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두려움과 공포로 회복하는 자
상단을 호위하는 용병은 아무래도 전쟁터와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칼밥을 먹으며 살아온 사람들이라서 전문적인 전쟁용병보다야 못하겠지만, 일반적인 병사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다.
상단을 호위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피를 보아야 할 때도 있으니까.
특히, 요즘같이 치안이 무너진 시기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사람의 몸을 칼로 자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들 안다.
그런데 말의 목을 날려 버렸다.
그것도 두 마리의 목을 동시에!
여기 있는 용병들 중 그런 것이 가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사라고 하더라도 자기 키에 육박하는 거대한 칼을 다루는 기사 정도나 가능할까?
길이가 1m도 안 되는 호신용 칼로 저렇게 쉽게 말의 목을 자른다는 것은 눈앞의 사람이 절대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용병들은 잘못 걸렸다는 생각에 고함을 치면서도 연신 상단주가 있는 뒤쪽의 마차를 힐끔거렸다.
과연, 상단주가 경험이 많은 상인이라고 하더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눈치채고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상단주의 옆에는 개인 경호를 맡은 용병이 하나 따라붙어 있었다 .
상단주는 말이 죽어 넘어진 꼴을 보자마자 즉시 고개를 숙였다.
그의 경험상 실력좋은 인성파탄자는 재앙에 가까웠다.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비위를 맞춰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물며 이 땅에서는 불과 얼마 전에 용병의 씨가 마를 정도로 대패를 겪은 전투를 치렀다.
전쟁통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반쯤 미쳐버린 기사가 말썽을 피우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어서 자신만을 위한 경호용병까지 고용한 참이었는데, 소설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미친놈이 튀어나왔으니 최대한 몸을 사려야 했다.
“베르니라는 이름을 가진 상인입니다. 저희가 실수한 점이 있다면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기꺼이 보상 하겠습니다.”
“눈치가 빠른데?”
예상이 맞았다.
역시 일부러 시비를 거는 중이었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베르니 상단주는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용병들은 조용히 입을 닫고 뒤로 물러섰다.
“재미가 없어.”
가짜 몸은 예상대로의 반응이 나오지 않자 짜증을 내며 뒤로 물러선 용병들에게 걸어갔다.
뒤로 물러서 있던 용병들은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무엇인가 무서운 것이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밤의 야영지에서 홀로 맹수와 눈을 마주치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무기로 손이 간 용병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용병들은 그럴 정도의 여유도 없었다.
벌벌 떨리는 몸도 인식하지 못하고 뱀 앞의 개구리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그들은 가짜 몸이 바로 앞에 와서 손을 댈 때까지도 그대로 굳어 있었다.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던 가짜 몸은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왼손에 가장 가까이 있던 용병의 목이 들어오는 순간, 가짜 몸의 입가가 가볍게 휘어졌다.
미소라고 하기에는 드러난 이빨에서 느껴지는 흉폭함이 너무도 거칠었다.
용병의 목을 왼손으로 잡은 가짜 몸은 부드럽게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꽉 힘을 주었다.
똑!
불쾌한 소리였다.
어딘가 어긋나는 소리.
그것은 목이 부러지는 소리였다.
뒤늦게 발버둥을 치던 용병은 터질 것 같은 붉은 얼굴로 혀를 내빼문 채 가짜 몸의 손아귀 아래에서 축 늘어졌다.
그제서야 가짜 몸은 죽은 사람에게는 별 흥미가 없다는 듯 손을 털어버렸다.
즉사한 용병이 땅에 쓰러졌다.
그 순간 용병들은 잠시나마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칼을 빼어들었다.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이상한 분위기는 더 이상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듯했다.
용병들은 단발마적으로 칼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칼은 가짜 몸에 닿지도 못했다.
가짜 몸을 노리고 칼을 휘두르는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용병들은 그냥 무턱대고 휘두를 뿐이었다.
그들은 마치 무서운 것이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버둥을 치는 것처럼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옆에서 보는 그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눈먼 장님이 겁에 질려서 무턱대고 휘두르는 것 같은 칼부림 때문에 자기들끼리 부상을 입고, 그 부상에 놀라서 더 필사적으로 휘두르는 모습이 희극처럼 보였다.
다른 용병들이 모두 굳어서 벌벌 떨고 있었을 때, 칼을 뽑았던 용병은 그 모습을 보자, 즉시 몸을 돌려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도주는 금방 끝나버렸다.
불과 스무 걸음.
그의 목이 날아가기 전까지 그가 도망친 거리였다.
도망치던 용병을 목을 자른 칼이 부메랑처럼 회전하며 가짜 몸의 오른손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는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가짜 몸은 향이 깊은 술이라도 마시는 것 같은 표정으로 용병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칼을 휘둘렀다.
장난치듯 휘두르는 칼에 팔이 떨어지고, 목이 굴러갔다.
운이 나쁜 자는 병신이 되었다가 죽었고, 운이 좋은 자는 곧장 죽었다.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채.
