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믿지 않아도 움직여야 할 때가 있다.
*
처음에 이 세상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이곳이 지구 역사의 과거 중 어느 한 시기인 것으로 착각했었다.
이를테면, 중세 유럽 같은.
그러나 내 착각은 신성 마르스홀롬 제국이라는 국가명을 듣는 순간 깨졌다.
아무리 교양 수준으로 세계사를 배웠다고 해도 그런 이름을 가진 거대 제국이 지구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 이후로는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 살았다.
능동적인 삶을 살기에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만약 평화로운 세상이었다면 그냥 평범한 시골 기사로 늙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납치되어 노예로 끌려갔고, 거기서 탈출했더니 이번에는 내전에 휘말려 버리는 통에 인생 난이도가 헬모드로 변해 버렸다.
나는 노예에서 수적으로 다시 산적으로 연달아 전업을 하며 살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 때 느낀 것이 지구의 인간이나 이 세상의 인간이나 다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신분이 높아서 타고나면서부터 다른 사람의 위에 서든, 무력이 강해서 평범한 사람 수백 명을 상대할 정도가 되든, 아니면 신비를 접해서 인간같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한다고 해도 결국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한 것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생존하기 위해 아등바등 목숨을 걸고 뛰다 보니까 세상을 보는 시야는 좁아졌지만, 대신 인간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게 된 덕분에 가지게 된 통찰이었다.
그리고 번창하는 상업 영지의 백작이 된 지금도 그때 갖게 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인간에 대한 불신을 기본으로 탑재하고 있는 것이다.
에할름이 보낸 편지의 첫 부분을 읽었을 때의 충격이 지나가자 편지의 신뢰여부보다는 이런저런 질문이 먼저 떠올랐다.
그 존재를 발견했다고?
제국을 선거후 제도로 묶어서 내전을 끝내 버린 그 존재?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게 행방불명된 그 존재를?
과연 편지의 내용을 믿을 수 있을까?
그래, 편지의 내용대로 그 존재를 발견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들은 내게서 뭘 원하는 것일까?
나는 그가 내게 보낸 편지의 나머지를 읽고 다시 발드리에게 건넸다.
그런 나를 발드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기만 했다.
발드리는 내가 돌려준 편지를 읽어보더니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편지의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슬리 공작령에서 그 존재를 발견했고,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 존재가 나를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게 물었다.
“가실 겁니까?”
“글쎄요. 결정을 못 내리겠군요.”
“에할름을 신뢰하지 않으시는군요.”
발드리는 바로 정곡을 찔러왔다.
과연 첩보기관의 수장다운 판단이었다.
내가 볼 때 에할름은 실패한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 존재가 사라지자마자 제국이 붕괴할 것임을 예측하고 선제대응에 나섰던 사람이다.
권력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해서 실패하기는 했지만.
이런 종류의 사람이 흑화하면 정말 무섭다.
사람이라면 차마 저지를 수 없는 짓도 자신이 믿는 이상을 위해서라면 태연하게 저질러 버린다.
“내게는 그에 대한 신뢰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니까요. 대화를 나눈 것도 몇 마디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에할름은 윌리엄 백작님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었지요. 자료를 담은 상자와 도서관의 일부를 전해 줌으로서 말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결혼으로 인해 가지게 된 의무와 내 반려자에게 한 맹세가 우선입니다. 내 귀족 작위에 걸려 있는 의무와 명예를 쉽게 보지 마십시오.”
내 말에 발드르는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 역시 명예와 의무로 칼마르에 묶여 있는 몸입니다. 단지 제가 본 에할름 관장은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황제에게 자문을 제공하는 조직을 이끄는 사람이 황제 부재시에 멋대로 조직을 움직였고, 심지어 크게 실패까지 했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그는 황궁 도서관장답지 않게 굴었습니다. 마치, 선제후 중 하나처럼 굴었지요. 나름대로의 야심을 가졌던 것일까요?”
“그것은 오해인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에게는 야심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일차원적인 야심은 없었겠지요. 작위라든가 영지 같이 알기 쉬운 야심은 분명히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추상적인 대의명분도 야심이 될 수 있습니다. 분열의 위기에 있는 제국을 다시 하나로 묶어낸 조언자 같은 명성은 쉽게 거부하기 힘든 명예입니다.”
내 말에 발드르는 더 이상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백작이나 되는 사람에게 지슬리 공작령까지 오라는 요구는 분명 무리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르보그 공작군이 철수했다고 해도, 지슬리 공작령은 아직 혼란스러운 땅이었다.
아르보그 공작군도 남아있을 것이고, 지슬리 공작군도 우호적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역시 거절하는 것으로 결정하신 겁니까?”
“아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편지가 사실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니까요. 고민해 봅시다.”
관료나 귀족에게 고민해 보자 또는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말은 나는 그 제안에 대해 거부한다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다.
대놓고 제안을 거부하면 원한을 품거나 반대자로 돌변하는 경우가 많아서 좋게 돌려서 말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내가 발드리에게 고민해보자고 한 것은 진짜 고민할 필요가 있어서 한 말이었다.
이것은 무시하기에 너무 큰 떡밥이었다.
나는 조언을 구하기 위해 리네아에게 갔다.
“전쟁터에서 돌아와서도 바쁘기만 하네요.”
“아무리 그래도 리네아보다야 바쁠까요. 매일 달라지는 백작령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리네아는 정말 백작에 어울리는 군주입니다.”
