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90화 (190/248)
  • 190. 전투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개인

    제국의 테두리 안에 있는 자들을 다독이면서 함께 갈지, 아니면 독자 노선을 걸을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닥친 것이다.

    프리시오 공작은 결단을 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의 가신들의 의견을 구했다.

    “외국과의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웨이트 경의 생각은 알겠다. 그렇다면 그와 다른 의견을 가진 자가 있는가?”

    “공작 전하의 의향에 따를 뿐입니다.”

    “저희들의 충성심을 믿어주십시오.”

    프리시오 공작의 질문에 대한 답은 열렬한 충성 서약이었다.

    측근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충성심이 최고라고 주장했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이렇게 한 방향으로 모두의 생각이 움직인다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입을 열기 어렵다.

    프리시오 공작은 돌아가는 분위기를 금방 알아챘다.

    그리고 자신의 실책도 깨달았다.

    그동안의 정책 방향이 너무 일방적이었던 것이다.

    가신들이 결혼동맹을 건의했을 때, 프리시오 공작은 기다렸다는 듯이 결혼동맹을 받아들였다.

    진행 속도도 대귀족의 결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지금도 외국의 사절단이 결혼동맹을 명분으로 들어와 있고, 공작령에서 자유롭게 활동 중이다.

    측근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프리시오 공작의 결단은 이미 내려진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만약 프리시오 공작이 조금이라도 결혼동맹에 대해 거부감을 보였다면 모를까, 이런 모습을 보고도 그의 진심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다면 이 자리에 앉아 있지도 못한다.

    그러니 측근들이 느끼기에는 프리시오 공작이 지금에 와서야 다른 의견이 있는지 묻는 것은 진짜 다른 의견이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니었다.

    변경백들의 반발 때문에 체면을 상한 프리시오 공작이 조금이라도 면피를 하려는 얕은 수작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체면이 상한 프리시오 공작을 위한 심기경호에 힘쓰는 것이 최고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밖에.

    그 결과가 측근들의 열렬한 충성고백이었던 것이다.

    프리시오 공작은 자신이 제국의 유지에 미련이 많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측근들조차 진작에 알아챈 것을 이렇게 뒤늦게 깨닫다니.

    어쩌면 프리시오 공작이야말로 독자 노선을 걷자는 결정에 가장 마지막까지 저항한 자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미련은 미련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지금까지 진행해온 정책의 방향성을 틀어 버릴 수는 없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자신의 입밖에 낸 말조차 뒤집어 엎는 믿을 수 없는 자가 될 뿐이다.

    프리시오 공작은 결혼동맹을 추진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내렸던 결단을 명백히 하기로 결심했다.

    “경들에게 다른 의견이 없다면 우리의 경계 서편에 있는 왕국들과의 결혼 동맹을 더 빠르게 진행하는 것으로 하겠소. 그리고 이에 대해 반발하는 변경백들은 설득하고 회유하도록 합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반발한다면 토벌도 가능하다고 생각해 둡시다.”

    “남해로 떠난 원정군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남해의 해상 교역망을 장악하는 것은 미래를 위해 중요한 일이오. 결과를 내기 전까지는 불러올 생각이 없으니 그대로 두도록 합시다. 우리에게 병력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프리시오 공작은 변경백들이 생각보다 더 옹고집쟁이들이고, 그들의 병사들도 예상보다 더 정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잘한 전투가 끊이지 않고 벌어졌고, 대부분 패배했다.

    이런 식으로 토벌을 질질 끌다가는 언제 황제의 관을 쓸 수 있을지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정예병이 절실했던 프리시오 공작은 남해에 원정을 나가있던 병력까지 불러들이는 강수를 써야 했다.

    타르바 왕국이 접근한 것은 그때였다.

    결혼 동맹의 대상자들 중 하나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남해로 나갔던 병력의 손해가 크다고 들었습니다.”

    타르바 왕국의 왕제인 쿠사는 단숨에 프리시오 공작의 아픈 곳을 찔렀다.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프리시오 공작은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뭐라고 이야기를 해도 구차해질 뿐이었다.

    “다른 자들은 앞을 다투어 자신이 황제임을 주장하며 대관식을 열던데 정작 제 앞에 계신 분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군요.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셨는데, 정작 대관식에 대한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대관식은 도대체 언제 열리는 겁니까?”

    이것은 도발이었다.

    프리시오 공작은 자칭 황제였고,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자들과 분쟁 중이었다.

    바로 코앞에서 반기를 든 자들조차 토벌하지 못하는 황제라니!

    그런 모자란 황제에게 대관식은 무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관식을 열지도 못하는 황제라고 대놓고 비아냥대는 것은 모욕적이었다.

    이것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는 짓이다.

    동맹이라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프리시오 공작은 초인적인 인내로 쿠사의 도발을 참아냈다.

    사방이 적뿐인데 기존의 동맹까지 새로운 적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시오. 쿠사 백작.”

    “역시 프리시오 폐하께서는 대범하시군요. 그런 면 때문에 저의 형왕께서 결혼동맹을 결심하셨지요.”

    “내 부족한 아들에게 왕녀를 내어주신 것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소.”

    “프리시오 폐하께서는 저의 형왕께 감사할 일이 더 생기실 것 같습니다.”

    프리시오는 쿠사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감사할 일이라니?

    원군이라도 파견하겠다는 것일까?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의논이 끝난 후였다.

