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91화 (191/248)

191. 내 주변사람들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

나는 에할름이 내게 보낸 문서를 열고 내용을 살펴보았다.

몇 줄의 안부인사와 그가 돌아다니고 있는 지역에 대한 정보 보고가 내용의 절반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내가 그에게 부여한 임무에 대한 보고서였다.

건조하게 필요한 내용만 기록하는 일반적인 첩보 문서와 달리 그가 보낸 보고서에는 사적인 감정이 듬뿍 배어 있었다.

볼포토가 사라진 후 그에게 향했던 충성이 내게로 방향을 바꾼 것 같았다.

리네아는 에할름의 그러한 태도가 흥미로웠던 모양이었다.

“첩보 보고서라기보다는 근황을 전하는 안부편지네요. 그 문서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에할름을 당신의 오래되고 친밀한 가신이라고 할 거예요.”

“아무래도 볼포토라는 자가 에할름의 정신을 건드리기는 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그 반작용이겠지요.”

“무서운 일이네요. 에할름은 황궁 도서관의 관장이었는데. 그런 사람조차 정신에 영향을 받다니. 볼포토같은 자가 또 있으면 정말 큰일 아닌가요?”

“볼포토는 죽었습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문제는 사라져버렸다는 나머지 절반이겠지요. 그리고 그 절반도 추격을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짜 몸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 폴포토보다 못한 자겠지요. 볼포토처럼 죽일 수 있을 겁니다.”

죽일 수는 있다.

그러나 죽이는 것으로 끝은 곤란했다.

볼포트에게서처럼 그에게서도 들을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무엇인가를 내게 줄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둘로 나뉘어서 멋대로 사라졌다는 가짜 몸이 무엇인지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사람이 무슨 플라나리아도 아니고.

반으로 쪼갰더니 각각 자라서 둘이 되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도 볼포토 같은 자가 하나 더 돌아다니는 것은 확실한 모양이었다.

에할름은 최근에 발견한 흔적에 대해 언급하며 목표를 조만간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목표의 행동이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놓칠 수가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우리가 가짜 몸이라고 부르는 목표는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귀족처럼 굴면서 사방에 민폐를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두 번은 꼭 충돌이 일어나고, 사람이 죽어나갔다.

만약, 이 세상이 현대 지구처럼 매스미디어가 발달한 세상이었다면 에할름이 아니더라도 진작에 SWAT가 출동했을 만한 짓을 저지르며 활보하는 중인 것이다.

에할름은 조만간 가짜 몸에 대한 관찰 보고서를 작성해서 보내겠다는 내용을 끝으로 보고서를 마쳤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가짜 몸을 잡기 위해 나까지 움직여야 했지만, 현재 에할름이 움직이는 지역이 제국 중부였다.

그곳은 뱅트손과 스케티의 영역이다.

칼마르의 백작이 비공식적으로 돌아다니기에는 아무래도 곤란한 지역인 것이다.

아무래도 일단은 기다려야 할 듯했다.

가짜 몸이 귀족연합자치령의 영역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하다못해 지슬리 공작의 영역에 나타나기만 해도 당장에 달려가서 끝장을 낼 생각이다.

그러면 뭔가 알 수 있는 것이 있겠지.

나는 자신감을 보임으로 불안감을 드러내는 리네아를 달랬다.

요즘 리네아는 전과 달리 묘하게 감정적이었다.

아무래도 리네아의 일을 줄이고 휴식을 늘릴 필요가 있을 듯했다.

그러나 리네아는 자신이 칼마르의 백작이고, 귀족연합자치령의 중심 중의 하나임을 잊지 않고 있었다.

에할름에 대한 일이 마무리되자마자, 그녀는 내게 건넨 귀족연합자치령의 사건사고에 대한 문서 중 하나를 들어올렸다.

내가 그녀의 휴식에 대한 일을 입밖에 꺼내기도 전이었다.

“그게 뭡니까?”

