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의지 또는 인격화
에할름은 여전히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다.
시간이 조금 흘렀지만 겉모습은 변한 부분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조금 젊어진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활기가 넘쳐 흘렀다.
“처음 만났을 때 남작이었던 이가 백작으로 승작을 해서 나타나다니. 지금이 혼란의 시대가 맞기는 한 모양이군요. 윌리엄 백작. 오랜만입니다.”
“여전히 건강하시니 다행입니다.”
나는 반갑게 나를 맞이해주는 에할름에게 미소를 보였다.
그러나 경계심을 늦출 수는 없었다.
에할름은 실패로 인해 황궁 도서관의 관장을 내려놓고 은거한 사람이었다.
한때는 강력한 권력을 가졌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적어도 그는 황궁 도서관의 세력을 계속 이용할 수 없는 처지다.
그런데 이곳 저택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숙련된 기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요소요소를 지키고 있었다.
이것은 에할름이 개인 세력을 여전히 거느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면 외부의 세력과 손을 잡았거나.
내가 순스발에서 보았던 모습은 그냥 위장이었던 것이다.
비록 과거에 그가 내게 호의를 보였다고는 하지만, 그때의 에할름과 지금의 에할름이 처한 상황은 다르다.
과거의 에할름은 그 존재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지금의 에할름은 그 존재가 살아있다고 말한다.
과연 내게 향했던 과거의 호의가 여전할까?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과연 그는 인사를 나누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내게 질문부터 던졌다.
“백작은 편지의 내용을 믿고 온 것입니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에할름 경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이겠지요.”
내 말에 에할름은 과연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십시오. 백작.”
그는 내가 자신을 뒤따르는 것을 확인도 하지 않고 나를 접견하던 방을 떠나서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갔다.
나는 그와 함께 걸으며 자연스럽게 주변에 따라붙는 기사들을 눈여겨 보았다.
갑옷을 입고 있지만 갑옷에 무슨 조치를 취해놓았는지 갑옷에서 당연히 나야 할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심지어 걷는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갑옷까지 신경을 써서 따로 만들었고, 움직임조차 통일되어 있다니.
이들은 필요에 의해 급하게 모아들인 자들이 아니었다.
공통적인 과정을 통해 양성해낸 기사임이 분명했다.
그 정도의 조직과 재력이라면 절대로 역사가 짧은 조직은 아니다.
아니면 제법 세력이 있는 귀족을 등에 업었을 수도 있다.
아무래도 에할름은 황궁 도서관장이었던 시절과 별로 다르지 않은 현재를 살고 있는 모양이다.
복도는 길었다.
특히, 지하로 연결되는 계단을 내려간 후 나타난 복도는 보통 길이가 아니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요새화된 저택을 넘어 다른 곳으로 연결되는 통로임이 틀림없다.
그것도 아주 먼 곳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식이면 정말 대공사가 된다.
산속에서 벌이기에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과연 얼마지나지 않아서 우리가 걷는 통로는 더이상 복도가 아니게 되었다.
그냥 동굴이었다.
군데군데 손질한 부분은 있지만 원래부터 존재했던 천연동굴임이 명백했다.
그리고 복도에서 동굴로 바뀌는 순간 복도에 걸려있던 작은 등불도 더 이상 걸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통로는 여전히 밝았다.
나는 이것을 전에 본 적이 있었다.
아르보그 공작이 사라지던 바로 그 동굴에서 말이다.
빛의 기둥을 제외한다면 이곳이나 그곳이나 크게 다른 면이 없었다.
나는 즉시 나를 따르던 경호기사들에게 명령했다.
“경들은 이곳에서 대기하라.”
“하지만 백작 각하.”
“명령이다. 이곳에서 대기하며 내 지시를 기다려라.”
경호기사들은 나를 홀로 둘 수 없다고 반발했지만, 평소와 달리 정색을 하고 내리는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따른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전투 준비부터 하는 모습을 보니 무엇이든 꼬투리가 생기면 당장 나에게 달려올 것이 뻔히 보였다.
나는 경호 기사들을 뒤에 남기고 에할름을 따라 동굴 안으로 계속 따라 들어갔다.
“보통 동굴이 아니군요.”
“스스로 벽이 빛나는 동굴이니 보통 장소는 아닙니다.”
“이런 곳에서 에할름 경이 보여주겠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점점 기대가 되는군요.”
내 말에 에할름의 표정에서 약간의 슬픔이 묻어나왔다.
그러나 그런 것 치고는 또 그의 눈에서 보이는 감정이 보통 격렬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가까운 가족이 죽었을 때의 그런 강렬한 슬픔을 억지로 숨겼을 때 새어 나오는 그런 종류의 슬픔이랄까?
하지만 에할름은 금방 자신의 표정을 지웠다.
언제 마음이 흔를렸냐는듯이 금방 태연한 어조로 내게 말을 건넸다.
“역시 경은 내가 보낸 편지의 내용을 믿지 않았군요.”
“글쎄요. 너무 중요한 내용이라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잠시 후에 직접 확인하시지요.”
그 말을 끝으로 에할름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조금이라도 정보를 더 끌어내고 싶었다.
