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80화 (180/248)

180. 전투의 끝, 생명의 끝

후방에서 전령이 도착했다.

뱅트손의 직속 부대에 속한 기사였다.

병사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깨끗하게 손질한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탄내는 숨길 수 없었다.

뱅트손은 주변의 귀족들을 물리고 전령으로 온 기사에게 가까이 오도록 명령했다.

가까이 온 기사를 보니 갑옷 안에 덧대는 모직옷감에 그을음이 묻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죽으로 된 신발에도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전령의 보고를 듣지 않아도 후방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일의 전말이 어떤지 듣기 전에 결론부터 물어보았다.

“남아 있는 식량이 얼마나 되나?”

“1할도 못 건졌습니다. 불을 끈 창고를 정리하고 있지만 추가로 확보할 수 있는 군량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며칠치를 더 확보하는 정도가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전령의 대답은 예상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뱅트손은 전령의 보고를 의심할 수도 없었다.

후방에 남겨놓은 부대는 뱅트손의 직속 부대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부대에게 보급품을 맡겨 놓은 것이다.

물론 전투 지역이 근거지에서 가까운 경우는 보급품을 지키고 나르는 일을 용병에게 전담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렇게 멀리 원정을 오는데 보급품을 용병에게 맡기다니!

그런 위험한 짓은 사양이었다.

자신의 군경험을 용병 부대를 지휘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용병 부대에 대한 믿음이 없는 뱅트손이었다.

조언이랍시고 근사하게 입을 놀리던 자들도, 경험과 실력으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하던 자들도 좀 더 많은 황금 앞에서는 기꺼이 칼의 방향을 바꾸어 잡았다.

아무리 후계 경쟁이 격렬했다고는 하지만 함께 지낸 시간 따위는 용병들에게 황금 한 조각보다도 더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뱅트손의 신뢰는 오직 자신이 직접 키운 자들과 공작령의 직속 부대에게만 향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우놀프! 브리타!”

공작의 호출에 거인을 방불케하는 거구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뱅트손 공작이 지슬리 공작을 죽이고 황도를 다 털어먹는 동안 스케티 공작의 발을 성공적으로 묶었던 자들이었다.

그리고 뱅트손 공작이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인 작품이기도 했다.

“각자의 기사들을 챙겨. 빠르게 움직일 생각이니까.”

“알겠습니다. 명령을 기다리겠습니다.”

뱅트손 공작은 우놀프와 브리타가 천막을 떠나자 오르기손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방금 알게 된 사실을 공유해 주었다.

오르기손은 남아있는 식량이 1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되자마자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마치 죽은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한참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후퇴하셔야 합니다.”

“이 병력을 다 끌고?”

뱅트손의 말에 오르기손은 두 손을 내저었다.

그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어조는 이전과 달리 강렬했다.

오르기손은 화를 내는 것처럼 열을 내며 뱅트손에게 그의 의견을 주장했다.

“불가능합니다. 얼마나 데리고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많은 병사들과 함께 움직인 경험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다 함께 후퇴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다 함께 죽을테니까?”

“예. 살 사람까지도 다 함께 죽을 겁니다.”

오르기손의 말에 뱅트손은 결단을 내렸다.

뱅트손은 즉시 종군하고 있던 귀족들을 불러들였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그리고 비정해야 할 때였다.

뱅트손은 이미 끝나 버린 일에 미련을 가지고 머뭇거릴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살 사람과 죽을 사람을 나누기 시작했다.

*

“이봐. 로스타. 저 괴물들이 한곳으로 모이는데?”

“즐로섹. 내가 입조심하라고 했지! 저 친구들이 화를 얼마나 잘 내는지 너도 잘 알잖아. 나는 고향친구의 목이 돌아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이렇게 멀리 있는데 설마 들리겠어? 그리고 보라고. 다들 우두머리 괴물에게 가잖아. 우리같은 용병나부랭이에게까지 신경 쓸 상황이 아냐.”

“씨팔. 수백 명이 저렇게 한군데에 모여있으니까 정말 무섭네. 마치 갑옷입은 거인족이라도 모여 있는 것 같잖아.”

용병들은 뱅트손이 각별히 아낀다는 거인기사들을 보며 잡담으로 불안을 달래고 있었다.

