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뜻밖의 소문
“칼마르에서 왔다고?”
“우리가 다 이겨놓으니까 뒤늦게 생색을 내러 왔구만.”
“웃기는 놈들이군.”
나는 항구에서 내리는 우리를 향한 적대적인 분위기에 적지않게 놀랬다.
불리하게 돌아가던 전투의 와중에 합류한 지원군을 향한 태도라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프리시오 공작군을 밀어붙여서 사실상의 승리를 이끌어낸 것이 우리였다.
바람을 다루던 프리시오 공작군의 마법사를 죽인 것도 우리였다.
칼마르에서 온 지원군이 아니었으면 지금 근처에서 수군대고 있던 자들의 상당수는 항구가 아니라 바닷속에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칼마르 백작령의 사정상 중간에 철수를 하기는 했었지만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다시 원군을 파견하기까지 했다.
나는 우리가 동맹의 동맹으로 해야 할 일은 충분히 했다고 자부한다.
저들이 우리에게 보이는 태도는 어떻게 보아도 부당했다.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잃을 정도였던 나에게 그나마 안면이 있던 아톨리 왕국의 귀족이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그는 국왕의 조카로 행정 실무에 능통한 자였고, 거래를 조율하기 위해 몇 차례 칼마르 시에 방문한 적도 있었다.
“윌리엄 백작 각하. 역시 공께서 직접 오셨군요.”
“오랜만입니다. 아반자 경.”
바다 건너편 대륙에 있는 왕국들이라고 하니 아주 멀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 중 일부는 칼마르의 거래처이기도 하다.
지금 인사를 온 귀족이 속한 아톨리 왕국과 멀리서 깃발이 보이는 베이코 왕국이 그렇다.
그들은 칼마르가 장악한 해상 물류망을 통해 제국으로 향료와 보석, 각종 나무와 사냥 부산물에 식량까지 다양한 물품을 팔아왔다.
대신 그들은 사치품과 금속제품, 그리고 금속괴를 주로 수입해간다.
그러나 나머지 왕국들은 칼마르와 별 관련이 없는 국가였다.
쿠나, 이니소, 알타스.
모두 이름은 들어봤지만, 딱히 이렇다 할 인연은 없는 사이였다.
척박한 땅이나마 일구어서 농사를 짓고 그럭저럭 자급자족은 하는 나라들이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 대해 가진 정보의 전부였다.
그런데 이렇게 적대적인 시선을 받으니 칼마르에서 저들에게 뭔가 실수한 적이 있나 싶은 정도였다.
그래서 서로 간의 사정을 알만한 사람에게 대놓고 물어보았다.
내 질문에 아반자 경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해주었다.
“그게 저들이 귀족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용병으로 온 셈이라서 그렇습니다. 포를라와 펠트리아에서 돈을 풀어서 불러들인 병력이지요. 문제는 그 돈의 대부분을 왕실에서 가져갔다는 겁니다. 이곳에서 전공을 인정받지 못하면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전공을 인정받는다고요?”
“포를라와 펠트리아에서 전공에 따라 제국 화폐를 풀고 있습니다. 펠트리아에서는 나포하는 적함도 사들이고 있지요. 그리고 만약 펠트리아를 다시 되찾는다면 막대한 황금을 주겠다고 공언까지 했습니다. 돈이 필요한 귀족의 입장에서는 눈이 돌아가는 이야기지요.”
결국, 경쟁자가 나타나서 싫다는 이야기다.
오늘 전투에서도 우리가 거둔 공적이 너무 명백하니까 일단 깎아내려서 자신들의 지분을 늘려보자는 수작임이 분명했다.
아니, 아직 프리시오 공작군을 완전히 물리친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개짓거리를!
팍 찌그러지는 내 얼굴을 보고, 아반자는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그만큼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 가끔 헛소리를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전투에 임해서는 누구보다 용감한 자들입니다. 윌리엄 공께서도 그들이 믿을만한 자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되실 겁니다.”
눈치가 빠른 자였다.
그리고 단순히 아톨리 왕국군의 지원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왕국들의 귀족들에게도 신경을 쓰고 있음이 분명했다.
내 머리에 불이 켜졌다.
왕국이라고는 하지만 제국처럼 고도화된 행정체계를 갖춘 곳들이 아니어서 툭하면 왕실이 바뀌는 불안하기만 한 나라들이라고 들었는데?
정확히 지적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실이 자금을 독차지하는 것?
아니면 다른 왕국의 귀족들까지 챙기려는 타국의 왕족?
왕실이 자금을 독차지 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왕실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으로 설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국의 귀족들을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터에 몰아넣고, 그들이 가져야 할 대가까지 가로챌 정도로 말이다.
쿠나, 이니소, 알타스 모두가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귀족들을 챙기는 아톨리 왕국의 왕족이라니!
느낌이 쎄했다.
이거 전쟁이 한 번쯤은 터질 것 같은 느낌인데.
나는 바다 건너편 왕국들 사이의 사정에 대해 조사할 필요성을 느꼈다.
제국이 분열된 상황에서 바다 건너편에서 통일 국가라도 나오면 골치 아파진다.
우리와 친하느냐 아니냐는 상관없다.
통일된 국가가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분명히 해상 교역망에 손을 뻗을 테니까.
물론 아직은 먼 미래의 문제다.
그래도 그런 문제를 미리미리 걱정하고 준비하라고 통치자가 있는 것이니 곧장 내 의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에 가기 전까지 내 예측과 조사할 내용을 정리하고, 전서구에 편지를 매달아서 날려보냈다.
정치적인 변화는 리네아가 더 정확하게 볼 테니까 그녀의 판단을 기다릴 심산이었다.
그 이후에는 편한 마음으로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해가 지자마자 시작된 연회는 방금 전까지 전투를 치르던 섬나라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성했다.
