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97화 (197/248)

197. 뱅트손, 몰락하다.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의 그물이 겹겹이 가짜 몸을 뒤덮었다.

그물은 이미 여러 차례 시험을 거친 물건이었다.

그물의 양쪽에 여러 마리의 말을 묶어서 서로 당기는 시험을 하기도 했었고, 거인 기사들 여러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서 끊어보려고도 했었다.

가위로 자르고, 칼로 베고, 도끼로 치고, 심지어 불에도 집어넣었었다.

그 결과 철사를 섞어서 짠 그물은 그 모든 시험을 통과했다.

그물 안에 집어넣는 것이 문제지, 일단 그물에 얽어매어 넣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사로잡는 것은 별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이 정도라면 단 한 겹의 그물만으로도 야생의 숲오우거를 사로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뱅트손 뿐 아니라 시험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예외라는 것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특히, 세상의 온갖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전쟁터에서는 더욱 그랬다.

“달려들어!”

“눌러버려! 묶어 버리라고!”

우놀프와 브리타는 그물이 가짜 몸을 뒤덮는 순간 고함을 질렀다.

말로 하지 않아도 그들이 원하는 대로 거인 기사들이 움직였겠지만, 본능적으로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이것은 기회였다.

두 번은 없을 기회였다.

가짜 몸에게 여러 겹의 그물을 뒤집어씌운 거인 기사들은 앞을 다투어 그물 뭉치에게 달려들었다.

명령대로 그물째 꽁꽁 싸매고 묶어서 사로잡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거인 기사들의 계획은 계획으로만 끝나고 말았다.

그들이 미처 그물에 닿기도 전에, 그물망 사이에서 손이 두 개 튀어나왔다.

그 손은 그물망을 잡고 단숨에 찢어 버렸다.

그물망은 커다란 구멍이 난 채 가짜 몸의 발아래로 떨어졌다.

그물을 던지기 전과 다를 바가 없는 상황으로 돌아온 것이다.

우놀프와 브리타는 자신들의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물이 찢어지다니!

그물을 가지고 실험을 했을 때 자신들도 참관했었다.

그래서 저 그물이 얼마나 질긴 그물인지 자신들도 잘 알았다.

직접 당겨봤으니까.

거인 기사들 중 그래도 중간은 가는 자신들조차 저 그물은 찢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물에 젖은 종이라도 찢는 것처럼 간단하게 그물이 찢어진 것이다.

심장이 멎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전보다 가까이에서 저자를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실실 웃고 있는 눈매.

이빨이 보일 정도로 짙은 미소.

그냥 보기에는 좋은 인상처럼 보이지만 그의 눈에서는 약한 자들을 가지고 노는 잔인한 심성이 엿보였다.

저자는 일부러 저런 짓을 한 것이다.

하지만 공격 중지를 외칠 수는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만들어내야 했다.

그러려면 거인 기사들은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저자에게 달려들어야 했다.

둘은 거인 기사들의 공격을 막지 않았다.

거인 기사들은 명령을 받은 대로 움직였다.

밧줄을 들고 또는 여분의 그물을 가진 거인 기사들은 찢어진 그물을 밟고 서 있는 가짜 몸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시 학살이 시작될 참이었다.

*

그 질긴 그물을 찢어 버리다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놀란 것은 뱅트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끓는 쇳물에 집어넣어도 다시 튀어나올 것 같군.”

“단순히 힘이 아주 강할 뿐입니다.”

뱅트손의 말에 베르탁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어느 정도 느물거리기까지 했던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감히 황제를 자처한 대귀족에게 대거리를 한다니!

마음의 여유를 잃자 진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베르탁은 멀리서 날뛰는 가짜 몸을 보며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적의 공격이 자신의 목을 날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지금까지의 여유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베르탁이 뱅트손의 조언자가 되기 원했던 것은 여한없이 실험을 하고 싶어서였다.

인간과 다른 아인종 간의 차이를 탐구하고 인간을 발전시키는 것이 그와 그가 속한 학맥의 목표였다.

그러나 사람을 실험체로 쓰는 연구는 일개 단체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규모의 실험이었다.

대귀족의 후원이 아니라면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하지만 그는 후원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3백 년 전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선제후의 후원이었다.

편집증적인 집착에 빠져 있던 선제후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물론, 아주 강한 존재를 잡아 죽이겠다는 뱅트손의 계획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조언을 하며 협력해 주었다.

그러나 제국을 막후에서 지배하고 선제후들조차 손끝으로 움직였다는 존재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한 신비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신비가 존재했다.

아마, 그런 신비 중 사람의 마음을 조정하거나, 착각하게 만드는 신비로 선제후들을 속여 넘긴 자가 있었으리라.

베르탁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선제후 중 그자와 손을 잡고 적극적으로 다른 선제후들을 사기 친 자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일 개인이 8명의 선제후 전부를 상대해서 제압하다니!

그들의 군대를!

그런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를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설사 그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해도 3백 년 전의 이야기였다.

이미 죽어서 흙이 되어버렸을 사람의 망령에 사로잡혀 이상한 짓을 하는 뱅트손은 그냥 괜찮은 호구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몇천 명의 병사를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르탁과 그의 학맥은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인간의 피에 숨어있는 가능성을 추구해 왔다.

심지어 아인종조차 인간의 피에 숨어 있던 가능성이 발현된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 그들의 학설이었다.

그들의 학설에 따른 실험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실험 중간에 나온 결과가 거인 기사일 뿐이었다.