특히,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조직에 대해 무엇이든지 알고 싶었다.
“저택이 정말 잘 지어졌더군요. 몇 배의 병력이라도 무리없이 방어가 가능해 보였습니다.”
“이 저택은 원래 황궁 도서관에서 관리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치고는 황궁 도서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 같던데요?.”
“그랬을 겁니다. 정말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곳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곳은 원래 황궁 도서관에서 신비에 대해 연구하던 곳 중 하나입니다. 지금은 은신처로 쓰이고 있습니다만.”
은신처?
설마 진짜 그 존재?
그렇다면 누구로부터의 은신처라는 것이지?
그러나 의문을 품은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통로는 끝났다.
통로의 끝에는 빛의 기둥이 촘촘하게 서 있었다.
마치 더 이상은 누구도 지나갈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저곳을 지나가시면 됩니다.”
에할름은 자신의 앞에 있는 빛의 기둥들을 가리켰다.
빽빽하게 들어선 빛의 기둥 사이는 사람 하나는커녕 고양이조차 지나가기 못할 정도였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대놓고 빛의 기둥을 가리키는 에할름을 보자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나는 아직도 빛의 기둥에 닿아서 사라지던 아르보그 공작과 그의 거인족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육체는 아주 고운 가루로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고운 가루는 기화하듯 사라졌다.
허공 중으로 사라진 그 고운 가루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었다.
바닥에 남은 것은 그들의 옷이나 무기 같이 원래 그들의 몸에 속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때 빛의 기둥은 내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도움을 주었다.
나는 천천히 빛의 기둥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빛의 기둥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따뜻한 느낌이었다.
빛의 기둥 안으로 들어간 내 손가락은 가루로 흩어지지도 않았고 허공 중으로 흡수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엇인가 따뜻한 기운이 내게 흘러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에할름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아마 빛의 기둥에서 사라졌던 것은 아르보그 공작 일행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저렇게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에할름의 부하들 역시 같은 일을 당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내게 이곳을 지나가라고?
미리 설명도 하지 않고?
애초에 에할름을 믿지도 않았지만 이것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할름에 대한 나의 평가가 한단계 더 떨어졌다.
나는 그를 일별한 후 빛의 기둥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빛의 기둥은 내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빛의 기둥으로 빼곡하게 차 있는 통로는 그리 길지 않았다.
대략 10미터 정도.
나는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아서 거대한 공동에 들어설 수 있었다.
돔구장을 방불케 할 정도의 거대한 공간이었다.
나는 천천히 공동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거대한 빛의 기둥.
공동의 정중앙에 거대한 빛의 기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벌거벗은 사람 하나가 허공에 떠 있었다.
이쪽 세상에서는 드물기 짝이 없는 검은 머리카락을 한 남자였다.
그러나 피부는 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
황인종을 살짝 기대했던 나로서는 약간의 실망까지 느끼는 순간이었다.
[왜 실망을 하는 것이지? 그리고 황인종은 뭐지?]
귀를 통해서 들린 말은 아니었다.
머리를 통해서 직접 들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 이해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는 내 머리속을 읽은 눈앞의 남자를 향해 경계심을 잔뜩 높였다.
[그대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군. 이러면 그대와 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내게 열린 마음을 보여달라.]
다행히 경계심을 품고 주의하면 내 머리 속을 읽는 것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와의 대화에서 대등한 위치를 획득하기 위해 곧장 항의했다.
패를 까고 도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의 머리속을 읽는 것은 무례한 짓이다. 이런 무례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이러면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내 머리 속을 다 읽게 해 주면서 저 자와 대화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환생자이고 다른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저 존재가 알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이든 반응하기를 기대하면 허공에 떠 있는 그를 잠시 노려봤지만 그로부터 어떤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대화를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두 걸음을 내딛는 순간 다시 그의 말이 들려왔다.
나는 다시 그를 향해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대가 입으로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내게 그대의 진심을 보여달라.]
“인간들은 모두 이렇게 대화를 한다. 당신이 나와 대화를 원한다면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해야 한다.”
[당신은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적어도 나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겠다.”
그 말에 허공에 떠 있던 남자가 나를 향해 몸을 바로 세웠다.
그제서야 나는 그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그냥 인간이었다.
키는 대략 2미터 정도.
신체의 균형은 이상적이었고, 모델을 하면 어울리겠다 싶은 마른 근육의 소유자였다.
거기다 엄청난 미남이었다.
이 정도로 잘 생긴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인간치고는 전체적으로 큰 편이지만 거인족을 생각하면 그렇게 압도적인 피지컬도 아니다.
“나는 윌리엄이라고 한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나는 이름이 없다.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그리고 함부로 이름을 지어서도 안된다. 이름이 만들어지는 순간 그 이름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뭐라고 부를까? 그냥 당신이라고 하면 될까?”
[당신이라는 단어는 너무 강력한 단어다. 계속 그렇게 나를 당신이라고 부른다면 윌리엄이 생각하는 당신이 내가 될 것이다. 그러니 나를 볼포토라고 불러달라. 그것은 의지를 의미하며 내 본질에 가까운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