    변경백들을 토벌하기 위한 원군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측근들의 결론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주변을 평정하고 대관식을 치른 후라면 모를까 처음부터 주변 왕국의 힘을 빌리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프리시오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전통적으로 제국에 비해 열등하다고 생각해 온 주변 왕국의 도움을 받는다면 제국의 진정한 황제가 되겠다는 자신의 야망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제국의 귀족 누구도 자신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이미 말했을 텐데? 원군은 받지 않소. 용병으로 위장해서 지원하는 것도 안돼오. 아직은 명분이 중요한 시기라는 점을 명심하시오. 주변 왕국의 힘을 빌려서 변경백들을 토벌한다면 다른 지역의 귀족들이 용납하지 않을 거요.”

    “알고 있습니다. 폐하의 사절이 형왕께 제국의 사정을 설명하는 자리에 저도 있었으니까요.”

    프리시오는 느물대는 쿠사의 태도에 불안감을 느꼈다.

    쿠사는 원래 이런 자가 아니었다.

    왕제라고 하지만 사절단의 대표로 올 정도로 외교에도 능한 자였다.

    그런데 상대방에게 모욕을 가한다?

    외교에 능한 자가?

    이것은 무엇인가 의도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모욕을 당했음에도 제대로 화를 내지도 못하는 현재의 처지를 통감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

    그리고 난 후에 도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리시오는 쿠사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감사할 일에 고개를 돌리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오. 감사할 일이 무엇인지 말을 해 주시오. 쿠사 백작.”

    “용병입니다.”

    “용병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소!”

    주변의 왕국들은 언제나 제국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제국의 부와 문화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제국의 공작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무리한 짓을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자들과 동맹을 맺고 미래를 함께 하기로 결정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래도 가끔은 그들의 태도가 도를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랬다.

    용병으로 위장한 지원군이라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음에도 또 용병을 말하는 의도는 뻔했다.

    프리시오 공작의 세력을 제한해서 결국은 자신들의 손에 넣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프리시오 공작은 진심으로 화를 내려고 했다.

    그때 쿠사의 말이 그를 막았다.

    “단 한 명. 한 명만을 보낼 겁니다.”

    “무슨 의미요?”

    “글자 그대로입니다. 단 한 명의 용병을 보내겠습니다. 그가 전투의 판도를 바꿀 것입니다.”

    프리시오는 쿠사의 말에 자신의 함대에서 활약했던 마법사를 떠올렸다.

    바람을 다루는 신비에 접했던 여자 마법사.

    그녀의 능력은 함대 전부와 맞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 명이 타는 커다란 함선을 마치 손안에 있는 공기돌처럼 움직였다.

    남해에서 그의 원정군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능력 덕분이었다.

    그녀가 전사하자마자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그의 함대가 그것을 증명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싶군.”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그 용병은 프리시오 폐하의 모병에 응할 예정입니다. 당연하겠지만 왕국과의 연결고리는 없을 겁니다. 순수한 프리시오 폐하의 병사인 것이지요.”

    바람의 신비를 접한 여인을 잃은 것은 그녀의 실력을 너무 늦게 알았기 때문이었다.

    원정 중간에 알게 되어서 제대로 된 경호기사도 붙여주지 못했다.

    만약, 처음부터 그녀의 진실된 실력을 알았다면 자신의 경호기사라도 파견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세 개의 섬나라는 진작에 점령하고, 남해의 해상 교역망도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또 있다고?

    이번에는 전처럼 허무하게 잃는 일은 없어야 했다.

    *

    제국 남부에서 동부에 이르는 해상 물류 교역망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국의 내전 때문에 전보다는 활력이 떨어지고 해적도 종종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프리시오 공작군이 날뛸 때처럼 엉망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럴 만한 세력이 없으니까.

    적어도 당분간은.

    덕분에 나는 잠깐의 육지멀미를 거친 후 육상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휴식 따위는 없었다.

    농사나 짓는 시골 백작령을 통치하려고 해도 웬만한 상인보다도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상업을 중심으로 하는 백작령이라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이 몰려온다.

    집단으로 가신을 두고 행정조직을 굴려야 정상적으로 영지가 돌아갈 정도다.

    그런데 칼마르의 백작은 거기에 더해서 귀족연합자치령에 대한 일도 살펴야 한다.

    서로 간에 수평적인 조직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몇 개의 중심이 형성되고, 그에 따른 이해관계가 얽히는 것이 정상이다

    칼마르 역시 기존에 영향을 끼치던 지역 이외에도 여러 곳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이었다.

    특히, 과거에 막시밀리안 공작의 세력권에 속했던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강해서 그곳의 사람들 중에는 우리를 향해 칼마르 공작이라고 부르는 자도 있을 정도다.

    내가 없는 동안은 리네아가 담당했지만, 내가 돌아온 이상 리네아의 일을 분담해야 했다.

    특히, 무력을 동원해야 하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동안 살짝 살이 찐 리네아는 내게 귀족연합자치령에서 일어난 사건사고에 대한 문서를 넘겨주었다.

    “영지전이 빈발하는군요.”

    “그들 위에 있던 공작이 사라졌으니까요. 그래도 전투로까지 발전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냥 결투 아니면 전투를 흉내 낸 결투일 뿐이에요.”

    “그 점은 다행입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내버려두면 점점 규모를 키우게 될 겁니다 그러면 나중에 문제가 되겠지요.”

    “규약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당신이 돌아오면 의논을 하러 방문하고 싶다고 했어요.”

    귀족들끼리의 느슨한 연대를 규약으로 지지대를 세워서 보충한다라.

    당연한 수순이기는 하지만 이런 체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황제를 선언하는 자들이 연달아 나오는 상황에서 일말의 불안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역시 허수아비라도 왕이 있어야 할까?

    영국식의 귀족 정치는 어떨까?

    규약이라는 단어를 듣고 심각해진 내게 리네아가 문서를 하나 더 건넸다.

    문서를 보낸 이는 황궁 도서관의 관장이었던 에할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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