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81화 (181/248)

181. 스케티 공작의 후계자

*

뱅트손 공작군의 일부는 아주 운이 좋았다.

서둘러서 먼저 이동한 병력은 일부 낙오병을 제외한다면 이렇다 할 피해조차 보지 않았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우선적으로 챙기면서 후퇴한 덕분이었다.

심지어 후퇴하는 과정에서 전투를 치른 부대조차 거의 없을 정도였다.

어떤 자들은 빠르게 이동하느라고 쉬지 못해서 그렇지 진격할 때보다 더 안전했다고 평했을 정도였다.

물론 스케티 공작군이 아주 맹탕은 아니어서 중간중간 갑자기 튀어나와 후퇴하는 뱅트손군을 공격하던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복 기습을 가했던 스케티 공작군은 의욕만 앞섰을 뿐이었다.

제대로 훈련도 안 되고 무장도 부실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마 이미 한번 철저하게 짓밟혔던 스케티 공작령 주변의 영지에서 쓸만한 병력을 끌어모으는 것이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뱅트손의 군대에게 작은 피해도 주지 못했다.

뱅트손 공작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힌 쪽은 추격해 온 스케티 공작의 직속 부대였다.

얼마나 지독하게 공격을 당했는지 후퇴 행렬의 앞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멸에 가까운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행렬의 중간 이후에 주로 배치되었던 용병들의 타격이 너무 커서 편제를 유지한 채 후퇴한 용병부대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사실은 양 세력의 경계선까지 철군을 하고 병영을 세운 후에야 모두에게 알려졌다.

그리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게 된 용병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일부는 소요를 일으킬 정도였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으로 풀어졌어야 할 병영의 분위기가 오히려 흉흉해졌다.

소요가 일어난 바로 그날 밤 뱅트손은 비밀리에 오르기손을 불러들였다.

그의 옆에는 그가 직접 키운 두 명의 덩치 큰 기사만이 호위를 하듯 서 있었다.

“자네도 소문은 들었지? 용병들의 분위기는 어떤가?”

“만약 구심이 될 용병대장이 한두 명이라도 살아있었다면 소요가 아니라 반란이 일어났을 겁니다.“

“믿을 수 없는 놈들.”

“너무 대놓고 버리는 패로 쓰셨습니다.”

오르기손은 현재의 상황을 직설적으로 말해주었다.

뱅트손이 그에게 바라는 것이 직언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행정관이라면 누구나 구사하는 돌려 말하기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진실만을, 그것도 직구로 던졌다.

“소요를 일으킨 용병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나?”

“절대 안 됩니다. 진짜 반란이 터집니다. 차라리 당장 내일이라도 보수를 후하게 지급하고 해산시키는 것이 낫습니다.”

오르기손의 말에 뱅트손은 못마땅하다는 티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 역시 그것이 가장 나은 해결책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용병부대를 고용하는 것이 힘들겠군.”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너무 대놓고 버리는 패로 쓰셨습니다. 어느 정도라면 용병도 이해합니다만 이번에는 지나치셨습니다.”

“용병을 좀 살리겠다고 내 기사들과 직속 부대를 한 명이라도 더 잃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어. 용병은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는 자들이지만 내가 키운 기사들은 내게 충성을 바치지.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결정하라고 해도 내 결정은 바뀌지 않아. 내 것이 먼저야.”

뱅트손의 말에 오르기손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

스케티 공작은 자칭 ‘숲의 현자’와의 약속을 지켰다.

감히 공작에게도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숲의 현자라고 불러달라는 건방진 자였지만, 그의 능력은 진짜였다.

신비에 접했다는 사기꾼들 중에서 드물게 보는 진짜였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대로 포로로 잡은 뱅트손의 기사와 체격이 좋은 병사들을 모조리 넘긴 것이다.

왜 그들을 필요로 하는지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스케티 공작이 원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믿을 수 있는 후계자.