우리는 젊은 부부답지 않게 평소에도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추고 지내고 있었다.
사생활이라는 것이 아예 없는 생활을 하다보니 말투가 애매하게 굳어버린 것이다.
지금도 행정관과 자문위원 여럿이 달라붙어서 징세업무에 대해 열을 올리며 떠들고 있다가 내가 들어오자 뒤로 물러선 참이었다.
나는 그들을 밖으로 물리고 내가 받은 편지에 대해 리네아에게 설명해 주었다.
내 설명을 듣자 리네아는 바로 내 마음을 알아차렸다.
“가고 싶은 거군요.”
“신기하네요. 어떻게 그렇게 금방 알아낸 겁니까?”
“당신 성격에 아니면 아니라고 딱 끊었을텐데 계속 망설이고 있는 것을 보니 금방 알 수 있었어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새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속마음을 들킨 김에 내 생각을 설명했다.
“검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인간 남자. 그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존재에 대한 전부입니다. 우리는 그 존재의 이름도 모릅니다. 대화조차 한 사람이 없을 정도예요. 그런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선제후들을 움켜쥐고 제국의 흑막으로 암약을 해왔었지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이니······”
생각해보면 무서운 일이다.
무엇인가 우리가 알지 못하던 존재가 제국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존재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위험한 존재가 완전히 없어졌다고 생각해왔는데 사실은 지슬리 공작령 한구석에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 존재가 해온 일로 본다면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죽었다고 봐야겠지요. 공작들은 당연히 포함될 테고 우리 역시 예외를 인정받기는 힘들 거에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야 합니다. 그 존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만약 함정이라면 어떻하지요? 윌리엄. 에할름이 누군가의 의뢰를 받고 당신을 목표로 판 함정이라면?”
리네아의 말에 나는 최대한 자신있는 미소를 보여줬다.
그리고 단언했다.
“나 그렇게 쉬운 남자 아닙니다. 그 존재와 싸워서 이기라고 한다면 모를까 살아서 도망치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물며 함정이라니. 나는 쉽게 안 죽습니다.”
내 말에 리네아는 내 손을 잡아왔다.
살짝 떨리는 손길이었다.
그리고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떠나는 것은 일주일 후에 미루세요.”
일주일 후? 왜?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잠깐 멈칫했지만, 그녀의 눈을 본 순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우리 부부였지!
나는 그녀가 손을 잡고 이끄는 대로 그녀의 침실로 따라갔다.
*
출발은 일주일 후가 아니라 열흘 후가 되어 버렸다.
20대 초반의 젊은 몸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호르몬의 지배를 강하게 받았고, 나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내 자신이 꽤나 자제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몰라서 참은 것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덕분에 예정보다 시간을 더 끌고 말았다.
간신히 이성을 챙긴 나는 열흘이 지나서야 호위 기사 몇 명과 함께 지슬리 공작령으로 떠날 수 있었다.
지슬리 공작령의 대부분이 산맥이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리고 현실은 상식보다 더 험악했다.
실제로 아르보그 공작을 찾아서 가본 지슬리 공작의 세력권은 저절로 욕이 나오는 험지였다.
산을 넘으면 산이 나오고 그 산을 넘으면 또 산이 나오는 징글징글한 지형이 끝없이 이어졌었다.
그런 곳이었으니 지슬리 공작이 죽고 세력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을 상대로 버틴 것이겠지.
그러나 버틴 것이 전부였다.
그게 지슬리 공작군의 한계였다.
이동하면서 본 지슬리 공작령은 사실상 주인이 없는 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전히 아르보그 공작군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치안이 무너진 채 산적이 날뛰는 지역도 드물지 않았다.
특히, 돈이 되는 광산은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아르보그 공작군이 들어앉아서 채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공짜로.
포로로 잡은 지슬리 공작군의 병사들과 원래 광산일을 하던 영지민들이 강제노동으로 광산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광산에서 채굴한 광물을 바로 금속괴로 만드는 작업도 같이했다.
광부 하나를 납치해서 물어보니 금속괴는 만드는대로 아르보그 공작령으로 나른다고 한다.
아르보그 공작군은 지슬리 공작령에 빨대를 제대로 꽂고 있었다.
귀족연합자치령의 군대가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권을 제법 망쳐놓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물자가 계속 흘러간다면 우리의 노력은 금방 헛수고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다시 벌어질 아르보그 공작군과의 전투가 너무 빨리 벌어지는 것은 곤란했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산맥을 가로질렀다.
에할름이 알려준 장소는 에할름의 은거지였던 곳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함정을 팠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조금은 가셨다.
아무래도 뭔가 수작을 부린다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익숙한 곳에서 하는 법이니까.
그러나 지슬리 공작령 깊숙한 곳.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면 약간은 믿음을 주어도 될 것 같았다.
내가 도착한 곳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저택이 자리잡고 있었다.
요새로 건설한 3층 저택이었다.
창문은 작게 만들고 그나마 몇 개 되지도 않았다.
거기다 두꺼운 나무로 덧창문을 대었다.
사람 두 명이 간신히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하나뿐이었다.
지붕 가장자리에는 병사들뿐 아니라 발리스타와 투석기까지 올려 놓을 수 있을 만한 통로가 지붕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었다.
상당한 노동력과 자재가 들어갔음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에할름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