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바람을 다루는 자
처음에는 산들바람 같았지만 이제는 돛대에 걸린 깃발을 펄럭이게 할 정도까지 강해졌다.
돛 역시 바람을 안고 한껏 몸집을 부풀렸다.
바우도는 바람을 타고 점점 속도를 올리고 있는 예비 함대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아직은 거리가 너무 멀었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 하나하나를 구별할 정도는 아니었다.
“역시 그··· 분이 배에 타고 있는 거겠지?”
“그럴 겁니다. 이렇게 적절하게 바람이 불어주는 것을 보면 확실합니다.”
둘의 태도는 상대의 이름은커녕 직책조차 언급하지 못할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뱃사람 특유의 미신과 금기에 익숙한 그들은 자신들의 말이나 행동 때문에 불운을 끌어들이게 되는 일은 절대로 사양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상대의 신분이 평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같지 않은 능력을 보인 이상 계속 평민으로 내버려 둘 리가 없다는 현실적인 면도 고려해야 했다.
상대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에 비하면, 전열의 오른쪽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바람을 다루는 여인이 포를라를 지원하기 위해 온 여러 왕국의 연합함대를 이리저리 몰아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뛸 정도였다.
바다 건너 여러 왕국들에서 지원군이 처음 파견되었을 때 프리시오 공작군은 몇 차례의 연이은 승전에도 불구하고 별로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사령관이었던 게르사브가 비엘리의 왕족 학살을 방임한 죄로 경질을 당했고 이에 관련된 장교들 역시 문책을 당했던 것이다.
잘 싸우고도 문책을 당했으니 분위기가 안 좋은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새로운 사령관은 바다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지나칠 정도로 공격적이었다.
결국 그는 상대가 파놓은 함정에 말려들어가서 함대의 절반을 말아먹는 대참사를 벌이고 말았다.
새로운 사령관은 그 와중에 전사했고, 죽어나간 귀족 역시 적지 않았다.
함대의 절반이라니!
원정군을 다시 편성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프리시오 공작은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함부로 전쟁에 참견했다면서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게르사브를 다시 사령관으로 복귀시키는 강수를 두었다.
체면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해전에서 쓸만한 귀족들이 남아나질 않아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소문이었다.
어느 정도의 인재난이었냐 하면 좀 멍청하다는 소리까지 듣던 바우도에게 돌격대장을 맡으라는 명령이 떨어질 정도였다.
그리고 바우도는 돌격대장으로 함대의 최선두에 섰을 때 여자 마법사가 바람을 다루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녀는 바람을 거대한 손처럼 사용했다.
적들의 함선은 바람에 밀려서 몇 개의 무리로 흩어졌고, 게르사브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이 각개격파를 이어갔다.
그날 포를라의 위해 지원을 왔던 연합함대의 2/3가 바다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남아있는 포를라의 연합 함대 전부가 저 앞에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그날의 승리를 반복할 순간이었다.
“역시 저 곳에 계시는군요.”
참모의 말을 나오기도 전에, 이미 바우어는 전투함의 선수에 서 있는 여자를 보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흰점처럼 보였지만 이곳에서도 그녀의 기세가 느껴지는 듯 했다.
바람이 더욱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
“바람이 점점 거세어지고 있습니다!”
“노꾼의 피로가 심해지겠는데.”
“추격전이라면 모를까 아직 걱정할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기함의 선장이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인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예감에 나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때, 돛대에 올라가 있던 견시가 소리쳤다.
“5척! 5척이 후방에서 접근합니다.”
과연 견시의 말대로 멀리 보이던 수송함대에서 일단의 전투함이 떨어져 나와서 움직이고 있었다.
돛에 바람을 가득 안은 것을 보니 상당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저런 소규모의 예비 함대로 뭔가 하기에는 이미 늦지 않았나?
내가 이끌고 온 10척의 전투함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적을 밀어내는 중이었다.
전투함 자체의 체급도 차이가 나고, 병사의 숫자도 우세하다 보니까 선상 백병전은 승리의 연속이었다.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접근해오는 계속 적함을 주시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전투함에 있어서는 안 되는 자가 적함에 있었다.
적함의 선수에 비무장의 여자 한 명이 양팔을 좌우로 벌린 채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본 순간 나는 내 불안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신비에 접한 자.
마법사라고 불리며 이능을 행하는 자가 저기에 있다.
그리고 그녀의 이능이 무엇인지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선수에 양팔을 벌린 채 서 있던 여인이 양팔을 앞으로 모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구름이 바다로 내리꽂혔다.
그리고 바다에서는 물길이 하늘로 솟구쳤다.
용오름이었다.
강력한 회오리 바람이 만드는 자연의 신비였다.
그런데 인간이 용오름을 만든다고?
바람을?
나는 지금까지 불고 있던 바람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용오름이 생성된 곳은 해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다였다.
마치 꿈틀거리는 거대한 뱀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는 용오름은 해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시속 50km?
아니면 70km?
돛과 노로 움직이는 함선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였다.
순식간에 용오름이 포를라의 전투함 하나를 휘감았다.
그 순간 간판 위에 있던 병사들이 바닷물에 휘감기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들은 용오름을 타고 빙빙 돌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아무리 실력있고 용감한 자라고 하더라도 자연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이 지르는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용오름에 휘말린 전투함도 병사들과 다르지 않은 운명에 휩쓸렸다.
전투함은 제자리에서 빙빙 돌다가 옆으로 엎어지면서 살짝 하늘로 떠올랐다.
일단 바다에서 떠오르자 전투함은 마치 팽이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게 때문인지 하늘 높이 올라가지는 못했다.
