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죽은 것이 아니었나?
“오랜만이군요. 발드리 경. 도서관 건립은 잘 되고 있습니까?”
“리네아 여백작께서 신경을 써주시는 덕분에 모든 면에서 순조롭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프리시오 공작령에 세워진다던 도서관은 어떻습니까? 엘더러 경이 많이 노력하고 있을 텐데. 정기적으로 연락은 하고 있습니까?”
무난하게 들리는 내 질문에 발드리는 정색을 하고 단호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비상연락망을 제외한 모든 연락을 끊었습니다. 엘더러 관장과의 개인적인 안부서신까지도 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프리시오 공작령에 세워지는 도서관과 칼마르에 세워지는 칼마르 도서관은 전혀 별개의 조직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때 황궁 도서관의 수석 사서로 있던 발드리는 내 질문에 담긴 함의를 이해하고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칼마르에 정착한 도서관의 일파는 칼마르의 일부가 되기로 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의사를 내게 전달한 것이다.
다행이었다.
능력있는 자들을 계속 데리고 있을 수 있게 되어서.
도서관의 사서들은 정말 잃고 싶지 않은 인재집단이었다.
만약 그들의 입장이 애매모호하거나 의심할만한 부분이 있었다면 나는 당장에 도서관을 태워버렸을 것이다.
믿을 수 없음에도 가까이 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황도에 있었을 때부터 도서관은 특별한 조직이었다.
단순히 자료를 수집하고 책을 보관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도서관은 절대 아니었다.
그들은 정책을 만들고 평가하는 싱크탱크이기도 했다.
게다가 정보기관 역할도 겸했다.
분명히 황제가 잘 써먹었을 것 같았다.
리네아 역시 그들을 개인적으로 부리면서 꽤 실력있고 믿을만한 자들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적어도 앞과 뒤가 다른 자들은 아니라고 내게 말해 주었다.
나름대로 첩보라면 한가락하는 칼마르 백작가의 우호적인 평가라서 나 역시 전보다 편한 마음으로 칼마르의 도서관장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구두 약속을 믿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내 편한 마음은 발드리가 편지 하나를 꺼내자마자 그대로 증발하고 말았다.
“이거 뭡니까? 발드리 경.”
“에할름으로부터 온 편지입니다. 윌리엄 공에게 전달하라는 암호가 겉봉에 적혀 있더군요. 내용은 저도 모릅니다.”
에할름은 엘더러 이전의 황궁 도서관장이다.
도서관의 조직을 이용해 뭔가 하려고 했지만 크게 실패했고, 결국 황궁 도서관에서 떠나 지슬리 공작령 근처에 있는 항구 도시 순스발에 은거했다.
나는 그의 소개 덕분에 황도에 있는 도서관까지 갈 수 있었고, 도서관 조직의 한 갈래를 칼마르에 유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도서관 사람들끼리는 서로 연락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나와는 따로 연락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까지 중요한 가치를 가진 상자를 내게 넘겼으면서도 아무 연락이 없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그의 나이와 실패로 인한 절망을 감안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금 그의 편지가 내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것도 도서관 사람을 통해서 말이다.
나는 봉한 봉투를 종이칼로 살살 열어서 안에 있던 편지를 꺼냈다.
편지지는 한 장이었다.
내용도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편지의 첫머리를 읽은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일어선 채 편지의 첫 줄을 다시 읽어보았다.
편지의 첫 줄은 다음과 같았다.
[그분이 어디 계신지 알아냈네.]
*
뱅트손은 자신이 야망이 넘치는 인간이라고 생각해왔다.
실제로 자신을 얽어매던 족쇄가 풀리자마자 지슬리를 죽이고 스케티를 향해 병사를 몰아간 것을 보면,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그리 틀린 것은 아니었다.
진정한 황제를 향한 가장 빠른 지름길로 내달렸으니까.
그러나 설마 자신이 참을성이 부족하고 짜증을 잘 내는 유형의 인간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끔 오만하고 독선적인 면이 드러난다는 것은 자신도 알고 있는 문제였지만, 참을성이 부족하다니!
