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83화 (183/248)

183. 너무 늦지 않은 지원

제국 중부의 2대 세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뱅트손 공작은 자신이 황제가 되었음을 선언하고 스스로 황제의 위에 오른 것이다.

물론 그가 황제가 되었음을 인정하는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비난의 강도는 생각보다 약했다.

개인적으로야 선제후의 전통과 관례를 무시한다며 비난하는 귀족들이 숱하게 나왔지만, 고위 귀족들은 발언을 삼가는 것이 역력했다.

특히, 백작급의 귀족들과 영지 귀족들이 말을 아끼는 것은 눈치가 없는 자라도 금방 알아챌 정도였다.

나름대로 발이 넓고, 외부의 소식이 빠른 객주 마틴은 대귀족들의 이런 행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간단하게 피력했다.

“눈치를 보는 것이지요. 자신이 모시는 주군도 뱅트손처럼 황제가 되겠다고 선언하기라도 하면 뱅트손을 향한 비난이 그대로 자신의 주군에 대한 비난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렇다면 마틴은 나머지 공작들도 자신이 황제임을 선언하리라고 보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백작 각하. 그래봐야 이제 몇 명 남지도 않았지만 뱅트손의 황제 선언이 그들을 자극했을 겁니다. 조만간 자신이 황제임을 선언하는 공작들과 자신의 주군이 황제임을 주장하는 귀족들로 꽤나 시끄러우리라고 생각합니다.”

칼마르 시에서 고급 여관을 운영하던 마틴은 현재는 여러 곳에서 분점을 운영하는 중이었다.

칼마르가 귀족연합자치령의 일원이 된 후로 지리적인 한계를 벗어던진 그는 린드스톰을 뒷배로 두고 구 막시밀리안 공작령과 구 글렌 공작령에 상당한 규모의 여관을 여럿 열었다.

가장 최근에는 지슬리 공작령에 인접한 우리측 항구 도시에까지 손을 뻗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정도로 공격적인 확장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물론 마틴이 자기돈으로만 사업을 확장한 것은 아니다.

린드스톰을 비롯한 칼마르 시의회 의원들의 돈도 들어갔고, 리네아의 돈도 적잖게 들어갔다.

대신 마틴의 여관은 첩보 거점으로도 활용되었다.

나 역시 그를 통해 다른 지역의 분위기를 전해 듣곤 했다.

“일리있군요. 그러나 왜 뱅트손이 가장 먼저 자신이 황제임을 선언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자칫하면 공공의 적으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는 위험한 선택 아닙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지금 당장 그를 위협할 만한 세력이 없지 않습니까? 반면에 스케티와의 전투에서 입은 손해 때문에 내부적으로 불만이 많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아마도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요?”

마틴의 의견에는 나 역시 동의하는 편이다.

스케티에 대한 원정은 양패구상이라고 할 정도로 큰 피해를 양쪽에 입혔다.

뱅트손 자신도 병신이 되었고, 가장 강력한 라이벌도 병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면 그에게 있어서 가장 가깝고도 큰 위협이 제거되었다고 해도 말이 되기는 한다.

그리고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세력들은 공작들이 싸그리 죽어나가는 대혼란에 빠져 있으니 걱정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전대 황제가 뱅트손 공작가 출신이고, 황도 역시 아직은 뱅트손의 영향권에 속한다.

그렇다면 황제라는 명분을 세우고 차근차근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으로 보였을 것이다.

차근차근.

이게 핵심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뱅트손이 갑자기 남쪽으로 밀고 내려올 것 같지가 않다.

마음이 급하다고 해서 지금 상태로 밀고 내려온다면 아르보그 공작령에서 막힐 것이 확실하다.

내가 보기에 뱅트손에게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자신이 황제가 되었음을 파벌의 귀족들에게 설득할 시간이 말이다.

특히 물리적으로 설득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남쪽의 해상 교역망 분쟁에 개입해야 한다면 바로 지금이어야 한다.

지금이 아니라면 용병부대만 보내 놓아야 하는데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짓이다.

바다 건너편 왕국들의 영향력을 견제해야 하는데 용병부대만 보내다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병력을 아끼는 것이 더 낫지.

그러니까 다리클리프에서 온 사절들의 요청에 부응해야 한다면 바로 지금이다.

우리는 이번에도 지난번과 별 차이가 없는 규모의 병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병사의 대부분은 용병으로 채웠고, 지휘부는 나를 중심으로 단출하게 구성했다.

지난번과 같은 방식이었다.

이것은 철저하게 실용적인 편성이다.

나 역시 그게 편했다.

솔직히 말한다면 지휘부에 귀족들이 바글거리며 한마디씩 하는 것은 내게 혼란과 낭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귀족들이 각자 끌고 온 사병 때문에 우대하기위해 지휘부에 두었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자신의 사병들과 함께 전투의 일선에 나서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기만 했다.

아마, 제국 초창기에 귀족을 인질로 잡고 군권을 장악하던 방식이 묘하게 뒤틀린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지만, 과거의 일이니 진실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번에도 잘 부탁합니다. 엘리아슨 경.”

“백작 각하의 용맹이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저 역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세 개의 섬나라 중 유일하게 남아서 버티고 있는 포를라의 입장에서는 늦어도 너무 늦은 지원이겠지만, 그래도 1천에 달하는 새로운 병력이 지원군으로 출발했다.

모두 해전을 치러본 경험자들이고, 상당수는 지난번 해상 전투에도 참여했던 자들이다.