대신 빙빙 돌면서 옆에 있던 다른 전투함을 덮쳐 버렸다.
두 대의 전투함이 부서지면서 파편과 사람이 함께 용오름에 휘말렸다.
위로 솟구치는 바닷물이 붉게 변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용오름은 계속 이동하면서 포를라의 함선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함선은 부서지고, 함선의 파편과 병사들은 하늘로 날아갔다.
이대로라면 포를라의 연합함대가 패배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전멸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의 목숨줄을 저기 있는 여자가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죽기 싫으면 적의 예비 함대에 있는 저 여자를 죽여야 한다.
“선장! 당장 전속으로 달려!”
나는 새로 등장한 적의 예비함대를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내 손가락의 끝에는 여전히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바람을 다루는 여인.
강력한 신비를 접한 자.
그녀가 목표였다.
내 명령에 따라 선장 역시 고함을 지르며 선원들을 다그쳤다.
둥둥둥둥.
빠른 박자의 북이 반복적으로 울렸다.
노꾼을 위한 박자였다.
체력의 안배고 자시고 간에 상관없이 노를 저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박자로 두드리고 있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선장 역시 알 수밖에 없다.
포를라의 함선만 선택적으로 노리면서 움직이는 용오름이 정상일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선장이 눈치 빠르게 군 덕분에 4번째 전투함이 박살이 나는 순간, 우리는 적을 향해 돌진할 수 있었다.
나는 기함의 선수로 갔다.
호위기사들이 다급하게 큰방패를 내 앞에 갖다놓았지만, 나는 별 소용을 느끼지 못했다.
방패를 사용할 정도로 가까이 접근한 후라면 모든 것이 끝난 이후가 될 테니까.
나는 전투함의 가장 앞에서 내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전까지는 몰랐는데 내 시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시력이 10.0이라도 되나?
발리스타도 닿지 못할 정도로 먼 거리였지만 나는 별 불편도 느끼지 않고 상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상대편 여자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린 것처럼 눈을 뒤집어 까서 흰자위만 보이던 여자가 문득 고개를 바로하고 얼굴도 나를 향했다.
아주 먼 곳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만을 보는 것 같던 얼굴 표정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두 눈에는 흰자위만 보였지만, 이제는 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다.
아직 거리가 상당한데 나를 주목한 것이니까.
“용오름이 따라옵니다!”
견시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과연 포를라의 연합함대 한가운데서 난장을 치고 있던 용오름이 우리를 향해 방향을 바꾼 것이 보였다.
위험하다!
용오름은 우리보다 열 배는 더 빠르게 움직인다.
저 여자를 잡기 전에 용오름이 우리를 먼저 덮칠 것은 너무나도 뻔한 미래였다.
선장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노꾼들을 지휘하는 북치기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더 빨리! 더 빨리! 늦으면 죽는다고!”
선장의 진심이 전해졌는지 노꾼들의 속도가 조금 더 빨라지기는 했지만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저 여자에게 도달하는 것보다 용오름이 기함을 휘감는 것이 더 빠르다.
나는 비도를 빼서 손에 잡은 후 무게를 가늠했다.
훈련받은 병사가 비도를 던지면 200m를 날아간다.
나는 그 세 배 거리를 던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더 멀리, 아주 멀리 던질 수 있어야 했다.
나는 비도를 손바닥 위에 얹은 후 가볍게 공중에 띄웠다.
비도는 손바닥 위 20cm 정도의 높이에서 둥둥 떠 있었다.
나는 비도를 공중에 띄우는 정도지만, 볼포토라고 했던 자는 자신의 몸을 공중에 띄운 채 돌아다녔다.
만약 내가 그와 같은 능력이 있다면 당장에 날아가서 저 여자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정도의 능력이 없었다.
내 염동력은 아직 약했고, 어떻게 강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래도 믿을 것은 이것뿐이었다.
용오름이 손에 닿을 것처럼 가깝게 접근해 왔다.
선장의 고함 소리도, 북소리의 박자도 더 긴박해졌다.
선원들은 배에서 무게가 나갈만한 것은 모조리 바다로 던지는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배를 가볍게 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병사들과 기사들은 모두 내 명령을 기다리며 무기를 굳게 잡고 있었다.
나에 대한 믿음과 군율이 그들을 지탱하고 있었다.
나는 내 부하들을 본 후 다시 전면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피부를 가졌던 중년의 여자는 어느새 흰머리를 보이고 있었다.
피부가 탄력을 잃고 축 늘어지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저 여인은 자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약간의 시간이 없었다.
나는 여인을 향해 비도를 던지기 시작했다.
염동력이 비도를 보호하며 멀리 보낸다는 느낌으로 공들여서 하나하나 던졌다.
비도는 1km가 넘는 거리를 가로질러 날아갔다.
마치 공기도 중력도 없는 공간을 날아가는 것처럼,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나와 저 여인 사이를 가로질렀다.
첫 번째 비도가 여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여인의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두 번째부터는 그녀의 몸에 박히기 시작했다.
뒤늦게 방패를 가지고 튀어나오는 기사들조차 비도를 막지 못했다.
내가 던진 12개의 비도는 3명의 사람을 죽였다.
여인의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용오름이 멈추고 하늘에서 비처럼 바닷물이 쏟아졌다.
부서진 함선의 파편과 무기, 온갖 잡동사니 심지어 물고기까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졌다.
사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하늘에서 떨어진 병사들 중 살아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용오름이 사라진 것에 신경을 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용오름이 사라지든 말든 북소리는 여전히 급박했고, 선장의 고함소리도 여전했다.
내 명령을 기다리며 무기를 잡고 있던 부하들 역시 그대로였다.
이제 다시 진짜 전투를 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