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84화 (184/248)

184. 바람이 분다.

우리쪽 전투함의 높이가 프리시오 공작군의 함선보다 더 높다.

측면의 뱃전을 기준으로 한다면 사람키보다 약간 높은 정도다.

적함에 뛰어 내려서 우리쪽 전투함을 보니 이것이 정말 애매한 높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따로 훈련을 받지 않았더라도 몸놀림이 좋은 사람이라면 의외로 손쉽게 올라갈 수 있는 높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높이를 맨손으로 올라가라고 하면 아무래도 좀 무리라고 반응이 나온다.

선체가 매끄러우니 더욱 그렇다.

그러니 해상 전투에 경험이 있는 자라면 우선 사다리부터 챙기기 마련이다.

내 전투함이 먹이로 삼은 함선의 선장은 적을 앞에 두고 후퇴를 할 정도로 겁쟁이였지만, 전투병은 나름대로 해상 전투에 경험이 있는 정예병을 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충각 공격으로 피해가 클 텐데도 곧장 반격을 하겠답시고 사다리를 들고 달려오는 병사들이 있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우리쪽 전투함의 높이가 더 높으니 그냥 기어오르기보다는 사다리를 대고 올라오려는 것이다.

사다리를 미리 준비해 놓을 정도로 해상 전투에 대한 경험도 많고, 용맹함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할 만한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용맹에 비해 운이 없었다.

그냥 보기만 해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가 갑자기 앞에 나타났으니까.

당황하는 그들을 향해 나는 철창을 겨누었다.

한쪽 끝은 창날이, 다른 쪽 끝은 외날도인 언월도가 붙어있는 조립식 철창이었다.

나를 본 병사들은 다급하게 사다리를 옆으로 던져 버리고 각자의 무기를 손에 잡았다.

펄션을 닮은 외날도, 삼지창, 그리고 방패와 짧은 검을 든 병사까지.

무기는 통일되어 있지 않았지만 기세만은 대단했다.

병사가 아니라 기사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러나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는 용맹은 만용이라고 부르는 법이다.

나는 달려가며 철창을 앞으로 휙하고 빠르게 찔러갔다.

가장 앞에 서 있던 방검병이 방패를 앞으로 내민 채 하체를 단단히 하고 방패로 공격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나무로 만든 틀에 얇게 철판을 댄 방패로는 어림도 없는 짓이었다.

기사가 공을 들여서 개인적으로 만든 방패라고해도 내 공격을 막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병사용의 양산품 방패라니!

내 창은 빛처럼 일직선으로 방검병을 꿰뚫었다.

방패를 꿰뚫고, 방패를 든 병사도 꿰뚫었다.

가슴을 꿰뚫린 방검병은 선채로 절명했다.

그러나 이들이 정예병은 정예병이었던 모양이다.

동료가 일격에 죽어버리는 와중에도 삼지창과 외날도가 내 목과 다리를 노리고 동시에 공격해 들어왔다.

철창의 절반이 쇠가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제자리에서 회전했다.

나는 방검병의 몸통에 박혀있던 철창의 절반은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외날도가 붙어 있는 나머지 절반의 철창을 분리해서 휘둘렀다.

철창이 죽은 병사에 의해 잡혀 있다고 생각하고 가까이 접근했던 병사들은 오판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펄션을 휘두르며 내 허벅지를 노렸던 병사는 목이 날아갔고, 내 목을 향해 찔러오던 삼지창의 창대는 단숨에 반토막이 되었다.

무기를 잃은 채 암울한 눈빛을 한 병사는 다시 휘두르는 언월도의 칼날에 어깨를 맞고 앞으로 쓰러졌다.

아직 서 있는 적병은 진작에 죽어버린 방검병 뿐이었다.

나는 아직도 잡고 있던 창대를 방검병에게서 힘주어 뽑은 후 둘로 나누어졌던 철창을 다시 하나로 결합했다.

죽어버린 방검병이 그제서야 갑판에 쓰러졌다.

백 명이 탈 수 있는 전투함이라고 해도 그 크기는 생각보다 작다.

갑판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함선 위에 있는 누구라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세 명의 병사를 단숨에 참살하는 것을 적병이나 아군이나 가리지 않고 모두 볼 수 있었다.

그것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기울었다.

일부는 여전히 전의를 불태우며 무기를 잡았지만, 또 다른 일부는 갑옷을 벗어 던지고 바다로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라면 작은 성채에서 벌어진 전투의 결말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정해진 결말에 못을 박아버리려는 듯 우리쪽 전투함에서 병사들이 연달아 넘어왔다.

모두가 해상 전투라면 경험꽤나 쌓은 용병들이었다.

그들은 저항의지를 버리지 않은 적을 무자비할 정도로 몰아붙였다.

항복은 받지도 않았다.

나와 호위기사들 역시 아직 미련을 못 버린 적을 상대로 맹렬하게 날뛰었다.

갑판까지 장악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이후는 화공을 미리 준비해온 용병들의 순서였다.

그들은 기름통과 횃불을 연달아 선창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 아직 적병이 좀 남아있기는 했지만 빠르게 전투함으로 돌아왔다.

불길이 솟은 이상 적함은 끝장이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불은 순식간에 전투함을 집어삼켰다.

그때까지도 살아있던 적병은 불을 끄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모두 바다로 몸을 던졌다.

어이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 내에 두 척의 적함을 전열에서 낙오시킨 내 전투함은 다음 목표를 찾아서 선수를 움직였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함께 움직이는 전투함이 10척이다.

한꺼번에 10척의 전투함이 움직이며 프리시오 공작군의 함선을 몰아붙이는 것이다.

