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도움 요청
뭔가 사리에 맞지 않는 내용이 문서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숲의 현자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스케티 공작의 조언자가 포로로 잡힌 뱅트손 공작군의 상당수를 데려갔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포로로 잡힌 기사와 실력이 뛰어난 용병을 모조리 데려가서 귀족들의 불만이 상당하다는 내용이 강조되어 있었다.
귀족들이 불만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숲의 현자에게 전리품을 빼앗긴 셈이니까.
그것도 알짜 전리품만 가져간 것이니까 전쟁통에 입은 손해가 막대한 귀족들은 스케티 공작의 편애가 지나치다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숲의 현자는 갑자기 튀어나온 알 수 없는 존재였다.
분명 신비에 접한 자일 것이고, 아마도 동물을 부리는 능력이 있는 것 같은데 스케티 공작의 신뢰가 대단하다는 평이 첩보를 기록한 문서마다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는 개인일 뿐이다.
그가 독자적인 세력을 거느렸다거나 스케티 공작이 그에게 별도의 조직을 떼어주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설사 나름대로의 단체를 거느린 수장이라고 하더라도 수천, 어쩌면 만 명이 넘는 포로를 그에게 넘긴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스케티 공작이 노망이 나서 숲의 현자를 후계자로 삼기라도 한 것이 아니라면······
어! 나 방금 뭔가 그럴듯한 생각을 한 것 같은데?
그러니까 후계자가 아니라 후견인으로 삼은 것이라면?
황제 후보자로 내밀었던 2살짜리 손자의 후견인 말이다.
내 생각이 아주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은 잠시 후에 만난 리네아가 설명해 주었다.
“그럴듯하네요. 같은 파벌에 속한 귀족이라도 각자의 입장이 있는 법이지요. 스케티 공작의 동생을 새로운 후계자로 밀고 있었다는 소문이 난 귀족들의 영지가 이번 전투에서 많이 파괴되기는 했어요.”
“그렇다면 조만간 공작가 내부가 시끄러워지겠군요. 스케티 공작의 동생이 자살할 생각이 아니라면 망명을 하든가, 먼저 선수를 치든가 하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스케티 공작도 그것을 두고 보고 있을 사람은 아닌 것 같고요.”
“윌리엄 생각에는 누가 이길 것 같은가요?”
“음······ 아무래도 스케티 공작이 이길 것 같네요. 유력한 후계자인 동생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뱅트손 공작을 이용할 정도로 독하고 유연한 사람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동생의 발밑에도 손을 써두었을 겁니다. 어쩌면 예상보다 조용하게 끝날지도 모르겠군요.”
내 예상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스케티 공작이 그의 친척들보다 좀 더 빠르게 움직였던 것이다.
한 달 뒤에 도착한 첩보 문서에는 스케티 공작의 가까운 친척들이 사고로 다 함께 호수에서 익사했다는 황당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2살짜리 아이가 스케티 공작가의 새로운 후계자로 선포되었다는 것이었다.
2살짜리?
황제 후보자였던 그 손자?
스케티 공작이 진짜 노망이 났나?
아무리 후견인을 둔다고 해도 그런 어린애가 공작위를 정상적으로 이어받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나?
진짜?
지구의 역사에서 벌어진 다양한 찬탈극을 기억하고 있던 나로서는 스케티 공작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들을 제거했다고 해도, 야망을 품은 자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핏줄도 못 믿는데 후견인을 믿는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단종이 고명대신의 숫자가 적어서 찬탈을 당한 것이 아니었고, 건문제가 세력이 약해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히데요리는 후견인에게 천하인을 빼앗겼다.
평화시에도 힘든 일을 이런 내전 시기에, 자기 세력까지 깎아가면서 벌이다니 스케티 공작 노망설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곳에서도 상식이가 죽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게 말이 되나?”
날 것 그대로의 첩보문을 받아들고 내가 가장 처음에 내뱉은 말이었다.
2살짜리 아이가 하루만에 20대 초반으로 성장했다니 이게 무슨!