그런데 거인 기사로 저자를 상대할 수 있을까?.

단순히 주먹으로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거인 기사를 쳐 죽이는 저런 괴물을?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였다.

베르탁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학자에 지나지 않은 그에게는 너무 강렬한 경험이었다.

뱅트손은 그물을 찢고 나온 적이 거인 기사들을 상대로 무쌍을 찍고 있는 모습을 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발리스타를 운용하는 자들에게 명령했다.

“저놈을 쏴 버려!”

“지금 쏘면 기사들이 말려듭니다. 폐하.”

“애초에 그러려고 준비했던 거인 기사들이다. 그들 역시 알고 있는 부분이고. 그러니까 쏴.”

“그렇다면 명하신 대로.”

발리스타 부대를 통솔하는 귀족은 뱅트손의 명령에 더 이상 거부하지 못하고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뱅트손이 수레에 싣거나 매달아서 날라온 발리스타는 일반적인 발리스타가 아니었다.

그 존재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한 무기들 중 하나였다.

활줄의 장력은 일반적인 경우의 3배가 넘었고, 볼트 역시 금속으로 된 짧은 화살을 썼다.

100미터 밖의 판금 갑옷이라도 뚫어버릴 정도니까 파괴력은 확실했다.

대신 장전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금속제의 전용 화살을 별도로 구비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

그러나 이런 단점은 상대해야 할 적이 단 한 명이라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것과 달리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한 번 또는 두 번의 발사만으로도 충분할 테니까.

뱅트손의 명령에 따라 20여 대에 달하는 발리스타는 일제히 도르래를 돌려서 활줄을 걸었다.

그리고 화살을 쏘았다.

금속제의 짧은 화살이 날아가는 모습은 너무 빨라서 보이지도 않았다.

일반적인 화살보다 길이가 짧아서 더욱 그랬다.

미리 알고 막으려고 해도 불가능해 보이는 공격이었다.

화살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았다.

공격하기 위해 가짜 몸을 둘러싸고 있었던 거인 기사들이 가장 먼저 화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화살은 갑옷을 뚫고 반대편 갑옷의 안쪽에 박힐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불운한 거인 기사들 몇이 그대로 무너졌다.

유감스럽지만 적을 죽이려는 과정에서 벌어진 부수적인 피해였다.

별로 의미있는 죽음이 아니라서 미안할 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발리스타 사수들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거인 기사들이 무너지는 순간, 그들을 지나 여러 발의 화살이 가짜 몸을 향해 날아갔다.

단숨에 거인 기사들을 죽여버린 화살이었다.

그런 화살이 한두 발도 아니고 10여 발이 노리고 날아간 것이다.

아무리 실력있는 기사라고 하더라도 그런 공격을 막을 수는 없다.

혹, 미리 알고 피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막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게 상식이었다.

그러나 발리스타 사수들은 상식이 무너지는 순간을 목격했다.

마치 무슨 막 같은 것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10여 개의 화살이 동시에 튕겨져 나갔다.

물론 갑옷이나 막 같은 것으로 막은 것은 아니었다.

안 보일 정도로 빠르게 휘두른 팔이나, 손으로 잡아챈 여러 발의 화살을 보면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쳐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발리스타 사수들은 놀랄 겨를도 없이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첫 번째 공격이 실패했으니 어서 두 번째 공격을 해야 했다.

하지만 두 번째 공격도 첫 번째 공격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더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쳐 내는 것이 분명했다.

적은 그 와중에도 접근하는 거인 기사들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먹으로 쳐서 죽여댔다.

뱅트손은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눈으로 보지 않아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아차려서 대응한다면 이런 식일까?

너무 일방적인 전투라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저 자리에 가서 전투를 치러야 하는 병사라면 감탄이 아니라 오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뱅트손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채 겁에 질려 있는 영지군을 둘러보았다.

그럴 만하기는 했다.

거인 기사들까지 일방적으로 죽어나가고 있으니까.

영지군의 숫자가 2천 명이라고 하지만, 전투력으로 따진다면 350명의 거인 기사보다 훨씬 못하다.

지금 저 자리에 병사를 밀어넣는다는 가서 죽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만약 이대로 공격을 명령한다면 앞이 아니라 뒤로 돌격할 것이 뻔했다.

후퇴해야 할까?

뱅트손은 고민에 빠졌다.

스케티와 전투를 벌였을 때는 아직 황제가 되기 전이었다.

그냥 같은 공작끼리의 전투였으니 후퇴를 하더라도 체면을 잃는 정도로 무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황제가 된 이후였다.

단 한 명에게서 패배해서 도망친 황제라는 오명을 뒤집어쓴다면 휘하의 귀족들이 얼마나 이탈할지 예측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승패가 정해진 전투에 뛰어드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후계조차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덜컥 죽기라도 한다면 끝장이었다.

결국 뱅트손은 후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거인 기사들이 적을 잡고 늘어지는 동안 나머지 병력과 함께 도주했다.

그는 이번에도 도망치는 행렬의 가장 선두에 서서 황궁까지 말을 달렸다.

거인 기사들이 전멸했다는 소식은 다음 날 오후가 돼서야 황궁에 전해졌다.

*

에할름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온 것은 뱅트손의 패배가 확정된 후 일주일이 지난 다음이었다.

나는 즉시 에할름이 있는 장소를 향해 출발했다.

그는 지금 스케티의 영역으로 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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