술과 고기가 무제한으로 풀렸고, 향료를 듬뿍 친 고기 요리들이 보초를 서는 말단 병사에게까지 주어졌다.
귀족들에게는 궁의 시녀들이 달라붙어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기사들에게는 여자 노예가 주어졌다.
대낮처럼 불을 환하게 밝힌 궁에서 귀족과 기사들은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여자를 탐했다.
그 와중에 포를라의 귀족들은 제국 화폐와 손가락 크기의 황금괴를 대접에 담아서 병력을 지휘하는 자들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공개석상에서 나누어주는 막대한 재물에 귀족들까지 눈이 돌아가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뒤늦게 연회에 참석하러 온 내게는 이 모든 것이 포를라의 몸부림으로 보였다.
어차피 점령되면 모든 것을 잃을 테니까 그전에 가지고 있는 것을 모조리 쏟아부어서 자신을 지키겠다는 몸부림 말이다.
아마 조상대대로 모아온 보물을 몽땅 끌어내서 뿌리고 있을 것이다.
나와 내가 거느린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포를라의 왕이 일어나서 내게 달려왔다.
그와는 칼마르로 철수하기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잠깐 얼굴을 본 것이 전부였는데, 마치 오래된 절친을 만난 것처럼 나를 대했다.
“윌리엄 공!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공의 용맹에 오늘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별말씀을. 운이 좋아서 작은 공을 세웠을 뿐입니다. 진짜 큰 전공을 세운 분들은 지원을 오신 여러 나라의 연합군이겠지요.”
내 겸손한 말에 은근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몇몇 귀족들의 긴장이 팍하고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닙니다. 누가 감히 칼마르의 공적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바람을 다루는 마법사를 죽인 것도, 무도한 적의 전열을 무너뜨린 것도 칼마르의 전투함이었습니다. 나는 전공을 잊는 사람이 아닙니다. 포를라를 위해 피를 흘린 사람은 마땅히 그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어느새 그는 내가 아니라 연회에 참석한 모두에게 말하고 있었다.
목소리를 높이는 포를라의 왕을 보는 사람들의 눈빛에 기대와 열망이 서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싶은 순간에 포를라의 국왕은 연극적으로 두 손을 뻗으며 연회장의 안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굳게 잠긴 문과 펠트리아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하자 펠트리아의 기사들이 잠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일단의 기사들이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연회장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상자를 여는 순간 그 안에 제국 화폐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황금이 섞인 오래된 통화로 요즘 만들어지던 질 떨어지는 제국 화폐와는 완전히 다른 품질이었다.
눈썰미 있는 자들은 금방 그 차이를 알아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번에는 펠트리아의 국왕이었다.
그는 상자의 금화와 은화를 양손으로 모아잡아 올리더니 다시 상자로 쏟아 부었다.
차르르하고 떨어지는 통화의 소리가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했다.
“경들의 용맹스러운 분투에 오늘 승리를 할 수 있었소. 이것은 오늘 승리 한 경들에게 주는 내 선물이니 기쁘게 받아주었으면 하오. 그리고 잊지 말아 주시오. 펠트리아를 다시 되찾는다면 지금 경들에게 선물하는 황금의 열 배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는 펠트리아의 귀족들이 은으로 된 대접에 제국 화폐를 퍼서 통째로 안겨주었다.
연회의 분위기는 뜨겁다 못해 펄펄 끓어서 터질 것만 같았다.
이 사람들 정말 뒤가 없네.
나는 지금까지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던 섬나라들의 저력에 대해 반성하는 마음으로 두 단계는 더 높게 쳐 주기로 했다.
지구의 역사를 보면 적군이 수도까지 몰려오는 상황에 처해서도 방어에 나선 자국 군대에게 인색하게 굴다가 왕실의 보물을 끌어안은 채 죽은 왕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들은 섬나라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전력을 기울여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체면이고 나발이고 간에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속옷까지도 기꺼이 벗어주겠다는 태도를 보니 이들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남해의 해상교역망을 중계할 수 있었는지를 단숨에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뿌린 후에도 연회는 계속되었다.
술과 황금과 여자에 취한 분위기는 상상 이상으로 사람들을 무방비로 만들었다.
내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견제하던 왕국의 귀족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실실 웃으며 술잔을 권해왔다.
나는 그들과 술잔을 나누며 그들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일족의 남자 중 절반은 왔지요. 이렇게 황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가 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오고 싶었지만 배가 부족해서 오지 못한 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왕은 허수아비예요. 왕 따위는 엿이나 먹으라지. 왕의 재상이 진짜예요. 그자가 수로를 만들겠다고 황금을 몽땅 가져갔지요. 그래서 부족의 원로들부터 해서 그에게 이를 가는 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그 작자가 보통 무서운 자가 아니거든요.”
“이렇게 용병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특권입니다. 돈을 바치고서라도 나오는 것이 맞습니다. 귀족답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그 빌어먹을 땅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짐승들하고 드잡이질 하는 것도 어느 정도지 정말 지긋지긋합니다.”
듣다 보니 내가 상상하던 것과 다른 부분도 적지 않았다.
만약을 대비한 조사는 필요하겠지만 우선순위가 확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흥미를 잃은 나는 중간에 연회를 떠나서 배로 돌아갔다.
연회 다음날부터는 다시 전투를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쏟아부은 황금과 바람을 다루는 여인의 죽음 때문인지 전의는 엄청났다.
당장이라도 싸우고 싶어서 난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프리시오 공작군의 전면적인 후퇴라는 첩보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프리시오 공작과 변경백들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이 첩보를 따라왔다.
나는 남해의 해상 교역망에 대한 프리시오 공작의 공격이 끝났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