황당한 마음에 다른 통로로 도착한 첩보 문서까지 뒤져봤지만 마찬가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아이에서 청년으로 자라나는 자리에 참관한 사람들의 증언이 첨부되어 있는 문서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 말도 안되는 일이 사실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스케티 공작은 이 일을 적극적으로 소문을 냈다.
하룻밤 사이에 아이에서 어른이 된 일을 마치 비범하고 운명적인 사건인 것처럼 포장해서, 공작가의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다지는 계기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새삼스럽게 눈으로 ‘숲의 현자’를 바라보게 되었다.
입회한 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일은 전적으로 숲의 현자의 능력에 기댄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단순히 짐승이나 부리는 자는 아닌 모양이다.
내 생각에는 잔디밭이 사람을 잡아먹거나 빛의 기둥이 사람을 흡수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문득, 이 자를 한번 만나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자가 별의 의지를 거부하고 사라진 절반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지금은 알현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다리클리프의 사절을 만나봐야 할 시간이었다.
그들은 이미 며칠 전부터 나와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네아와 나는 일부러 그들과의 면담을 지체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프리시오 공작의 세력과 지지부진한 전투를 이어가던 섬나라들 뒤에 있던 자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멸망한 비엘리, 점령당했지만 일부 세력은 빠져나온 펠트리아, 그리고 저항의 중심이 되어버린 포를라.
거기에 매몰비용이 너무 커서 거래상대와 운명을 같이 하는 꼴이 되어버린 다리클리프까지.
지금까지는 그들이 프리시오 공작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연합군의 전부였다.
어떻게 봐도 프리시오 공작과 싸워서 이긴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세력이 아니다.
심지어 전투 초기에 그들과 함께했던 칼마르는 본토에서 벌어진 급박한 사건으로 인해 진작에 철수해 버렸다.
그리고 리네아가 건강을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전투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러나 섬나라 연합은 지금까지 바다에서 한정이지만 제법 잘 버텨왔다.
그것은 전적으로 외국의 도움 때문이었다.
상품의 출발지, 그리고 도착지가 되는 대륙 건너편의 왕국들 말이다.
세 섬나라들은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물건도 없이 중개 무역만으로 엄청난 부를 이루어왔다.
우리가 언제나 유통의 중간에 있던 섬나라들만 상대해서 그렇지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들이는 상품이 생산된 곳이 있을 것이고, 우리가 파는 상품을 사주는 곳이 있는 것이다.
단순히 거래의 중간에 끼어서 구전을 먹는 정도가 아니라 물건을 생산하고 소비함으로 진짜 이익을 얻는 자들 말이다.
대륙 건너편의 왕국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제국 남부의 해상 교역망이 박살나고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본격적으로 참전을 시작했다고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칼마르는 결단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섬나라 연합을 도울 것인지 아니면 방관할 것인지.
*
“다리클리프의 형제들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반갑게 생각하오.”
말은 반갑다고 하지만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은 나를 바라보는 다리클리프 사절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칼마르 백작가의 가신들과 자문위원들의 태도가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진작부터 파악하고 있던 그들은 함께 전투를 겪었던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조차도 참전에 부정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사절단의 일부가 패닉에 빠지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이후로도 서로 간의 안부와 덕담이 오고 갔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가라앉은 상태였다.
결국 다리클리프의 대표 사절로 온 크테코가 직설적으로 도움을 요청해 왔다.
“우리를 아직도 형제라고 생각하신다면 도움을 주십시오. 우리는 윌리엄 백작 각하의 용맹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적들은 감히 누구도 윌리엄 백작 각하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 용맹을 다시 한 번 형제들을 위해 발휘해 주십시오.”
너무 직설적인 요청이라서 바로 답변하기 곤란할 정도였다.
대신 자문위원들 중 하나인 린드스톰이 눈치껏 나서주었다.
“다리클리프까지 밀린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소만.”
“그러나 점점 불리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중개 무역으로 살아가던 포를라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 정도입니다.”
“바다 건너에 있는 왕국들에서 지원군이 왔다는 사실을 들었소.”
“그러나 부족합니다. 간신히 버티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로 간에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시간끌기에 지나지 않는다.