그런데 한 번이라도 해상 전투를 경험한 것이 상당한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엘리아슨이 이전보다 지휘가 더 편하다는 감상을 내게 말할 정도였다.

이번에는 다리클리프에서 추가 병력이 합류하지 않았다.

원정에 나설 만한 자들은 이미 다 포를라에 가 있다는 것이 사절단의 설명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좀 더 빠르게 포를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투 역시 그만큼 빠르게 뛰어들게 되었다.

“전방에 연기가 보입니다!”

돛대에 올라가 있던 견시의 외침이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도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포를라 방향입니다. 연기의 양이 많지 않은 것을 보면 포를라가 함락된 것은 아닌 것 같고, 배가 불에 타고 있는 모양입니다.”

과연 숙련된 선원 겸 용병이 추측한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함께 뒤엉킨 채 불에 타고 있는 3척의 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는 프리시오 공작 소속이었고, 다른 둘은 포를라 소속이었다.

배에 있는 병사들의 대부분은 죽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은 꽤 질긴 편이어서 불길 속에서도 아직 살아남은 자들도 있었고, 판자나 잡동사니를 잡은 채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곳에서 전투를 치른 자들은 동료들을 챙길 겨를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투 대신 물에 빠진 자들의 구조부터 시작해야 했다.

적아를 가리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을 다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전투가 시작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백작 각하.”

“해전은 결판이 날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입니다. 급하게 서둘 것도 없고, 일부러 늦게 갈 것도 없습니다. 전투 태세를 갖추되 노꾼이 탈진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나아갑시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우리의 선택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가 되어 버렸다.

바람이 좋았다.

노꾼 역시 맞바람이 아니라서 체력을 많이 아낄 수 있겠다고 할 정도였다.

10척에 달하는 전투선은 빠르게 달려서 몇 시간 만에 포를라를 눈에 넣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포를라 앞바다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해상 전투 역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양쪽 합쳐서 100척이 넘는 전투함이 얽혀서 치열하게 죽고죽이는 현장이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심지어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서 좀 떨어진 바다에는 50척에 달하는 수송선이 대기 중이었다.

하나같이 병사들을 가득 싣고 있었고, 심지어 몇 척에는 투레질하는 전투마까지 보였다.

만약 승산이 보인다면 그 기세를 타고 상륙부대까지 밀어넣을 심산인 것이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늦었으면 골치 아플 뻔했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우리는 전투에 돌입할 적절한 위치를 찾았다.

날뛰는 적의 기세를 단숨에 꺾어 버릴 강력한 한 수가 필요했다.

그리고 우리는 순식간에 공격 방향에 대한 합의를 할 수 있었다.

적의 배치를 보니 다른 결론을 내기도 힘들 정도였다.

지금 양쪽의 함대는 두 줄로 늘어서서 정면으로 맞붙은 상태였다.

이러면 양쪽의 숫자가 비슷하니 방진을 짜고 힘싸움을 벌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단횡진의 오른쪽 가장자리를 향해 한꺼번에 돌격해 들어가기로 했다.

수적인 우위로 적을 단숨에 붕괴시킬 생각인 것이다.

이것은 칼마르의 전투함과 병사들의 실력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공격이기도 했다.

전투함은 사용하는 목재부터가 일반적인 함선과 다르다.

더 단단하고 무겁다.

거기다가 충각을 감안한 선수 구조를 따로 만들고, 백병전을 대비해서 뱃전의 높이를 올리고, 방패판을 장착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움직인다는 것이다.

돛과 노를 함께 사용해서 전후좌우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 전투함의 진짜 강점이다.

그래서 전투함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함선과 전투함이 맞붙으면 무조건 전투함이 이긴다고 봐야 할 정도다.

기대대로 칼마르 소유의 조선소에서 직접 공들여 만든 10척의 전투함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위력은 상상 이상었다.

강철로 된 충각에 옆구리를 들이박힌 적의 함선은 선체가 아예 뒤틀려 버렸다.

배 위에 있던 병사와 선원들은 강력한 충격에 아예 배 밖으로 튀어 나가버리기도 했다.

한차례 충각 공격을 한 전투함이 노를 저어서 뒤로 움직이자 충각이 들이박았던 곳에 커다란 구멍이 나서 물이 쏟아져 들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무 구멍이 커서 임시 수선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결국 어떻게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적의 함선이 기우뚱하며 옆으로 기울어진 채 반쯤 가라앉아 버렸다.

이 정도가 되면 배가 완전히 가라앉은 것이나 다름없다.

전력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말이다.

이런 식으로 한순간에 3척의 배가 전열에서 이탈해 버렸다.

불과 연기,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던 바다가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적어도 우리가 공격한 지역의 적과 아군은 양쪽 다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곧 격렬한 환호성과 고함이 우리 편에서 울려 퍼졌다.

사기가 치솟는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지지부진하게 선체를 맞대고 밀고 밀리며 화살이나 쏘면서 서로를 견제하던 전투가 갑자기 끓어올랐다.

상대방의 배로 건너가기를 두려워하며 몸을 사리던 병사들조차 앞을 다투어 적함선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역시 전투함으로 적의 함선을 밀어내며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

앞과 옆에서 동시에 적을 상대하게 된 프리시오 공작의 병사들은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겁을 먹고 함선을 뒤로 빼려고 하는 선장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지.

기세를 탔을 때 적을 최대한 줄여놓아야 하는 법이다.

“백작님! 안 됩니다!”

“따라와!”

나는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소리치며 반대하는 호위기사들을 뒤에 달고 전면의 적함을 향해 뛰어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