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알지도 못했던 악연
여인이 쓰러지고 용오름이 사라지자 적함에서는 대혼란이 벌어졌다.
선상 백병전을 대비해서 갑판에 모여있던 병사들이 한순간에 얼어붙는 것을 이곳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뜨리는 병사가 있을 정도였다.
다급하게 달려온 시녀와 병사들이 쓰러진 여자를 안쪽 갑판으로 옮기는 동안 우리쪽 전투함 10척은 점점 거리를 좁혀갔다.
그에 따라 병사들의 공포는 점점 커져갔다.
여인을 지키려다가 죽어 넘어진 경호기사 따위를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둥둥둥둥.
북소리는 여전히 다급했다.
방금까지도 용오름에게 추격당하던 선장은 전투함의 속도를 늦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우리는 돛을 올리고, 노잡이들을 재촉하며 최대치의 속도로 달려 나갔다.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우리를 보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슬쩍 뒤로 물러서는 적함의 병사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바다 위에서는 도망칠 곳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도망칠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이다.
그들로서는 예상외의 일격, 그것도 상상도 하지 못했을 정도로 강한 일격을 맞은 셈이니 저런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공성용으로 사용하는 대형 발리스타라고 하더라도 1km를 날아가는 것은 거의 없다.
아니, 그냥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흔들리는 배에서 1km 밖의 사람을 맞춘다?
어떤 무기를 사용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경호기사들까지도 방심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큰방패를 들고 여인의 바로 곁에 있었음에도 내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것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바람을 다루는 여인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뒤늦게 몸을 던지며 비도를 막다가 셋이나 죽었지만, 이것은 죽음으로 면피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다.
이것으로 전투의 승패가 갈렸으니까.
퉁!
어느새 발리스타의 사거리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선수 쪽에 설치한 두 대의 발리스타가 규칙적으로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상당한 정확성을 자랑하는 발리스타는 갑판 위의 적들에게 공포를 더해 주었다.
우연이었겠지만 한 방에 두 명의 병사가 동시에 꿰어서 죽어버리자 선수 쪽에 있던 병사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사기가 떨어졌다면 선상 백병전의 결과도 뻔했다.
멀리 보이는 수송함대가 지원을 나오는 일이 없는 한, 5척의 전투함이 살아나갈 길은 어디에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적함의 지휘관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연달아 폭죽을 쏘아 올리고 깃발을 흔들며 난리를 치더니, 뱃머리를 돌려서 수송함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퇴였다.
그러나 그의 결단은 너무 늦었다.
이제 막 노를 젓기 시작한 전투함과 이미 잔뜩 속도를 올려서 달려오는 전투함의 속도는 차이가 나도 너무 많이 났다.
발리스타의 사정거리에서 확 좁혀져서 화살의 사정거리에 들어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발리스타의 대형화살과 궁병의 불화살이 쉴새없이 날아갔다.
적함에서도 반격이 시작되었지만 우리쪽의 공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적함의 돛은 불에 타고, 저항하던 병사들은 연달아 죽어나갔다.
그리고 돛을 잃은 적함은 속도를 잃었다.
덕분에 얼마 후 우리는 적함을 바로 코앞까지 따라 잡을 수 있었다.
“쇠사슬을 던져!”
“발리스타에 밧줄을 걸어!”
끝에 갈고리가 달린 가는 쇠사슬이 적함을 향해 던져졌다.
밧줄을 맨 화살이 적함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물을 던졌다.
도망치는 데 성공한 적함은 하나도 없었다.
5척 모두를 따라 잡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적을 하나로 묶어내기까지 했다.
하나로 연결되었지만 우리쪽 전투함의 높이가 역시 좀 더 높았다.
추격당하는 동안 계속 화살을 뒤집어 쓰던 적들은 기세가 완전히 죽어서 감히 우리쪽 전투함을 향한 공성은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몸을 숨겼다.
혹시 모습을 드러내는 적병이 있으면 가차없이 화살이 날아갔다.
나는 적함과 우리 사이의 연결이 단단해졌음을 확인하자마자 적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나를 따라 경호기사와 병사들도 일제히 적함으로 뛰어들었다.
우리는 갑판 위에서 쏘아대는 화살의 엄호를 받으며 적병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성벽 아래에서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얼마 안되는 적병과 싸우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적 역시 아직은 저항의지까지 꺾이지는 않았다.
화살이 나를 노리고 연달아 날아왔다.
가장 먼저 적함에 뛰어내렸으니 활을 가진 적병이라면 나를 노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내게 화살은 이제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완갑을 방패삼아 연달아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며 앞으로 달렸다.
활을 쏜 자들까지는 금방이었다.
당황한 궁병이 활을 버리고 칼을 꺼내려고 했지만 내 창이 먼저 그의 배를 찔렀다.
그리고 칼을 뽑아들 틈도 없어서 손에 쥐고 있던 화살을 내게 내리찍으려던 병사의 얼굴에도 주먹으로 일격을 날렸다.
손가락과 손등이 쇠로 덮여 있기에 내 일격은 둔기로 맞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병사는 이빨을 허공에 떨구며 제자리에서 한바퀴 돌아서 떨어지는 묘기를 보여줬다.
순식간에 두 명의 병사를 처리한 나는 쓰러진 여인이 운반된 곳을 향해 질주했다.
그곳은 갑판 뒤쪽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였다.
그리고 그곳에 적병사들이 몰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의 20명에 달하는 적병사들이 화살을 피하기 위해 간판 위에 세워진 구조물 뒤에 숨어 있었다.