“아무래도 의심이 가는 사고사라서요.”

“사고사?”

“근처에 있는 작은 남작령의 주인과 후계자가 사고로 죽고, 둘째가 새로운 남작이 되었어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계승권을 둘러싼 귀족가 내부의 다툼은 가끔 피를 부르니까.

그래도 그것은 그들 내부의 일일 뿐이다.

우리가 끼어들 문제는 아닐 텐데?

“둘째는 내가 아는 사람이에요. 얼마 전까지 칼마르 시에서 관리로 일하고 있었던 매우 소심한 사람이지요. 그런 일을 저지를 만큼 담이 크지도 않고, 그럴 만한 세력도 없는 자에요. 이 사고가 우연이라면 그의 행운이겠지요. 그런데 남작령의 위치가 칼마르 시에서 상당히 가까워요. 불과 이틀 거리죠.”

리네아가 의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

그녀는 외부 세력이 칼마르의 근처에 자리잡았을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가 집어넣은 사람들의 연락이 모두 끊겼어요. 하녀와 시종, 측근까지 해서 5명 모두가요.”

“역시 누군가가 들어온 모양이군요.”

“사라의 생각도 그래요. 발두르 역시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군요. 나는 영주성에서 이렇게까지 가까운 곳에는 잠시라도 위험요인을 두고 싶지 않아요. 절대로.”

리네아의 표정에 다시 불안감이 어렸다.

확실히 요즘 리네아가 감정적이 된 듯하다.

“리네아. 내가 촉이 좋은 것을 알지요? 단숨에 정리하고 올테니 안심하고 기다려요.”

나는 리네아를 다독이고, 바로 다음 날 사건 해결을 위해 출발했다.

어떤 자들이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이밀었는지 모르겠지만 운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금방 정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내게는 미니맵이 있으니까.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것은 내게 너무도 간단한 일이다.

게다가 독심술도 있다.

말을 나눠보면 이자가 거짓말을 하는지, 숨기는 것이 있는지, 무엇을 숨기려고 하는지 그냥 알 수 있다.

이럴 때면 내가 인간이 맞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상태창은 뭔가 현실과 괴리된 느낌이라서 오히려 감흥이 없고, 독심술은 훈련과 재능으로 비슷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염동력까지?

분명 상태창에는 여전히 인간이라고 나오지만 점점 인간이 아닌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윌리엄 백작 각하. 지금 보이는 저택이 고리슨 남작의 저택입니다.”

나는 귀족의 문장과 가계를 기록하는 문장관과 동행한 참이었다.

그는 이동하는 중간중간 고리슨 남작의 가계뿐 아니라 주변 귀족들의 가계와 전통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아무래도 귀족가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던 나를 위해 일부러 속성 과외를 계획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고리슨 남작이 규모는 작지만 이 지역의 토착 가문이고, 칼마르 백작가와도 연관이 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칼마르 백작가처럼 손이 귀해서 가까운 친척이 얼마 없다는 사실도 말이다.

누군가가 칼마르 백작가의 내부에 접근하고 싶다면 정말 알맞은 목표겠구나 싶었다.

나는 평소 같이 다니던 호위 기사 2명 이외에도 아쉬리프의 기사 3명을 대동한 채 고리슨 남작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어딘지 주눅이 든 것 같은 모습의 고리슨 남작이 나를 맞이했다.

아니, 아직은 고리슨 남작이 아니다.

아직 정식으로 작위를 계승한 것은 아니니까.

“고리슨 남작가의 에링거입니다.”

“칼마르 백작가의 윌리엄일세. 남작가의 일에 애석함을 표하네.”

이미 장례식이 끝난 후였고, 칼마르 백작가에서도 사람을 보내서 조의를 표했다고 한다.

그래도 칼마르의 백작이 직접 와서 다시 조의를 표한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칼마르 백작가에서 새로운 고리슨 남작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대놓고 알리는 것이라서 승계 과정 중의 잡음을 없앨 수가 있기 때문이다.

