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아크후의 마지막
아크후는 글렌 공작에게 고용되었던 암살자 집단이었다.
황궁 도서관의 기록에 의하면 3대 암살자 집단 중의 하나이며, 이런저런 단체와 비밀결사들이 널려있는 제국 기준으로도 제법 지명도가 있는 전국구 단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크후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남은 암살자의 전부일 정도로 몰락했다.
내가 보기에는 전적으로 자업자득이다.
대귀족에게 통째로 장기고용을 당한 암살단이라니!
그것도 글렌 공작 같은 냉혈한에게?
글렌 공작에게 통째로 고용당해서 양지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근거지가 추적당하고 암살자의 신원이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실제로 글렌 공작은 아크후의 암살자 마을까지 다 파악하고 있었다.
아마, 아크후의 우두머리는 의뢰와 보수를 깔끔하게 교환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대귀족을 상대로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될 리가.
진정한 대귀족이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쩌면 아크후는 오랫동안 큰 건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제국의 정치는 3백 년이나 안정적이었으니까.
그 정도라면 지배계층의 무서움을 경험한 선대들이 남긴 교훈 따위는 흔적도 남지 않고 휘발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대귀족에 대한 두려움을 잊은 암살조직이 어떤 길을 걸었을지는 뻔했다.
아크후는 돈 많은 상인이나 중소귀족이나 상대하면서 간이 점점 커졌을 것이다.
지역에서 힘깨나 쓰는 자라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으니, 제국의 지배계층이라고 하더라도 별것 아니라는 착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착각이다.
대귀족의 힘은 막강한 인적, 물적 자원에서 나온다.
어려서부터 교육받은 기사와 세습 영지병사들이 쏟아져 나와서 대귀족의 힘이 되어준다.
그러나 아크후는 마을 하나에 불과했다.
그런 협소한 인재풀에서 길러낸 암살자로 대귀족 사이의 분쟁에 함부로 뛰어든 것이다.
양지에 드러난 암살자는 기사만 못하다는 속설이 떠올랐다.
아마 이 속설은 암살자를 상대해본 기사가 처음 언급했을 것이다.
암살자라고 하더라도 어둠 속에서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기습해오지만 않는다면 상대할만했을 테니까.
내가 방금 죽인 특별한 종류의 암살자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내가 복도로 나와서 마주친 아크후의 암살자들이 바로 속설 속의 암살자와 같은 자들이었다.
공개된 장소에서 정면으로 싸운다면 기사보다 못한 자들.
내가 손을 쓸 것도 없었다.
아쉬리프의 기사들만으로도 충분했다.
“저 앞의 시종 두 명.”
내 손가락이 복도에서 대기하던 두 명의 시종을 가리켰다.
아쉬리프의 기사들은 찰나의 망설임조차 없이 그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미니맵의 붉은 점 2개가 사라졌다.
나는 바로 다음 붉은 점을 향해 이동했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으로 죽을 자를 가리켰다.
“왼쪽의 기사.”
이번에는 암살자의 반응이 빨랐다.
과연 기사로 위장하고 있는 암살자다운 실력이었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는 전투는 일대일의 결투가 아니다.
저택의 출입문을 지키고 있던 암살자는 갑자기 날아온 일격을 받아냈지만, 뒤이어 찔러온 창은 피하지 못했다.
고통으로 굳어버린 암살자의 목을 쳐서 끝내버린 것은 고리슨 남작, 에링거였다.
그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죽어버린 암살자를 노려보았다.
“젠장! 시종들도, 기사도 안면이 없는 자들입니다. 시종장의 소개로 얼마 전에 들어온 자들인데······”
에링거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도저히 분기를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시종장은 고리슨 남작의 일가붙이였다.
직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일족인 것이다.
에링거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피가 흐르는 자로 인해 가족이 죽었다는 사실에 이성을 잃을 정도였다.
믿었던 자의 배신은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암살자를 죽이는 것으로 풀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 아쉬리프의 기사들 못지 않게 날뛰었다.
암살자 사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누구를 죽여야 할지 미니맵에 붉은 점으로 나타나는데 오래 끌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에링거의 얼굴은 놀라움과 두려움이 교차되며 시시각각 다채롭게 변했다.
분노로 가득 차 있던 마음에 이성이 돌아오면서 내가 죽여야 할 자들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칼마르 백작가를 위해 일하는지는 상상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 작은 남작령에도 최소한 5명의 첩자가 있었으니 그의 상상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지역의 토착 귀족인 에링거가 칼마르의 귀족과 유력자들에게 이번 일을 널리 소문 내주기를 기대하며 저택 내부에 남아있던 마지막 붉은 점을 향해 움직였다.
응접실이었다.
그곳은 가장 처음에 죽은 아크후의 암살자, 아니카의 시체가 있는 곳이었다.
응접실에 있던 자는 평범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그는 아니카의 눈을 감겨주고 있었다.
“냉혹한 암살자에 어울리지 않는 감성이군.”
“나 역시 인간이니까.”
“암살자가 인간이라니.”
“귀족이 인간인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내 비웃음에 대한 답은 의외로 정치적인 함의를 담은 반문이었다.
간이 부어서 겁도 없이 대귀족의 손을 잡은 멍청이인 줄 알았는데 나름대로의 꿍꿍이를 가지고 있었던 자였나?
나는 그에 대한 평가를 한단계 위로 올렸다.
이제 곧 죽을 자에 대한 평가이기는 했지만.
“죽을 자리를 찾고 있었던 건가?”