만약 선친이 자신의 이런 면을 눈치챘다면 대귀족답지 않다면서 후계자 경쟁에서 떨궈버렸을 것이다.
그 영민하시던 분이 이런 치명적인 결점을 모르고 넘어가셨을 리가 없으니 실제로 젊은 날의 그가 참을성 부족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짜증을 내는 것은 원래 자신이 가졌던 성품이 아니라 지지부진한 전쟁으로 인해 얻은 질병 같은 것임에 틀림없다고 스스로 납득해 왔다.
전쟁터에서 오래 있다보면 피부병에 걸리기도 하고, 어디 한 군데 부러지거나 잘리는 경우가 왕왕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다면 스케티 공작령의 수도를 바로 코앞에 둔 지금까지도 그와 그의 군대를 괴롭히는 보급문제에 대해 그가 화를 내는 것이 평범한 일상이 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라고?”
“말에게 먹일 건초가 떨어져 갑니다. 이대로라면 며칠 가지 않아서 말먹이가 바닥이 납니다.”
벌써 7번이나 갈아치웠던 보급관의 보고였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의 앞에서 입을 놀리고 있는 보급관은 자신이 목을 잘라버린 첫 번째 보급관 이후로 8번째로 보급관에 임명된 자였다.
그 정도라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보급관으로 일하고 있을 텐데 그는 뭔가 이상한 말을 하고 있었다.
뱅트손은 다시 그의 보고를 되뇌어 봤지만 8번째 보급관의 보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뱅트손은 손을 들어서 막사 밖에 널려 있는 풀을 가리켰다.
“저것은 풀이 아니던가?”
“공작 전하. 잡초를 말에게 먹일 수는 없습니다. 말에게 아무 풀이나 먹이면 금방 탈이 나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될 겁니다. 건초를 만들 수 있는 풀의 종류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보급관의 어투는 어딘지 모르게 세상을 포기한 사람의 분위기를 풍겼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의 전임자 7명 중 머리와 목을 제대로 붙인 채 자리에서 물러난 이가 2명에 불과한 것이다.
그나마 그 2명도 관직과 신분을 잃고 일반 병사로 종군 중이었다.
8번째 보급관으로 임명된 오르기손은 보급관으로 임명될 때부터 이미 모든 미련을 내려놓은 후였다.
“곡물로 주면 되지 않은가. 알곡을 먹는 것을 본 적이 있네만?”
“전투를 앞둔 전투마에게 먹이는 것을 보신 모양입니다. 전투마에게는 건초 이외에도 알곡과 과일을 적당히 먹여야 합니다. 그래야 전투에 임해서 지치지 않고 싸울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짐말이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알곡을 따로 먹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사람이 먹을 식량도 아슬아슬합니다. 짐말에게까지 줄 알곡이 있다면 사람이 우선입니다.”
보급관의 침착한 어조에 뱅트손은 오히려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식량이 부족하다는 말이 또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기사가 말도 타지 못하고 싸우란 말인가? 바로 코앞에 스케티의 성채가 있는데?”
“저는 군략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공작 전하. 그러나 만약 전투마를 좀 더 보전하고 싶으시다면 짐말의 절반을 도축 할 것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짐말이 나르던 보급품을 병사들이 나누어 져야 하겠지만 적어도 전투마를 위한 건초는 당분간 보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뱅트손은 자신의 앞에서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초탈한 태도로 입을 놀리고 있는 보급관의 목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더 이상 보급관을 맡길 만한 귀족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보급관은 전임자들에 비해 확실히 나았다.
적어도 일이 터지고 난 다음에 보고를 하기보다는 일이 터지기 전에 와서 해결책을 요구하곤 했던 것이다.
뱅트손은 보급관의 새로운 제안에 입을 다물고 유불리를 따져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뱅트손의 침묵을 다르게 해석한 귀족들도 있었다.
