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78화 (178/248)

178. 서바이벌

볼포토.

의지.

이름의 의미에 집중하다가 발음의 근사함은 갖다 버린 모양이지만, 이 사람은 진지했다.

그리고 진지한 만큼 정상이 아니었다.

만약 지구라면 이런 종류의 사람은 그냥 중2병 걸린 컨셉러 정도의 취급을 당할 것이다.

자아가 좀 비대한 어딘지 이상한 사람.

딱 그 정도의 취급을 당할 것 같다.

아니, 이 정도의 피지컬에 잘 생기기까지 했으니 어쩌면 소수의 추종자를 모아서 컬트를 만들고 그들 사이에서 사이비 교주로 군림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겠다.

설사 아무런 능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이 세상은 지구와 다르다.

신비가 존재하고, 신비에 접한 자는 기적을 일으킨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고 웃긴 것이라고 해도 그것에 어떤 가능성이 숨어있을지 어떻게 알겠나.

하물며 저자는 표층심리를 읽어내는 독심술과 스스로 공중에 떠 있는 염동력까지 선보였다.

지금까지 만나본 신비에 접한 자들 중에서 저 정도로 강력한 자는 얼마 없었다.

최근에 만나본 자들 중에서는 피요트르가 떠오른다.

그러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도를 생각해 본다면 공격 일변도의 화염만을 다루던 피요트르에 비해 훨씬 강력한 존재로 보아야 한다.

게다가 그는 아르보그 공작조차 사라지게 만들어버린 빛의 기둥 안에서 태연하게 누워있었다.

어쩌면 그와 나 사이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공통점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경계심을 잔뜩 끌어올렸다.

“좋다. 볼포토. 앞으로 당신을 볼포토라고 부르겠다.”

[좋다. 윌리엄. 나는 당신을 윌리엄이라고 부르겠다.]

에할름은 편지에서 나에게 선제후들이 모두 두려워하던 그 존재인 저자와 만나달라는 요청을 했다.

지금 벌어진 내전을 끝내기 위해 그를 만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여기와서 보니까 에할름 역시 정확한 이유는 모르는 눈치였다.

에할름은 그저 내전을 끝내고 제국을 정상화시키는 것에 온 신경이 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이유는 폴포토, 이자에게 물어야 했다.

“당신이 에할름에게 나를 만나보고 싶다고 요청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당신은 내 이름도 지금 알게 된 모양이군. 볼포토. 당신이 나를 만나고 싶다고 요청한 것이 맞나?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만나기를 요청했던 자가 그대 하나라고 생각하나?]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드는 답변이었다.

나는 즉시 미니맵을 띄웠다.

그러나 붉은 점은 보이지 않았다.

미니맵이 나를 향한 적의를 잡아내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바로 코앞에서 적의를 뿜어내는 것까지 모를 정도로 병신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래서 한 번만 더 참았다.

하지만 내 인내는 의미가 없었다.

갑자기 눈앞의 남자의 태도가 이상해진 것이다.

볼포토는 예고도 없이 내게 확 다가왔다.

허공에 뜬 채 미끄러지듯 날아오더니 내 앞에 서서 나를 내려보았다.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다.

나 역시 지지않고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이글이글 불타는 눈이었다.

그의 눈은 무엇인가 간절히 바라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눈이었다.

그 눈을 보자 나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던 가설 하나를 반쯤 폐기할 수 있었다.

폴포토가 이 세상의 신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말이다.

저런 세속적인 눈을 한 신이라니!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저런 눈은 욕심많은 인간이나 가진 것이다.

적어도 신이라면, 아무리 바람둥이에 난봉꾼이라고 해도 그럴만한 위엄이 있어야 한다.

믿음의 상대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신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이곳은 지구와 다른 세상이니까 가능성은 남겨두도록 하자.

[너구나! 별의 의지가 불러온 자가! 너에게서 별의 의지가 느껴진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라고! 혼자서 멋대로 떠들지 말고!”

그러나 폴포토는 내 말을 무시했다.

그는 귀중한 예술품이라도 만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뭐 이런!

남자의 손길 따위는 절대 사양이었다.

리네아를 두고 온 것 때문에 영 마음이 안 좋았는데 이렇게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들다니!

나는 다가오는 그의 손길을 쳐내며 허리에 있는 칼에 손을 얹었다.

“무례하군. 당신은 예의라는 것을 배운 적도 없나?”

그러자 폴포토의 반응이 거칠어졌다.

그는 내밀던 손을 거둬들이더니 좌우로 손을 흔들었다.

엄청난 압력이 내게 향했다.

그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만으로 내 육체가 비틀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사지가 꺾이고, 뼈가 부러져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압력이었다.

그러나 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상태창에 의하면 체력이 MAX인 인간이다.

인간이 나를 힘으로 누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입을 악물고 압력을 버티며 칼을 뽑아들었다.

[내 의지에 굴복하지 않다니! 신비의 근원에 흡수되지 않는 자는 여럿 있었지만 나와 동등하게 서 있던 자는 없었다. 너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선택된 자임이 틀림없다.]

“젠장. 알아듣게 이야기하라고!”

나는 손에 든 칼을 휘둘렀다.