가짜 몸 이외에 더 이상 서 있는 사람이 없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냥 숨 몇 번 들이쉬는 정도의 시간에 불과했다.
“상단주?”
“말씀하십시오.”
상단주인 베르니는 아예 바닥에 엎드린 상태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손을 바닥에 댄 채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있었던 호위용병 역시 같은 자세였다.
“나에 대한 소문이 도는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나으리.”
“역시 그랬군.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만으로도 회복이 되는 거였어. 그렇다면 아주 큰 두려움과 공포가 필요하겠군.”
뱅트손 공작령에는 얼마 전부터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상대가 몇 명이 되었든 상관하지 않고 시비를 걸고 죽여버리는 기사에 대한 소문이었다.
지금까지 베르니는 미쳐버린 기사가 돌아다니며 사고를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이해할 수 없는 학살극을 본 순간 이것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능력이 강할 수록 인간같지 않게 말하고 행동하는 자들.
신비에 접한 자가 벌이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이었다.
자신 역시 몇 명 보기도 하고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었기에 그들이 얼마나 상식에 어긋난 자들인지 알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미친 자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베르니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주어야 할까?
돈이나 물건은 해답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신비에 접한 자들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사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지조차 의문이었다.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베르니라고 합니다. 사치품을 취급하는 작은 상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소문을 퍼뜨려라. 아주 널리, 매우 과장되게.”
“예?”
베르니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며 멍청한 반문을 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다시 땅에 박았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두려워하면 할수록 좋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너 역시 이렇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가짜 몸은 모습을 감췄다.
한참 동안 머리를 박고 있던 베르니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너 역시 이렇게 될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자신의 옆에서 자신처럼 고개를 박고 있었던 호위용병의 머리가 사라진 것이다.
어디로 굴러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베르니는 멍청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으면 싶었다.
그러면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 이외에 살아남은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마차 옆에서 따라오던 말들까지도 모조리 죽어 있었다.
억지로 숨을 쉬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신이 어지럽기만 했다.
짧은 시간동안 그에게 가해진 충격은 그가 견딜 수 있는 한도를 진작에 넘어 버렸다.
특히, 가짜 몸이 그의 앞에서 떠드는 동안 그가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는 그를 거의 죽기 일보직전까지 몰아넣었다.
베르니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일단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행자로 위장한 에할름과 아쉬리프의 기사들이었다.
“이거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만.”
살아남은 자를 찾아서 현장을 뒤지는 아쉬리프의 기사들을 보며 에할름이 중얼거렸다.
가짜 몸을 찾아서 움직이던 그들은 결국 가짜 몸을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부딪치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죽여대니 그 흔적을 놓칠 수가 없었다.
덕분에 가짜 몸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었다.
만약, 가짜 몸이 지나온 지역이 전쟁 때문에 개판이 난 상태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토벌대가 편성되어서 뒤를 추적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
하도 사람을 죽여대니 처음에는 뭔가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짜 몸은 신비에 접한 자들을 일부러 찾아가서 죽이고 있었다.
그것은 가짜 몸에게 죽은 자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아낸 사실이었다.
우연이라기에는 신비에 접한 사람들이 지나치게 높은 비율로 죽었기 때문이다.
에할름은 신비에 접한 자들을 데려오라고 요구했던 볼포토가 떠올랐다.
그의 새로운 고용주는 가짜 몸에게 절대로 가까이 접근하지 말라고 했지만, 볼포토를 떠올린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가짜 몸의 현재 상태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소수의 인원만으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그 결과가 오늘 벌어진 사건의 목격이었다.
그들은 대로에서 멀리 떨어진 산 중턱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그러나 에할름은 이 행운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방임이나 고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멀리서 현장을 살펴보는 중간에 가짜 몸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 먼 거리에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싶었지만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묘한 비웃음과 반가움이 섞인 미소는 분명히 그를 향한 것이었다.
“단주님. 여기 살아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사를 해야 하니까 조심해서 데려가도록 하게.”
에할름은 이제 더 이상 가까이 접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살아남은 사람에게서 증언을 수집하는 것은 계속하겠지만, 가짜 몸에 또다시 접근하는 것은 위험했다.
다음번에는 이번처럼 그냥 보내주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한때 세뇌 비슷한 것을 당했다는 사실을 되새김질했다.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윌리엄 백작이 와서 같이 간다면 모를까 혼자서는 절대 안 된다고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그리고 제정신일 때 그의 동지들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말이지.”
“예. 단주님.”
“내가 다시 가짜 몸에게 가까이 접근하라는 명령을 내리면 나를 제압한 후 입을 막고, 눈도 가리고, 꽁꽁 묶어서 어디 창고에라도 집어넣도록 하게. 그 이후에는 윌리엄 백작의 명령을 기다리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그의 동료들 역시 에할름이 걱정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에할름은 한결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짜 몸이 어디로 갈지 궁금하기만 했다.
이대로 길을 따라 계속 간다면 뱅트손의 공작성에 도달하게 된다.
에할름은 다시 가까이 추적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