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전면적인 후퇴
아무래도 나는 신의 후보자 자격으로 이 세상에 끌려온 모양이다.
그것도 서바이벌 컨셉의 경쟁무대에 말이다.
하이랜더란 영화가 생각났다.
불사자들끼리 죽고 죽인 끝에 상대의 힘과 지식을 모두 흡수한 최후의 1인만이 남아서 소원을 이루는 내용의 영화다.
지금 내게 벌어진 일은 그 영화의 내용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상대의 힘과 지식을 흡수한다는 것도 비슷했다.
나는 내 의지에 따라 바닥에서 떠오른 돌을 잡아서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내 눈앞에 다시 돌멩이를 띄웠다.
염동력.
이것은 볼포토의 능력 중 하나였다.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열이 받았다.
날 보고 신이 되라고?
영원히 살라고?
내게는 어떤 의사도 묻지 않고서?
나를 죽고 죽이는 서바이벌판으로 내던진다고?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그래. 뭔가 이상하기는 했다.
적어도 중세 정도는 되는 문명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철학도 없고, 그럴듯한 종교도 없다는 것을 무심코 넘긴 내가 병신이지.
문과쪽의 전공을 했다고 하지만 마케팅이니, 조직론이니 하는 것이나 배웠다.
다들 역사가 짧은 실용학문이다.
따지고보면 인문학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로는 과학을 전공하는 이과생 못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 세상에서 배운 것도 사람 죽이는 일이 전부였다.
그래서 이 세상의 문명에 결여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냥 내 눈앞의 일에만 집중하며 정신없이 살았다.
그것도 두 번이나.
그리고 그 대가로 가족과 작위를 쟁취해냈다.
작은 행복을 손에 쥔 것이다.
이제는 연달아 전쟁을 치른 끝에 그래도 큰일을 모두 수습하고 한 템포 쉬어간다는 느낌이었는데!
나는 기말고사 직전에 감당할 수 없는 과제를 받아든 4학년이 된 기분이었다.
실수하면 졸업을 못한다.
합격한 회사도 포기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식은땀이 등에 흐르는 느낌이었다.
위기감이 나를 엄습했다.
지금까지는 인간을 상대했지만 앞으로는 인간인지 아닌지 모를 자들까지 상대해야 할 판이다.
그런데 아무리 긍정회로를 돌려도 과연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
상태창과 염동력을 가진 인간이 평범하다고?
그렇다.
내 능력과 상관없이 내 본질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라는 것은 결국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먹은 것이 내 몸을 만들고,
내가 경험한 것이 내 정신을 구성한다.
나는 인간의 경험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나는 신이 아니다.
눈앞에 돌맹이를 띄운 채 앉아 있던 나는 인기척에 현실로 돌아왔다.
에할름이었다.
그는 내가 들어왔던 통로를 통해 주춤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 혼자 있는 것을 보고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보고 공포와 경악으로 질려버린 인간의 눈이었다.
하지만 그는 도망치거나 굳어버리지 않았다.
대신 곧장 몸을 던져서 내 앞에 부복했다.
이마와 양팔, 양다리까지 다 바닥에 착 달라붙은 것이 아주 제대로 된 오체투지였다.
오체투지는 이곳의 문화가 아니다.
제국에서는 황제에게조차 고개를 숙이고 한쪽 무릎을 꿇는 정도로 경의를 표한다.
전쟁터에서의 군례는 손을 가슴에 대는 것이 전부다.
상위 작위나 직책을 가진 자에게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오체투지라니.
이 사람은 이런 예의를 어디서 배운 것일까?
“오체투지로군요. 경은 그것을 어디에서 배웠습니까?”
“이곳에 있던 존재가 가르쳐 줬습니다.”
말투는 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우리 사이의 분위기는 전과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도 서로 공대하던 나와 에할름은 이제 없었다.
에할름은 나를 명백히 윗사람으로 대했다.
“경은 내게 설명할 것이 많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무엇을 알기 원하십니까?”
나는 볼포토가 사라지기 전 살짝 형체를 드러냈던 이십여 명의 사람을 기억했다.
“나 말고 여기에 집어넣은 인간들이 몇 명이었습니까?”
“이십 명이었지만 아무도 입구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이 안까지 들어온 분은 윌리엄 백작 각하가 유일하십니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그래도 그들 중 하나도 빛의 기둥조차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은 의외였다.
생각보다 신의 후보자가 되는 조건이 까다로운 모양이다.
“경은 볼포토를 어떻게 찾아낸 겁니까?”
“그의 이름이 볼포토였습니까?”
“이름조차 몰랐군요.”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돌멩이나 띄울 정도에 지나지 않은 염동력과 마찬가지로 독심술 역시 보잘것없는 위력이었다.
그러나 거짓말과 진실 정도는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에할름은 자신이 그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의 당혹감이 그대로 내게 전달되었다.
아무래도 볼포토의 독심술은 단순한 마인드 리딩이 아니라 마인드 컨트롤까지 겸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저를 불렀습니다. 멀리서 제 의식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저는 그가 말하는 대로 움직여서 이곳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나는 에할름을 차근차근 신문했다.
그 결과 에할름이 생각처럼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볼포토를 위해 예상보다 많은 일을 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볼포토는 에할름을 편리한 도구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에할름에게 매우 의존적이었다.