아주 깔끔하게 들어간 내려베기였다.

가로로 놓은 통나무 물론 강철로 된 봉이라도 양단할 수 있는 강력한 일격이었다.

그러나 내 칼은 폴포토의 손에 가로막혔다.

그는 칼날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살덩이와 뼈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면 단숨에 양단해 버릴 공격을 맨손으로 막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손에 잡힌 칼이 무너졌다.

빛의 기둥에 흡수되어 사라져간 사람들처럼 미세한 가루처럼 변하며 허공 중에 흩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의 두 손이 다시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두 손을 맞잡아 갔다.

폴포토의 양손을 맞잡는 순간 나는 거대한 물살에 쓸려나가는 것 같은 느낌에 두려움을 느끼고 말았다.

그것은 근원적인 공포였다.

거대하고 강력한 흐름에 휩싸여 피부의 분자부터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잃고 거대한 흐름 속에 하나로 녹아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바로 코앞에 있는 폴포토의 눈을 본 순간 나만이 두려움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욕망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던 그의 눈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폴포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공포에 질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말에서 배어나오는 두려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너는 나와 합쳐지지 않는 것인가? 왜 우리가 함께 신비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역시 이 자는 신 같은 것이 아니었다.

신비를 접한 자 중에서 특별히 강하고 미쳤던 놈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자가 신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완전히 폐기했다.

두려움에 벌벌 떠는 신이라는 그런 신이 어디에 있나.

게다가 달릴 것 다 달린 놈이 스스로를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

쓰지도 않을 것을 달고 있는 신이라니 웃기는 일이다.

당장 천사부터가 중성 아니었던가?

나는 만만하게 보이기 시작한 그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전의를 다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를 아래로 내려다본 순간 나는 더 이상 흐름에 휘말리지 않게 되었다.

그 강렬한 흐름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간다는 느낌에 고양감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순간 나는 지하의 공동에서 일어나 우뚝 섰다.

내 시선이 산 하나를 한꺼번에 아래에 두었다.

산에 있는 모든 것을 동시에 알 수 있었다.

한 마리의 토끼가 풀을 뜯으며 포만감을 느끼는 것도,

거미가 친 그물에 걸린 꿀벌의 단말마 비명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하나의 기분도,

산에 숨겨져 있는 보물과 무기도,

산의 아래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광물도,

산에서 산으로 흘러가는 지맥과 그 흐름도,

산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의 위치와 생각까지도.

나는 그 모든 것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동시에.

이것은 바로 전지 全知, 사물과 현상의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할 수 있다는 바로 그것이었다.

비록 산 하나라는 좁은 지역이지만 이곳에서 그리고 이 순간에 나는 전지했다.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위대한 존재라도 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아득히 높은 곳에 서 있던 나는 한순간에 다시 지하의 공동으로 돌아왔다.

과도한 전기의 흐름에 퓨즈가 나가버리듯,

내 고양감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한 것 같았다.

실제로 밝은 태양 아래에서 어두운 동굴 안으로 돌아왔으니 별로 다르지도 않다.

나는 천재였던 기억을 가진 바보가 되어 버렸다.

[보았나?]

폴포트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본 것을 그도 본 적이 있었다면 그가 어떤 감정일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았군.]

그는 아르보그 공작처럼 가루가 되어서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다.

빛의 기둥안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내 팔뚝에 내려앉은 가루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마치 내게 흡수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라졌다.

그가 사라질수록 빛의 기둥은 점점 밝아졌다.

[다시 볼 수 있다면!]

폴포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가루로 변해서 흩날렸다.

중간중간 전혀 낯선 얼굴들이 흩날리는 가루 사이에서 음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늙은이에서 어린이까지, 남자와 여자까지.

거의 이십 명에 달하는 얼굴이었다.

그와 하나 된 자들.

그가 흡수한 자들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얼굴은 폴포토 그 자신이었다.

그는 내게 경고를 남겼다.

[선택된 자여. 내 절반을 조심하게. 내 절반은 나와 달리 별의 의지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르는 자니까.]

그말을 끝으로 더 이상 가루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지하의 공동에 맹렬한 회오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살짝 공중에 뜬 나를 중심으로 부는 바람이었다.

그것은 굴러다니던 돌덩이조차 바람에 휘말려 내 주위를 돌 정도로 강한 회오리바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있는 곳은 평온하기만 했다.

마치 태풍의 눈처럼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빛의 기둥 밖과 안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폴포토가 그랬던 것처럼 가볍게 공중에 뜬 채 주변의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빛의 기둥이 천천히 줄어들었다.

5미터는 되어보였던 직경이 천천히 줄어들면서 동시에 빛도 어두워졌다.

마치 빛의 기둥 자체가 내게 흡수되는 것 같았다.

그때, 아르보그 공작이 있었던 그 공간에서와 다르지 않은 경험이었다.

결국 빛의 기둥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어두워진 공동에 앉아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내게 벌어진 일은 단순한 환생이나 빙의 같은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뭔가 목적이 있어서 이 세상에 끌려온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목적이 무엇인지도 대충 짐작이 간다.

이 정도로 들이대는데 모르면 멍청한 것이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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