그뿐이었다.

“그놈이 죽지 않았다면.”

쓸데없는 소리였지만, 아쉬움을 담아서 내뱉을 수밖에 없는 한탄이었다.

몸은 약했지만 영리했던 외아들이었다.

자신에게 새로운 정책을 건의하고, 군대를 조련하는 모습을 볼 때면 다음 대의 스케티 공작으로 자신보다 훨씬 더 잘 해낼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죽었지.

스케티 공작의 눈빛이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죽일 것처럼 거칠어졌다.

그 자리에서 범인을 체포했지만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범인 역시 감옥에서 죽었다.

독살이었다.

범인에서 배후까지 이어지던 꼬리 역시 모조리 잘려 있었다.

그렇게 범인의 배후를 밝히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범인의 배후가 누구일지는 뻔했다.

후계자의 죽음으로 이익을 보는 자들.

다음 대의 공작위를 탐내는 친척들이 바로 범인의 배후였다.

증거는 없었지만 그의 심증은 확고했다.

만약 손자의 나이가 2살이 아니었다면, 하다못해 10살이라도 되었다면 계승 순위에 있는 친척들을 모조리 쳐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손자의 나이는 이제 2살.

다음 대의 후계자로 삼기에는 너무 어렸다.

가신들과 파벌의 귀족들 중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숲의 현자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의 손을 맞잡았다.

겸사겸사 손자가 후계자가 된다면, 고개를 쳐들고 헛소리를 할 파벌의 귀족들도 뱅트손 공작의 손을 빌려서 정리해 버렸고.

이제는 약속을 지킨 대가를 받을 차례였다.

숲에서 며칠씩이나 나오지 않고 있던 숲의 현자는 스케티 공작의 일행이 접근하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약속을 지켰네. 숲의 현자. 이제 자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야.”

“물론입니다. 맹약은 귀중한 것입니다. 내 입에서 내뱉은 말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나는 존재하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 오십시오.”

숲의 현자는 몸을 돌려 숲으로 들어갔다.

스케티 공작과 그의 2살짜리 손자가 포함된 일행도 숲으로 따라 들어갔다.

숲의 초입부는 흔히 접하던 숲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조금 들어가자 숲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좀 더 생동감이 넘친다고 할까?

아니면 생명력이 약동친다고 할까?

스케티 공작과 그의 일행은 몸에 활력이 도는 것을 느꼈다.

들이마시는 공기가 그들의 폐를 씻어내고, 땅에 발을 디딜 때마다 다리가 강건해지는 것 같았다.

심지어 머리까지 맑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수련을 많이 한 사람이지. 내 몸의 상태는 내가 잘 아네. 그런데 지금 내 몸에 느껴지는 이 활력은 비정상적이군. 실제로 몸의 상태가 좋아졌어. 숲의 현자. 자네, 숲에다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이것저것 미리 준비한 것뿐입니다. 공작께서 요구하신 것을 제대로 이루려면 준비가 필요해서 말이지요. 이제 도착했습니다.”

넝마인지 옷인지 애매한 천쪼가리를 펄럭이며 앞장서 걷던 숲의 현자가 발걸음을 멈췄다.

원형의 잔디밭이었다.

잔디밭 주변에는 빽빽하게 나무가 둘러싸고 있었다.

“손자분을 중앙에 눕히시지요.”

숲의 현자의 말에 스케티 공작이 눈짓을 했다.

공작의 손자를 안고 있던 시녀가 아이를 잔디밭의 중앙에 내려놓았다.

공작의 손자는 어른이 입는 헐렁한 윗옷을 원피스처럼 걸친 채 아직 잠들어 있었다.

잔디에 내려놓자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숲의 현자의 손이 올라가자 아이는 눈을 감고 다시 몸을 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누르고 있던 스케티 공작과 달리 증인으로 따라온 귀족과 기사들은 이제부터 무엇인가 시작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비록 앞으로 일어날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언질도 받지 못했지만 보통 일은 아니리라는 것에 다른 의견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과연 그들의 직감은 어긋나지 않았다.