정작 핵심은 둘 다 말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리네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외정은 내가 담당하고 있지만 이 일은 칼마르의 근본과도 관련된 일이라서 리네아의 의견이 중요했다.
리네아는 내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적으로 내게 맡긴다는 신호였다.
“크테코 경.”
“예. 백작 각하.”
“칼마르는 성 마르스홀롬 제국의 일부였소.”
뭔가 안 좋은 상상을 한 듯 크테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심지어 우리는 아직도 제국이 내려준 백작이라는 작위를 그대로 쓰고 있지. 그리고 제국이 우리에게 부여한 권리에 따라 칼마르를 통치하고 있소.”
알현실 안은 조용했다.
숨을 쉬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제국이 아직도 존재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우리뿐 아니라 다른 자들도 제국이 부여한 권리와 작위를 존중하고 있다오. 그래서 우리끼리 싸우는 것은 아직 내전이오.”
“그러나 칼마르는 이미 펠트리아와 포를라를 편들어서 전투를 치렀습니다. 설마 프리시오 공작군과 싸운 것을 부정하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작은 섬나라를 끼고 전투를 벌이는 것은 별문제가 안되오. 우리가 보기에 그들은 나라가 아니라 자유 도시 같은 것이니까. 우리의 필요에 의해 존속할 뿐, 우리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없앨 수 있는 도시 국가에 불과한 자들에 지나지 않소.”
“그렇다면 칼마르는 프리시오 공작의 편에 서시겠다는 겁니까?”
창백하게 질린 크테코가 항변했다.
칼마르가 프리시오 공작과 연합하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는지 입에 거품을 물 지경이었다.
“설마. 그것은 말도 안 되지. 우리가 왜 프리시오 공작 편을 들겠소? 그자와 좋은 관계도 아닌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내 말에 크테코는 간신히 평정심을 찾은 모양이었다.
“명분이 필요하오. 프리시오 공작이 제국의 테두리를 벗어났다는 명분이 있으면 그를 적으로 규정할 수 있지. 그전까지는 본격적인 참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될 거요.”
“칼마르의 도움이 없으면 섬나라들의 연합에 대한 외국의 영향력이 더 강해 질 것입니다. 그것은 다리클리프도 칼마르도 원하지 않은 상황이겠지요. 명분을 찾다가 때를 놓치실지도 모릅니다. 설마 해상교역망 전체를 다른 자들의 손에 쥐여주실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크테코 경. 나는 제국을 분열시킨 자로 기록되고 싶지 않소. 게다가 그런 오명을 뒤집어 쓰면 공공의 적이 되기 딱 좋지. 기회만 된다면 제국의 배반자를 토벌하겠다고 깃발을 들고 나타날 자가 한둘이 아닐 거요.”
내 확고한 대답에 크테코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칼마르의 귀족들이 있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선언한 것이니 내 말이 뒤집어질 일이 없다는 것을 그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다리클리프는 지금까지 우리의 동맹 세력이었다.
그런 자들을 너무 박대하는 것은 곤란했다.
나는 조금 부드러운 어조로 그를 달랬다.
“칼마르의 소속이 아닌, 이를테면 다리클리프에 적을 둔 용병부대가 참전할 수는 있을 거요. 나 역시 개인적인 인연에 따라 용병대장으로 종군할 수도 있겠지.”
“백작 각하!”
자문위원들 사이에서 질책하는 듯한 반응이 다급하게 튀어나왔지만 립서비스를 할 때는 제대로 해야 한다.
내가 지금 당장 가겠다는 것도 아닌데 뭘.
“경들은 걱정하지 마시오. 남작으로 종군하면 되니까. 칼마르에 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내 말에 다리클리프의 사절들은 감명을 받은 얼굴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칼마르의 지원을 미루면서도 원한은커녕 우호적인 감정을 쌓는 것에 성공했다.
물론 남작 신분으로 종군할 생각은 없다.
이것은 단지 시간을 번 것뿐이다.
내 예상대로라면 형태만 남은 제국의 틀을 깨는 자는 조만간 나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내가 남작의 신분으로 종군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