어쩌면 에할름이 없었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할름은 볼포토에게 맹목적이었다.
이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유인해 오고, 결국은 나까지 불러올 정도로 말이다.
왜 그런지는 이해한다.
에할름이 볼포토에게 어떤 기대를 품고 있었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선제적으로 대응하려다가 황궁 도서관장직까지 날려먹은 자 아니었던가.
그래도 나는 그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3백 년 전의 내전을 종식시킨 그자가 맞습니까? 8명의 선제후를 제압하고 내전을 종식시켰다기에는 너무 약하던데? 뭔가 오해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너 속은 것 아니냐는 물음이다.
그가 아무리 사람의 정신까지 주물러댈 수 있다고 해도, 8명의 선제후에게 동시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에할름의 대답은 명확했다.
“그가 맞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백작 각하께서 만나본 그는 절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진짜 몸과 가짜 몸으로 나누어졌다고 말했습니다. 별의 섭리를 거부하는 가짜 몸이 멋대로 떠나버려서 회복을 위해 이곳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본래의 그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만드는 위엄이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도 감히 그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몸이 둘로 나누어졌다?
이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볼포토는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나는 반신불수가 된 자를 상대로 이긴 셈이다.
만약 그가 반신불수가 되지 않았다면?
······글쎄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가 내 상태창을 눌러보며 신기해하고 있을지도.
“그렇다면 이십 년 넘게 이곳에 숨어있었다는 이야기군요.”
“예. 그가 저를 불러올 정도로 회복된 것이 최근이라고 했습니다.”
볼포토는 약해진 자신을 보충하기 위해 사람들을 흡수해댄 모양이다.
신비에 접한 사람들을 말이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볼포토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러나 볼포토가 인간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보지 않았다는 것은 알겠다.
인간을 보양식으로 취급 하다니!
이것은 도덕적인 면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를 도운 에할름 역시 용납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고 해도, 어쩌면 암시 같은 것에 걸려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렇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무리였다.
그래서 그에게 기회를 줘 보기로 했다.
“에할름. 경은 어떻게 할 겁니까?”
“윌리엄 백작 각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볼포토의 말대로라면 분리되어 떠났다는 자, 가짜 몸이 세상을 떠돌고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를 추적할 수 있겠습니까?”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경은 가짜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낼 생각입니까?”
“가짜 몸도 그와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신비에 접한 자들이 사라지거나 살해당한 것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나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면서 내 자필 편지를 하나 써 주었다.
대신 절대로 먼저 다가가지는 말고, 추적을 계속하되 즉시 나에게 연락을 할 것을 명령했다.
인간을 동등한 존재로 대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만약 추적당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내 걱정에 에할름은 미소와 함께 자신이 믿는 바를 알려주었다.
“아쉬리프가 도울 것입니다.”
“아쉬리프? 암살단 아닙니까? 아크후, 무카실라와 함께 가장 이름있는 암살단 중 하나로 기억합니다. 그런 자들이 경을 돕는다고요?”
“약한 자의 검이며 억울한 원한을 풀어준다는 전설 속의 암살단이지요. 하지만 실체는 황제의 숨겨진 비수입니다.”
“아쉬리프가 황제의 비밀 조직이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황제의 위엄을 범한 자들을 벌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어떻게 약한 자의 검이라는 명성을 가지게 된 겁니까?”
“황제의 위엄을 범할 정도로 야심이 넘치는 자들은 약한 자들의 원성도 쉽게 사는 법이니까요. 위장은 쉬웠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저택의 기사들이?”
“그렇습니다.”
나는 에할름을 다시 봤다.
그는 황궁 도서관의 관장이었다.
첩보 조직에 한 발을 걸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역시나 쉽게 볼 수 없는 자였다.
그에게 기회를 주기로 한 일은 잘한 결정 같았다.
*
하루를 굶으면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
이틀을 굶으면 무기를 버린다.
삼일을 굶으면 탈영을 한다.
뱅트손이 어렸을 때 지휘했던 용병대의 고참 용병이 알려준 격언이었다.
뱅트손은 지금은 늙어 죽었을지도 모르는 그 용병의 격언이 헛소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후퇴를 시작한 지 이틀 만에 와해되는 부대가 나온 것이다.
“단 하루를 굶었다고 부대가 흩어진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제대로 식량을 챙기지 않은 부대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뭐야?”
“후속해오는 보급대를 믿고 도착할 정도의 식량만 챙겼다고 합니다.”
억지로 분노를 참고 있는 뱅트손 앞에서 오르기손은 자신이 파악한 결과를 건조하게 보고했다 .
뱅트손은 자신의 결정이 이 모든 사단을 불러온 원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급품을 후방에 놓아둔 채 며칠 만의 식량만을 병사들이 각자 알아서 휴대하도록 하고 이동한 것이 독이 된 것이다.
심지어 후속해 오는 보급대조차 새들에게 공격당해서 모조리 불에 타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병사들의 동요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후방에 쌓아둔 보급품의 안전까지 믿지 못하게 된 병사들은 각자 알아서 식량을 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뱅트손 공작군끼리의 사소한 전투가 몇 번이나 벌어지기까지 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심리적으로 몰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새떼가 기름이 든 나무통을 잡고 이동하는 것은 분명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만약 저 기름이 보급품 위에 쏟아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상상하며 불안에 떨었다.
문제는 병사들이 상상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꽤 높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병사들의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