잔디밭을 둘러싸고 있던 나무 사이에서 맹수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사람을 하나씩 물고서.

맹수들은 자신들이 물고 온 사람들을 잔디밭에 내려놓았다.

멍한 얼굴을 한 채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뱅트손의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잔디밭에 빠져들어 갔다.

그 모습은 마치 천천히 늪에 빠져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잔디밭에 빠져서 땅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공작의 손자를 잔디밭에 내려놓은 채 그 옆에 있었던 시녀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시녀 역시 예의 그 멍한 표정을 지은 채 땅속으로 천천히 빠져들어 갔다.

맹수들은 계속 사람을 날랐다.

그리고 잔디밭은 계속 사람을 먹어치웠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잔디밭이 변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잔디밭의 잔디가 점점 더 생동감 넘치는 초록색으로 변해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군데군데 흙이 드러난 곳도 있었는데 이제는 빽빽하게 들어찬 잔디로 인해 초록색의 융단이라도 깔아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귀족이라면, 그리고 기사라면 마초 중의 마초다.

아무리 남녀 귀족의 법적 권리가 동등하다고 해도, 대화를 칼로 하는 시대적 한계로 인해 남자 귀족의 기질은 거칠기 짝이 없다.

아무리 공포스러운 광경을 본다고 해도 일단 칼을 한 방 먹이고 시작할 사람이 적지 않다는 소리다.

그것은 이 자리에 있는 귀족과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보았을 때 그들 중 몇 명은 대번에 칼을 뽑아들었다.

공작의 명령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돌진해서 넝마를 걸친 사기꾼을 베어버릴 기세였다.

그러나 공작의 명령은 없었고, 잠깐 그들이 망설이는 사이 숲의 현자가 약속했던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잠을 자고 있던 공작의 손자가 천천히 자라기 시작했다.

눈썰미가 있는 자들이 먼저 공작의 손자에게 일어난 변화를 눈치챘을 때 공작 역시 손자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성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해졌다.

시녀의 품안에 안겨서 왔던 2살짜리 아이가 십대 초반의 몸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사이에 다시 십대 후반의 몸으로 자라났다.

원피스로 입었던 헐렁한 옷은 어느새 윗옷이 되어버렸다.

아이의 성장은 거기까지였다.

공작의 손자는 노란색으로 변색되어버린 잔디밭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곳까지 스케티 공작과 함께 동행한 귀족과 기사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위한 증인으로 입회했는지 깨달았다.

한때 황제 후보자이기도 했던 2살짜리 아이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스케티 공작의 정당한 후계자가 나타난 것이다.

*

뱅트손 공작의 군대가 괴멸적인 타격을 입으며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내가 칼마르로 돌아온 후였다.

교전 당사자와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소식을 입수한 것이다.

그것도 여러 곳에서.

이런 것을 볼 때마다 칼마르의 손이 닿은 사람이 참 많다는 것을 느낀다.

덕분에 나는 여러 곳에서 들어온 보고서를 읽으며 종합적인 전황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뱅트손 공작, 망했는데!

스케티 공작도 망했는데!

어이없기는 했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양패구상이었다.

적어도 몇 년간은, 어쩌면 10년까지도 전쟁은 없다.

물론 사소하게 티격태격할 수는 있지만 수만 명씩 동원되는 전투는 이제 불가능하다.

언제나 머리 위에 큼지막한 검을 매달고 살아가던 느낌이었는데 갑자기 그 검이 사라진 것이다.

나는 미소를 지으면 마지막으로 남은 보고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스케티 공작의 내부에서 날아온 첩보를 정리한 보고서였다.

이것만 읽고 리네아에게 갈 참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보고서를 넘기던 내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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