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72화 (172/248)

172. 칼마르 플랜

칼마르는 호황이었다.

그것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대호황이었다.

버블경제 시기의 일본처럼 미쳐 돌아간다고나 할까.

전시특수야 당연히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리네아와 주고받은 편지에서도 경기가 좋다고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러나 칼마르가 누리는 호황은 내가 예상한 정도를 한참 벗어난 엄청난 대호황이었다.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 칼마르에 적을 둔 상인들의 순이익이 적게는 두 배에서, 많게는 열 배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했을 정도였다.

이런 호황을 누가 가져왔을까?

누가 칼마르에 황금을 가져왔을까?

그건 바로 나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칼마르의 유력자들 역시 아는 바였다.

이런 초호황이 한가지 이유로 생길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호황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였다.

안전과 생산, 그리고 물류.

그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칼마르가 안전한 영지라는 점이었다.

4대 공작가보다는 못하지만 백작가 중에서는 비교를 불허하는 강력한 군사력과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

칼마르 백작령과 그 주변의 정치적인 안정.

그리고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승리를 거듭하는 내 명성.

게다가 칼마르에서는 징발이나 약탈이 없었다.

그런 것은 혼란 초기에나 잠깐 벌어졌던 일에 지나지 않았다.

군대에서 필요한 물품과 용병 계약은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이라는 칼마르의 여백작이 즉석에서 현금으로 치른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에 비해 다른 지역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당연하겠지만 벌써 1년이 넘게 내전으로 인해 엉망진창이 된 현재의 제국은 부와 권력을 가진 자라도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가장 강력했던 고위 귀족이었던 공작조차 목이 뎅겅뎅겅하고 날아갔다.

이런 판국에서 남작이나 백작이라고 해서 그들의 영지가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물며 가진 것은 돈뿐인 평민이나 관리 계급에게 재산은 물론이고 그들의 생명까지도 안전하지 않은 세상이 된 것이다.

어느 쪽 군대인지는 상관없이 당장 군대에서 필요하다는데 내주지 않으면 어쩌려고?

징발과 약탈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심지어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팔 하나까지 잃고 떠돌던 하급관리의 모습에 자신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이다.

그런 자들 중 생각이 빠르고 행동력도 좋은 자산가들이 칼마르로 재산을 빼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겸사겸사 가족 역시 칼마르로 보내버리고 말이다.

이게 어느 정도로 큰 규모였냐 하면 칼마르의 유력자 중에는 상행을 포기하고 대신 부자들의 자금세탁과 이사를 대행하면서 막대한 수수료를 챙기는 자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집과 토지, 건물의 가격이 끝을 모르고 올라갔고, 그 여파가 시 외곽으로까지 미쳐서 한때 난민의 거주지였던 곳조차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어서 거래되는 중이라고 한다.

물론 당연하겠지만 이 모든 것에는 세금이 붙는다.

칼마르의 시민으로 등록하고, 부동산을 사고 팔고, 새로운 사업허가를 내는 모든 것에는 세금이 빠지지 않는다.

수입의 1/10을 내는 것은 기본이고.

나는 리네아가 보여주는 세입 내역을 보고는 그 숫자가 믿어지지 않아서 몇 번이나 자릿수를 다시 세어보았다.

역시 평화로운 시기에 축적한 제국의 부가 정말 막대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생산 역시 칼마르에 호황을 불러온 큰 원인 중의 하나였다.

전쟁터가 된 곳에서는 생산이 불가능하다.

수공업은커녕 농사조차 짓지 못한다.

누군가가 농사를 지으면 반드시 약탈당할 테니까.

전투를 위해 군대가 이동하는 중간에 있는 지역도 다르지 않다.

마실 물이 풍부하고 많은 숫자의 병사들이 지나다닐만한 지형이라면 농사를 짓기에도 좋은 곳이니 농업 생산력이 박살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젊은 남자도 씨가 마른다.

대개는 짐꾼으로 끌고 가는데 일단 데려가면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결국 나중에는 현지 징병으로 병사가 되어버리고 만다.

안정적으로 농사를 짓거나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지역이 별로 없으니 어떻하겠나.

생산이 가능한 곳이 떡상하는 것이지.

이를테면 칼마르 백작령과 그 주변의 연합자치령처럼 말이다.

지금 칼마르 백작령의 농부들은 몇 년 치 수입을 한 번의 농사로 얻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얼마나 열심히 팔고 있는지 자신들이 먹을 것조차 남기지 않고 다 팔아버려서 급하게 잡곡을 수입했다고 하던가.

그리고 그렇게 수입할 수 있는 외부와의 물류망이 건재한 것도 호황의 큰 이유였다.

부족한 물품, 특히 식량을 외국에서 구입해올 수 있는 것은 우리뿐이었다.

칼마르를 필두로 하는 제국 남동부와 동부의 해상교역망의 도시들 말이다.

남부의 해상교역망은 프리시오 공작과 섬국가들 간의 지지부진한 전투로 인해 완전히 마비된 상태였다.