아무리 아는 것 없는 용병이라고 해도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다.

최근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일들은 제법 오랜 시간을 용병으로 살아왔다는 그들로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공성전을 시작하기 직전에 전격적으로 후퇴를 하다니!

그들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야생의 동물을 마음대로 다루는 적이라니!

그런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가던 새떼에 대한 불길한 소문이 병사들 사이에 떠돌기 시작할 때, 로스타는 문제가 생겨도 크게 생겼음을 깨달았다.

로스타는 고향 친구인 즐로섹과 달리 머릿속에 든 것이 좀 있는 편이었다.

영지의 말단 행정관으로 일하던 친척 어르신에게 한동안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척 어르신이 자신에 대한 교육을 마치기도 전에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용병 대신 말단 행정관으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이르게 친척 어르신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애매한 처지에 놓였던 로스타는 말단 행정관 대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용병이 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렇게 몰린 것에 대해 불만도 좀 가졌지만, 지내다 보니까 용병의 삶도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다.

돈도 많이 벌었고, 세상 구경도 많이 했다.

말단 행정관으로 영지에 묶여 있었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인생이었다.

유일한 문제는 이렇게 목숨을 위협받을 때가 있다는 것뿐이다.

로스타는 잔뜩 긴장한 채 주변의 상황에 귀를 곤두세웠다.

용병의 상식과 어긋나는 일이 벌어지면 제때 잘 도망치는 것이 가장 중요해진다.

높으신 분들은 분명히 용병을 버리는 패로 던져버리고 도망을 칠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얼마 남지 않은 보급품을 나누어서 휴대한 거인기사들이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두 발로 달리는대도 불구하고 그 덩치 때문인지 가볍게 달리는 말 못지 않은 속도였다.

말을 탄 귀족과 기사들.

뱅트손 공작령의 영지군.

귀족들이 지휘하는 각자의 영지군이 차례로 움직였다.

용병 부대는 그다음이었다.

원정군의 2/3가 용병으로 구성되었지만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우선권은 영지군이 가져간 것이다.

즐로섹은 뒤늦게 복귀한 용병대장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니, 대장님. 또 우리가 뒷전입니까? 그리고 식량은 어떻게 된 답니까?”

“없어. 식량같은 것은.”

“예?”

“짐말을 도축했던 곳까지 가야 해. 그곳에서 재보급을 받고 후퇴한단다.”

용병대장의 말에 즐로섹과 로스타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었다.

용병대의 2, 3인자에 해당하는 그들은 단숨에 뭐가 문제인지 깨달았다.

“후속하는 보급이 없다고요? 지금 식량이 없어서 탈영자가 나오는 판인데?”

“그래. 그러니까 애들 식량이랑 물관리 빡세게 해라. 어쩌면 재보급 따위도 없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돈을 주고 행군 순서를 바꿨다. 우리가 앞쪽이야. 왜 그렇게 했는지는 알지? 낙오자는 죽었다고 생각하면 될 거다.”

로스타와 즐로섹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퇴하는 길은 고난이었다.

뱅트손 공작의 직속 군대는 뒤에서 따라오는 군대의 속도는 생각하지도 않겠다는 듯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다.

거인기사와 기마부대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고, 도보로 행군하는 자들조차 쉬지 않았다.

그리고 뒤에서 따라가는 용병부대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엉망이 되어갔다.

처음에는 제법 정찰병도 돌리고 뒤에서 따라올지도 모르는 적을 경계하며 이동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기강이 무너져갔다.

이틀째 식량과 물을 배급하지 못하는 상황을 참아내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일부는 식량을 찾기 위해 행렬을 이탈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숲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몇 명의 용병이 쓰러졌지만 누구도 감히 반격을 위해 숲으로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설사 명령을 내렸다고 해도 따를 병사가 얼마나 될지조차 의문이었다.

간간히 쏟아지는 화살 공격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병사들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며 이동해야 했다.

부상병까지 챙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부상을 입은 병사는 버려졌다.

용병대의 간부들도 자신의 힘으로 걸을 수 있다면 따라오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어쩔 수 없다는 태도였다.

같은 용병대의 동료들이 부상자의 무기와 소지품을 거두기도 했지만 그것조차 귀찮아하는 자들도 있을 정도였다.

빠른 이동.