“복수를 하지 못한 암살단은 인정받지 못하지.”
“그렇다면 아크후는 앞으로도 인정받지 못하겠군.”
내 도발에 비로소 중년의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응접실의 창문과 출입구를 막아서는 아쉬리프의 기사들을 보더니 두 눈을 번득였다.
“설마 아쉬리프?”
“눈이 좋군. 아크후의 수장. 어떻게 알았지?”
“암살자처럼 걷는 기사는 아쉬리프밖에 없으니까. 그렇군! 칼마르는 아쉬리프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거로군!”
나는 일부러 그의 오해를 교정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입을 다물고 그가 떠드는 것을 듣기만 했다.
그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다.
“결국 암살자들끼리의 싸움이었잖아! 이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글렌 공작의 손을 잡는 것이 아니었어. 암살자들끼리의 싸움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낸 쪽이 불리한 것은 당연하니까. 3백년 만에 다시 찾아온 혼란이라서 다시 세력을 일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아쉬리프가 선수를 치다니!”
태도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의식이 강한 것이었나?
암살단이 야망을 불태우면 더 이상 암살단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
음지에 숨어있지 않을 테니까.
결국, 저자의 선택이 아크후를 죽인 것이다.
“나를 놓아줄 수 있나? 대신 아크후가 가진 모든 것을 넘겨주겠다.”
야망이 강한 자는 포기하지 않는 법이다.
중년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회를 다시 얻어낼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변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시 지하로 숨어든 아크후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니. 그것은 안 되겠군. 나는 내게 원한을 가진 자를 놓아주는 성격은 아니라서 말이지.”
거절 의사를 명확히 한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비도를 던지기 시작했다.
조직을 잃고 구차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때는 황제조차 죽였다는 암살단의 수장이다.
여유를 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게다가 이곳은 신비가 있는 세상이고, 기적이 존재하는 곳이다.
나는 그에게 가까이 접근하고 싶지도 않았다.
12개의 비도, 그리고 다시 12개의 비도를 연달아 중년인을 향해 던졌다.
창을 들이대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이런 거리에서 비도를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모든 비도를 피한다는 것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연달아 날아가는 비도는 한 줄로 팽팽하게 당겨진 줄처럼 보였다.
비도의 목표는 얼굴과 상체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불구하고 중년인은 현란한 손놀림으로 비도를 쳐냈다.
물통에 물을 하나 가득 담아서 쏟아부어도 막아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현란하고 빠른 손놀림이었다.
그러나 비도는 물이 아니고, 중년인의 손도 강철이 아니었다.
처음 몇 개의 비도는 쳐냈지만, 연이어 날아가는 비도는 중년인의 손에 상처를 내고, 팔에서 피가 흐르게 했다.
그리고 피하지 못한 비도를 가슴으로 받아내야 했을 때가 결정적이었다.
잠깐 멈칫한 순간.
마지막 6개의 비도가 연달아 목과 얼굴에 박혀버렸다.
중년인은 그대로 뒤로 넘어진 후 숨을 멈췄다.
그런데, 이것 참.
미니맵의 붉은 점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자는 아직 죽은 것이 아니다.
심장이 멈추고, 숨이 멎었지만 말이다.
아니, 이 자의 부하들은 죽음 앞에서도 제법 용감했던 것 같았는데?
그런데 수장이라는 놈은 가사상태를 이용해서 생사를 걸고 도박을 해?
어이가 없어진 나는 칼을 뽑아서 그의 목을 향해 내리쳤다.
머리와 몸이 분리되고,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제서야 붉은 점이 사라졌다.
이것으로 아크후도 끝났다.
*
가짜 몸이 움직이는 거리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지슬리 공작령이 있는 북부에서 칼마르 백작령이 있는 남부까지 왔다가, 이번에는 제국 중부에 있는 뱅트손의 영역을 절반 넘게 가로 지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조만간 스케티의 영역에 도달할 것은 기정 사실이었다.
그리고 어디까지 갈지도 알 수 없었다.
아예 제국 서부 프리시오의 영역까지 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면 변경백들의 영지를 지나 제국 서쪽 경계 너머에 있는 왕국들로 갈지도 몰랐다.
아니면 아예 바다를 건너 다른 대록으로 가는 것도 가능했다.
지금으로서는 가짜 몸의 목표도 목적지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에할름은 나름대로 추측하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가짜 몸이 지나간 곳을 따라가면서 벌어진 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정보 덕분이었다.
종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가짜 몸의 행동이 사실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일종의 탐문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하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물론 모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가짜 몸이 벌이는 사건의 상당부분은 그냥 자기 멋대로 굴다가 벌어진 사고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벌어진 사건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이놈이! 이게 무슨 짓이냐!”
영지와 영지 사이를 잇는 대로 위에서 가짜 몸과 상단 하나가 대치하는 중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죽어 넘어진 말 두 마리가 있었다.
그 말들이 끌던 짐마차는 도로 한가운데서 멈추어 버렸다.
일반적으로 마차가 다가오면 사람은 길을 비켜주기 마련이다.
비켜주지 않는다면 마차를 끄는 말에 밟히거나 마차에 치일 테니까.
아니면, 상대가 부상을 입을까 저어하여 마차가 알아서 멈추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의 앞을 막았다고, 다짜고짜 칼을 휘둘러서 말의 목을 베어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두 마리를 동시에 목을 베어 버리다니!
전쟁터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다.
고함을 지르며 달려온 상단의 용병들이 화를 내고는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선뜻 칼을 꺼내 들지 않은 것은 그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