결국 프리시오 공작군의 오른쪽의 전열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여파는 생각보다 커서 프리시오 공작군의 중심에 있던 함선까지 영향을 받을 정도였다.

*

“갑자기 나타난 저 배들은 뭐야! 어디에서 온 거야?”

프리시오 공작군의 전투함을 이끌고 있던 돌격대장 바우도는 이성을 잃고 고함을 질렀다.

양쪽의 전투함 숫자가 비슷해서 힘싸움을 몇 시간은 더 할 생각으로 숨을 고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난입한 10척의 전투함 때문에 팽팽했던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예상 밖의 적군이었다.

포를라에 있는 함선의 숫자는 조각배까지도 파악하고 있다고 자신하던 병신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싶을 정도였다.

바다 건너 왕국들의 지원군도 더 이상 오지 못하도록 손을 써두었으니 눈앞의 적함만 무너뜨리면 된다는 사령관의 호언장담도 헛소리였다.

시간만 충분히 끌어주면 적들을 한꺼번에 바다에 처넣을 수 있다는 마법사의 확언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전선을 물리고 다시 전열을 짜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날씨와 바람이 오늘이 딱 좋다는 마법사의 말이 있었으니 후퇴는 생각할 것도 아니었다.

돌격대장인 바우도는 다급하게 전황을 살피며 새로운 적군이 미칠 영향을 가늠해보았다.

그러나 잠시 전투를 지켜보던 바우도는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오른쪽에서 2열로 단횡진을 이룬채 포를라의 전투함과 호각을 이루고 있던 전함들이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쇳덩어리로 만든 배에 부딪히기라도 했는지 단순한 충각 공격임에도 박살이 나는 함선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몇 척의 배는 진짜 수수깡으로 만든 것처럼 완전히 부서져서 그대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가 진짜 걱정하는 것은 충각 공격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충각 공격이 유용하다고 해도 한두 번이 한계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상대방의 배가 부서질 정도로 들이받았는데, 들이받은 배가 정상일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충각 공격을 한 전투함은 내부 구조가 뒤틀려서 전투 후에는 반드시 조선소에서 전면적인 개수를 거쳐야 할 정도로 망가진다는 것은 그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돌격대장임에도 불구하고 충각 공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걱정하는 진짜 문제는 선상 백병전이었다.

해전의 결말은 언제나 선상 백병전에서 누가 이기는가로 결정되는 법이다.

배를 단숨에 파괴할 수 있는 무기라도 나오기 전까지는, 선상 백병전의 승자가 곧 해전의 승자인 것이다.

그런데 새로 등장한 적군에 의해 우측의 전열이 너무 일방적으로 선상 백병전에서 밀리고 있어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벌써 불길에 휩싸인 배가 나올 정도라면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기사로 전투함을 채웠나?

그런데 진짜 어디서 온 자들이야?

그의 의문은 옆에 있던 참모가 풀어주었다.

“칼마르 백작군입니다. 칼마르 백작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이 보입니다.”

“칼마르 백작군?”

“다리클리프와 함께 펠트리아를 지원하러 왔다가 백작령에 문제가 생겨서 돌아간 곳 있지 않습니까.”

“아! 칼마르의 백작 윌리엄! 기사였다가 주군과 결혼해서 백작이 되었다는 행운아.”

“예. 맞습니다.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갑자기 왜? 칼마르가 참전한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는데!”

물론 이것이 멍청한 소리라는 것은 바우도 역시 알고 있었다.

참전할 상황이 되어서 참전을 했겠지.

그래도 며칠 만, 아니 하루만이라도 더 늦게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바우도는 끙끙거리며 전열의 오른쪽을 계속 살폈다.

칼마르 백작 윌리엄은 그도 기억하는 인물이었다.

프리시오 공작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라면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그였지만 윌리엄에 대한 소문은 꽤나 유명했다.

그의 행운에 대한 소문은 귓등으로 듣고 흘렸지만, 기사 몇 명쯤은 어린아이의 팔을 비트는 것보다 더 쉽게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에는 그도 관심을 보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자기 사람은 잘 챙기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상당히 냉혹하다는 소문도 비난처럼 따라붙은 것이 기억났다.

당시에 바우도는 어느 정도 과장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을 했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게 과장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력이 뛰어난 귀족에게는 실력이 뛰어난 기사가 따라붙는 법이다.

이렇게 전투가 흔한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어쩌면 백작의 사람이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기사들을 잔뜩 끌고와서 선상 백병전에 써 먹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할까요?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밀리고 있는 오른쪽의 전열을 노려보는 바우도를 향해 참모가 다시 채근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피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리라는 것을 참모 역시 아는 것이다.

그러나 바우도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전선을 재편하는 것은 그의 권한이 아니었다.

일선에 서서 전투를 지휘하는 돌격대장의 입장에서 후퇴를 선언하는 것 역시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적어도 아직은 아니었다.

그래도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령관의 의견을 물어볼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바우도는 신호깃발을 높이 들어서 사령관의 지시를 요청했다.

요청에 대한 답변은 금방 나왔다.

사령관의 명령은 계속 전투를 속행하라는 것이었다.

“아니, 지금 전열이 무너지는 것을 뻔히 보면서 대책도 없이 그냥 전투를 속행하라고 하면 어떻하라고?”

“어! 돌격대장님. 지금 예비대가 전진하고 있습니다!”

바우도의 불평에 응답이라도 하는 것인 양 사령관의 직할로 남겨 놓았던 예비대 7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지금까지는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았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바람이 점점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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