오직 그것에만 모든 병사들의 신경이 집중되었다.

행렬의 뒤편에서 울려퍼지는 낙오병들의 비명과 고함소리가 병사들의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상황은 밤이 되어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비명 소리는 더 멀리 가고, 공포의 전염도 더 빨라졌다.

남겨진 자들이 내지르는 비명은 병사들이 밤에도 쉬지않고 계속 걷도록 강요했다.

해가 뜬 후에는 다시 어제의 반복이었다.

더 이상 체력적으로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본격적으로 낙오하기 시작했고, 무기를 버리는 자들도 속출하는 것이 어제와 다른 점이랄까?

로스타와 즐로섹 역시 어제와 같은 하루가 이어지는 것에 기가 질리는 느낌이었다 .

특히나 그들의 대장이 밤중에 화살에 맞아서 즉사하는 통에 더욱 그랬다.

그래도 그들은 용병대의 선임으로서 용병대를 이끌어야 했다.

그것은 그들의 생존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뭔가 먹거나 마실 놈들은 행렬 안쪽으로 들어가서 눈치껏 먹고 나와. 다른 부대 놈들의 눈에 띄면 싸움난다.”

“무기 버리지 마. 갑옷 벗지 마. 갑옷 없는 놈이 화살의 표적이 된다. 가장 먼저 죽을걸.”

“낙오자는 버릴 거다. 못 챙겨준다. 여기서 낙오되면 죽는 것 알지?”

“앞만 보고 걸어. 우리는 행렬 중간 정도라서 안전하다. 지레 겁먹고 날뛰지 마.”

필사적인 단도리 덕분인지 아니면 죽은 용병대장이 그들의 행군 순서를 앞쪽으로 당겨놓은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용병대는 낙오자를 거의 내지 않고 보급 창고가 있는 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용병으로 구성된 부대의 거의 절반이 중간에 증발해버린 것을 감안하면 정말 훌륭한 통솔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경험많은 용병이고, 뛰어난 통솔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없는 식량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로스타와 즐로섹은 완전히 불타버린 주둔지를 보고 허탈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즐로섹은 불에 탄 자리를 직접 뒤적이며 화를 냈다.

“다 탔어. 숯뿐이야. 생긴 것은 쌀알인데 숯이라고!”

“먼저 간 놈들이 다 챙겨갔겠지.”

“우리보고 죽으라는 이야기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추격해오는 스케티 공작의 병사들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것이지. 자기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

로스타는 용병 인생 전체를 통틀어 최악의 상황에 처했음을 실감했다.

그의 휘하에 있던 용병들도 같은 생각인지 둘을 둘러싼 채 멍청한 얼굴로 불에 탄 창고를 보기만 했다.

그때 즐로섹이 중얼거렸다.

“항복할까?”

“받아주겠냐? 지나오는 영지마다 그 지랄을 하고 왔는데? 오히려 좋다고 목을 매달지 않을까?”

“역시 그렇겠지?”

“아니면 광산행일지도?”

“몇 년 살지도 못하고 죽겠군.”

로스타는 즐로섹과의 대화를 끝내고 자신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부하들에게 선언했다.

“들었지? 살고 싶다고 항복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러니까 우리는 계속 이동한다. 그게 싫은 자는 여기서 대기하다가 항복해라. 전사자로 간주하고 보수는 고향으로 보내주겠다.”

그러나 로스타의 호기로운 선언은 결국 선언으로 끝나고 말았다.

지금까지 화살로만 공격해 왔던 스케티 공작군이 본격적으로 실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야생의 맹수와 말로 구성된 혼성 기병대가 다시 등장해서 전의를 잃은 용병들을 몰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학살이 아니라 생포가 목적인 듯 저항하지 않는 자는 죽이지 않고 끌고 갔다.

특히, 조금이라도 실력이 있어보이는 자는 집요할 정도로 노려서 결국은 생포해 버렸다.

로스타 역시 며칠이나 도망을 쳤지만 결국 곰기병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그것으로 그의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그의 생명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생명이 끝난 것은 조금 더 후, 다른 장소에서였다.

스케티 공작의 2살짜리 손자 앞이 그가 죽은 장소였다.

그제서야 그의 전쟁도, 그의 생명도 모두 끝이 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