“오르기손 경.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우시오. 짐말이 나르던 보급품을 병사들보고 나르라고 한다면 다들 싸우기도 전에 지쳐 쓰러질거요. 경이 보급만 맡아서 잘 모르고 그런 말을 한 모양인데 짐말이 할 일이 따로 있고 병사들이 할 일이 따로 있는 거요. 차라리 주변의 마을을 약탈해서 건초를 확보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소?”
“유감스럽게도 보급을 보충하기 위해 약탈할 마을이 없습니다. 텅텅 비우고 모조리 피난을 가버렸더군요. 그리고 보급관으로서 말씀드리는데 식량을 숨겨놓은 자는 있을 수 있지만 건초를 숨겨놓은 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말은 평민이 가질 수 없는 귀중품이니까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짐말의 절반을 도축하든가 아니면 전투마와 짐말을 모두 포기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러다가는 건초가 없어서 철군을 하는 병신이 나올지도 모르겠군.”
뱅트손은 헛웃음을 웃고 말았다.
전쟁을 치르면서 온갖 꼴을 다 본다는 생각에 어이가 없었다.
아마 선제후이자 공작으로 계속 살았다면 이런 희극과 모순은 절대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
그런 그에게 오르기손이 무심히 덧붙였다.
“있습니다. 그런 병신.”
“응?”
“외국의 사례이기는 한데 건초를 현지에서 구입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진군했다가 건초를 못 구해서 후퇴한 왕이 있더군요.”
뱅트손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오르기손을 바라보았다.
다른 나라의 전훈까지 살필 정도라고?
보급은 잘하는 것을 알았고, 그렇다면 전투는 어떨까?
오르기손이 행정관이기는 했지만 본래 기사출신이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한 번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까지 병신이 될 수는 없지. 짐말의 절반을 도축하도록 해.”
“공작 전하. 병사들에게 부담이 너무 커집니다.”
“그렇습니다. 조금만 더 행군하면 스케티 공작의 영주성입니다. 전투 전에 병사들이 너무 지치면 곤란합니다.”
“게다가 짐말이 없으면 식량의 보급도 문제가 생깁니다.”
뱅트손의 지시에 곧장 반발하는 의견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뱅트손은 단호하게 반대의견을 물리쳤다.
“부담이 문제라면 이곳에 병력의 일부를 남기고 당장 쓸 보급품만 가지고 이동하면 돼. 식량이야 어차피 스케티와 몇 번 싸우고 나면 남아돌 테니까 걱정하지 마.”
냉혹한 뱅트손의 말에 지휘 막사에 있던 귀족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별로 좋은 꼴을 보지 못하리라는 것이 명백했다.
그들은 보급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목이 잘려나간 보급관들을 기억했다.
보급에 실패해서 목이 잘릴 정도라면 전투에서 실패하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까.
새삼스럽게 목이 서늘해지는 그들이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경계를 서던 기사 하나가 지휘막사로 뛰어들어왔다.
“스케티 공작의 기병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기사가 대거 포함된 것으로 보입니다.”
스케티 공작의 기사라고?
휘하 파벌의 귀족들이 연달아 죽어나가고, 그들의 영지가 초토화되는 상황에서도 스케티 공작의 기사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전쟁 초반에는 네 갈래로 나뉜 양쪽의 병력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격렬하게 맞붙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투의 저울추는 뱅트손에게 급격하게 기울어져 버렸다.
그것은 전적으로 스케티 공작의 지원이 시원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스케티 공작의 거성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이르자마자 기사가 대거 포함된 기병대가 몰려온 것이다.
“이제서야? 스케티 공작도 웃기는 사람이군. 남의 손목이 날아가는 것보다 내 손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프다고 하는 꼴이 아닌가. 다들 나가지. 전투에서 승리한 후 병사들에게 줄 특식은 말고기로 하자고!”
승리를 당연시하는 뱅트손 공작의 독려와 함께 지휘 막사에서 나간 귀족들은 스케티의 기마병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 중 말을 타고 있는 자들은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절반은 말이 아니라 다른 것을 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