공포에 질려 있는 그들의 눈을 보니 전투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믿었던 마법사가 쓰러지고, 일방적으로 화살을 뒤집어쓰다 보니까 전투할 의지 자체를 상실한 것이다.
용기있는 자들은 이미 죽었다.
그러니 용기없는 자들이 죽을 차례였다.
찌르고 빼고, 삐르고 빼고.
재봉틀의 바늘이 천을 찌르듯 내 철창은 적병사들의 몸뚱이를 찔러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반항하는 자도 있었지만 일개 병사가 나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순식간에 절반 가까이가 바닥에 쓰러지자 적병사들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뒤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바다로 뛰어드는 놈조차 있을 정도였다.
나를 따라온 병사들이 살아남은 적병을 정리하도록 맡겨놓고, 나는 갑판 아래로 내려가는 문을 걷어찼다.
나무로 된 문은 철로 된 전투화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그리고 부서지는 문에 맞아서 기사 하나가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는 목이라도 부러진 듯 이상한 자세로 계단 아래에 쳐박혀 버렸다.
그 기사 옆에 그 여인이 누워 있었다.
늙은 여인.
중년이었다가 내 눈앞에서 늙어버린 여인이었다.
어쩌면 중년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원래는 젊은 처녀였을지도, 아니면 어린 소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노인이었다.
그녀는 수명을 대가로 힘을 사용했음이 분명했다.
아니면 지나치게 큰 힘을 사용했기 때문에 수명까지 끌어다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규모는 작지만 그래도 기후조절이라니.
인간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큰 힘이다.
그러나 수명을 다 사용하고 죽어가는 여인에게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계단을 내려가서 그 여인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아니, 닮은 얼굴이다.
세라빅에서 내가 비도를 던져서 죽였던 여인.
양팔을 벌리며 바람을 다루던 여인.
그리고 소녀에서 노인으로 한순간에 늙어서 죽었던 여인.
그 여인과 닮은 얼굴이었다.
비슷하게 늙은 얼굴을 보니 자매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윈나 언니야. 나는 실패했어. 복수하지 못했어.”
노파는 눈을 뜨고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숨이 멎었다.
그녀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도 멈췄다.
나는 손을 내밀어서 그녀의 눈을 감겨 주었다.
따스한 기운이 손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나는 아마도 자매를 죽인 모양이다.
그것도 같은 능력을 가진 자매를.
나도 모르게 세라빅에서 시작된 악연이 포를라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이 순간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원한을 가진 자가 얼마나 많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깨어난 후 보낸 시간의 절반을 숙청과 전쟁으로 보냈으니 분명 적은 숫자는 아닐 것이다.
나는 내가 지고 있는 피의 업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백작 각하! 수송 함대가 이쪽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경호기사가 계단 위에서 고함을 질렀다.
전투는 내게 잠시간의 상념도 허락하지 않았다.
갑판으로 올라가니 프리시오 공작군의 수송 함대가 돛을 올리고 우리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옆으로 경호기사와 용병대장이 다가왔다.
“불을 지를까요?”
용병대장의 질문에 나는 다시 수송 선단을 살펴보았다.
만약 수송선단이 전투에 끼어들겠다고 나오면, 불을 지르고 포를라의 연합함대에 합류해야 한다.
수송 선단이 아무리 전투함이 아니라 일반 화물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대포를 쏘는 시대도 아니니 숫자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우리 쪽의 숫자가 적은 것이 문제였다.
프리시오 공작의 수송 선단이 후퇴하기를 은근히 기대했지만, 그 정도로 겁쟁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수송 선단이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우리 정도되는 숫자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깃든 움직임이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병사의 숫자를 생각한다면 이대로 이곳에 남아서 싸우는 것은 쓸데없는 피해를 자초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지원군으로 온 것이지 옥쇄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다.
“불을 지르고 후퇴한다. 포를라의 연합함대에 합류하겠다.”
내 명령은 빠르게 전파되었다.
병사들은 적함과 우리 사이를 연결한 밧줄과 쇠사슬을 열심히 끊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일부는 적함을 향해 기름통을 던지고 불덩이도 던졌다.
선창 쪽에 숨어있던 적병사들이 뒤늦게 나타났지만 화살로 견제하는 통에 진화작업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물까지 꼼꼼하게 끊어낸 우리들은 즉시 뱃머리를 돌려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우리 뒤에 남은 5척의 적함은 본격적으로 불에 타기 시작했다.
우리가 후퇴하기 시작하자 수송 선단쪽에서 연달아 폭죽을 하늘로 쏘아올렸다.
쾅쾅쾅!
다시 잠시 간격을 두고,
쾅쾅쾅!
반복적으로 울리는 폭죽 신호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폭죽이 터지기 시작하자 전투 중이었던 프리시오 공작군의 전투함들이 물러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바다에 빠져있는 병사들도 구하지 않고 쭉쭉 뒤로 물러났다.
특히 오른쪽의 전열에 있던 전투함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물러섰다.
후퇴가 아니라 도주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심지어 포를라의 전투함으로 건너갔던 병사들을 내버려두고 후퇴하는 전투함도 적지 않았다.
남겨진 병사들은 바다로 몸을 던지거나 그대로 손을 들고 포로가 되어 버렸다.
프리시오 공작군의 전면적인 패퇴였다.
그제서야 나는 포를라의 항구로 입항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다 건너 대륙의 왕국들에서 온 지원군을 보게 되었다.
그들과의 만남은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