에링거 역시 그런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나를 보고도 여전히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걱정을 짊어진 자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와 사교적인 대화를 나누며 미니맵을 펼쳤다.

다행히 에링거는 붉은 점이 아니었다.

만약 에링거가 붉은 점이었다면 고리슨 남작가의 직계가 끊어지는 것이라서 내가 좀 저어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저택에서 보이는 붉은 점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10개는 되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나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가 10명이나 되는 것이다.

이 좁은 저택에서 말이다.

고리슨 남작령은 일반적인 남작령과 달리 아주 작다.

몇 개의 마을과 산 두 개가 전부였다.

당연하겠지만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과 사병 역시 얼마 되지 않는다.

저택의 고용인들은 모두 합쳐서 불과 30명 남짓.

그것도 경비병을 포함한 숫자였다.

그런데 1/3이 적이라니.

고리슨 남작과 큰아들이 사고로 죽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아마, 이대로 내버려뒀으면 에링거 역시 그의 선친과 형을 따라가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런데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건가? 고리슨 남작?”

“아닙니다. 그냥 피곤해서.”

“집안에서 부리는 사람들이 자꾸 사고로 죽어나가서 불안한 건가?”

“예? 아니, 어떻게!”

에링거는 대번에 파랗게 질려버렸다.

반응을 보니 협박을 당하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그냥 공포에 질려 있는 상태인 듯 했다.

나는 앞에 놓여 있는 찻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차의 향기가 조용하게 퍼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에링거에서 시선을 옮기며 찻잔을 들었다.

“자네 생각대로 그거 사고가 아니야. 살인이지.”

“설마!”

에링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 차향을 음미했다.

“설마?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칼마르에서 손을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은 말해 두지.”

“그렇다면 선친과 형님에게 일어난 사고도 사고가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중일세. 그런데, 차맛이 화끈하군. 전에 마셔본 맛이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칼을 뽑아서 오른쪽 공간을 향해 휘둘렀다.

피가 튀었다.

그리고 마치 허공에서 튀어나오듯이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어깨에서 아랫배까지 베어버린 내 일격에 피를 흘리며 비틀거렸다.

안면은 없지만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내가 과거에 먹었던 독의 맛이 같았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존재감을 숨기는 능력도 같았다.

나는 그녀의 동료들이 그녀를 찾을 때 부르던 이름을 불렀다.

“아니카.”

내가 이름을 부르자 비틀거리던 여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반응하는 모습을 보니까 맞는 모양이군. 아크후의 아니카. 아크후의 암살자들이 몇 명 살아남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다들 여기에 모여 있었군.”

3D로 변한 미니맵은 과거의 미니맵이 아니었다.

존재감을 숨긴 암살자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던 미니맵은 전보다 더 강력해졌다.

존재감을 숨긴 암살자 따위는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았다.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암살자도 표시해 줄 정도였다 .

내가 에링거의 앞에 앉았을 때 미니맵 상에서 붉은 점이 내 옆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눈치껏 옆을 살펴보았지만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자신의 존재감을 지우고 멋대로 활보하던 암살자가 떠올랐다.

그제서야 나는 존재감을 숨긴 암살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가 태연하게 독약을 내 잔에 붓는 것도 말이다.

인식의 밖에서 몸을 숨기던 암살자는 전과 달리 내가 인식을 한 순간 더이상 내게서 몸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주저앉은 채 피로 웅덩이를 만들고 있는 암살자를 향해 다시 칼을 휘둘렀다.

이로써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를 제거한 것이다.

이제 남아있는 작은 위험까지 제거할 차례였다.

“고리슨 남작. 복수를 할 생각이 있다면 칼을 들게. 그리고 나를 따라오도록.”

내 호위 기사와 아쉬리프의 기사들은 이미 칼을 뽑고 내 주위를 둘러싼 후였다.

나는 그들과 함께 응접실을 나왔다.

붉은 점들은 아직 저택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