적으로 기마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말노릇을 하는 맹수가 말보다 훨씬 강하고 좀 더 다양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기사를 때려잡는 가짜 몸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이나 맹수나 별로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맹수 기병의 선두에 서 있는 것은 호랑이였다.

호랑이 위에 타고 있는 기수는 창으로 찌르려고 했고, 호랑이는 덮치며 물려고 했다.

동시에 두 명이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니 일반 병사였다면 당연히 대응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사가 상대하려고 해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짜 몸에게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뱅트손의 기사를 때려잡은 것처럼 하면 그만이었다.

단 일격에 호랑이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연달아 휘두른 주먹에 기수의 머리도 박살이 났다.

가짜 몸을 노렸던 창은 가짜 몸에 적중했지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마치 돌덩이를 찌른 것 같다고나 할까.

창끝은 그냥 미끄러졌다.

가짜 몸은 쓰러지는 호랑이를 밟으며 뛰어서, 바로 뒤에 따라 붙었던 곰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다급하게 내민 방패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주먹이 방패를 뚫고 기수의 가슴도 박살냈다.

내리친 주먹에 머리를 맞은 곰은 바닥에 엎어지며 그대로 즉사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맹수 기병들이 경험해온 전투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전투였다.

아니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맹수들을 밟으며 공중을 날아다니는 듯이 뛰어다니는 가짜 몸은 너무 빨랐다.

제대로 공격을 맞출 수도 없었고, 설사 공격을 적중시켰다고 해도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마치 몸 위에 보이지 않는 갑옷이라도 입은 것처럼 칼로 내리쳐도, 도끼로 후려쳐도 창으로 찔러도 아무런 상처를 입힐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맹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꺼운 나무조차 일격에 부러뜨리는 곰의 앞발도, 어떤 동물의 뼈라도 단숨에 으깨버릴 수 있는 호랑이의 이빨도 소용없었다.

마치 거대한 바위를 공격하는 느낌이었다.

반면에 가짜 몸의 주먹은 막을 수가 없었다.

주먹 한 방에 생명 하나가 스러졌다.

예외는 없었다.

인간과 맹수의 사체가 공평하게 쌓여갔다.

의미없는 죽음이었다.

어떻게 손쓸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수십 기의 맹수 기병이 죽어 나가자 더 이상은 안되겠다고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성벽 위에서 길고 낮게 울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퍼졌다.

후퇴를 명령하는 신호였다.

명령에 따라 살아남은 맹수 기병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대신 방진을 구성한 기사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두 자원한 기사들이었다.

뱅트손의 기사들이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첩보였다.

심지어 그 유명한 거인 기사들까지 전멸했다는 소식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한 번이라도 거인 기사들과 전투를 치루어본 경험이 있는 자들은 거인 기사들을 혼자서 전멸시켰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자는 인간이 아니라고 단언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케티의 기사들은 자신들 역시 싸워보겠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이것은 기사로서의 명예와 자존심에 관한 문제라서 스케티로서도 만류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기사들 중 자원한 일부 인원만 전투에 임하게 된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각자의 무기를 잡고 대형을 이루어 가짜 몸에게 다가오는 기사들에게서는 눈치가 둔한 사람이라고 해도 강하게 느낄 정도로 예리한 살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정예병이라고는 하지만 주로 병사들로 구성되었던 맹수 기병과는 분위기부터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가짜 몸은 여전히 두 주먹뿐이었다.

그때 허점을 찌르기라도 하는 듯이 갑자기 짧은 화살이 쏟아졌다.

성벽 위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대형 쇠뇌에서 발사된 화살이었다.

그것을 신호로 하듯 무수한 화살이 쏟아졌다.

성벽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의 절반은 궁병이었다.

그들은 활과 쇠뇌를 가지고 미친 듯이 화살을 쏘아댔다.

대형 쇠뇌에서 발사되는 화살은 사람 몇 명은 우습게 관통할 정도로 강력한 충격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화살이 한두 발도 아니고 수십 발이 쏟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일반적인 화살 역시 비처럼 쏟아붓는다.

이 정도면 아무리 판금 갑옷을 입고 있다고 해도,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으로 몸을 두르고 있다고 해도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가 무너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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