그렇다고 서부 지역의 해상교역망을 장악하고 있는 프리시오 공작측이 식량을 수입해서 다른 곳에 팔 것도 아니었으니 사실상 우리쪽의 독점이나 다름없는 시장이었다.

결국 다른 지역 자산가들의 돈이 안전을 찾아 도피해 들어오고 있고, 우리가 생산한 것을 비싸게 팔면서, 부족한 식량은 수입해서까지 팔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제국의 부가 칼마르로 모여들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게 되었다.

아르보그 공작군과의 전투까지 흑자가 나 버린 지금, 나는 이 초호황이 불러올 부작용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판이었다.

“호황의 부작용이라고요? 상상이 잘 안가는군요. 윌리엄.”

“나도 상상이 잘 안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리네아. 그런데 간혹 그런 일이 생기기도 하는 모양이더군요. 그러니까 이해를 위한 기본은 돈도 상품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이해가 쉽습니다. 돈의 양이 많아지면 쌀이나 포목의 재고가 쌓일 때 가격이 떨어지는 것처럼 돈의 가치도 떨어집니다. 같은 액수로 살 수 있는 물건의 양이 줄어드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매일의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영지민들이 더욱 가난해집니다. 반면에 토지와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 유력자들의 부는 더욱 늘어납니다. 우리에게는 곤란한 일이지요.”

칼마르의 유력자들과 귀족들은 대부분 대상인들로 나 못지않게 외부 상황에 대해 밝은 사람들이다.

제국의 대부분이 내전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때, 지금의 번영을 유지하려면 분열은 절대 금기라는 것쯤은 이해할 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과연 앞으로도 그럴까?

재산이 늘어나고 세력이 강해지는데 계속 눈치나 보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까?

그렇다고 숙청을 반복할 수는 없다.

세력이 강한 유력자일수록 두려움에 질려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구석에 모는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 된다.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서 공포는 별로 좋은 수단이 아니다.

리네아는 내가 암시하는 바를 금방 이해했다.

다행히 그녀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공포는 좋은 수단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사라 남작 부인이 칼마르의 유력자들과 새로 이주해온 자들을 살펴보고 있지만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다고 하더군요. 내가 개인적으로 부리는 사람들 역시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앞으로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죄가 없는 자를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정의롭지 않아요.”

“물론입니다. 리네아. 그대의 말이 옳습니다. 충성하는 자를 의심하면 결국 반역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숙청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대에게 생각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이 문제는 돈 때문에 생긴 문제니까 돈으로 해결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

제대로 된 대답을 추궁하는 리네아의 얼굴을 보며 나는 내 구상을 밝혔다.

“백작령에 몰려 있는 돈의 양이 너무 많아서 생기는 문제이니 다른 지역으로 돈을 보내면 됩니다. 일단 떠오르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연합자치령의 귀족들에게 영지 복구를 위한 자금을 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합자치령의 영지들을 잇는 대로를 건설하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이왕이면 유료도로로 말이지요. 그리고 칼마르의 귀족과 유력자들도 끌어들여서 그들의 돈을 투자하게 만드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것은 다른 영주들에게나 좋은 일이 아닐까요? 영지를 복구하고 도로를 놓아주면 그들은 금방 세력을 회복할 겁니다.”

“리네아. 가장 무거운 족쇄는 돈을 빌려주면서 얽어매는 족쇄입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족쇄는 돈을 벌게 해주면서 얽어매는 족쇄이지요. 저들은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우리는 돈으로 연합자치령의 귀족들을 사들이는 겁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유럽에 돈을 퍼부은 마셜 플랜은 자선사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투자였고, 돈을 받아 먹은 자들을 한 곳에 몰아서 묶어놓은 그물이기도 했다.

칼마르 플랜 역시 비슷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리네아는 내가 제안한 계획의 얼개를 이해하자 곧 적극적인 행동가가 되었다.

연이은 숙청의 기억이 아직 남아있어서 몸을 사리고 있던 칼마르의 귀족과 유력자들을 초청하여 칼마르 플랜의 대강을 설명하고 백작가의 자금 뿐 아니라 그들의 자금까지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칼마르의 유력자들 역시 새로운 기회가 왔다는 것을 금방 이해했다.

특히, 숙청을 위한 숙청을 우려하고 있던 그들 중 일부는 칼마르 백작가가 내민 우호의 손길을 재빠르게 잡아챘다.

아주 꽉.

심지어 의회의 의원들 중 몇 명은 가문의 재산을 거의 다 동원하는 무리수를 두기까지 했다.

제국 전체가 내전으로 고통받는 시절에 연합자치령에서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 일은 단순히 버블을 진정시키고 연합자치령의 귀족들을 칼마르의 손에 넣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농업기반 문명에서 사람의 숫자는 곧 힘이다.

과연 의도한 효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토목공사가 내전이 벌어진 지역의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도 있었다.

토목 공사에 대해 의논하는 과정에서 만난 영주들에게 복구자금을 빌려주겠다고 제의하는 일은 상당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영지를 복구하기 위해 칼마르에 와서 고개를 숙인 영주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특히 막시밀리안 계열에 속했던 영주들은 거리낌없이 돈을 빌려갔다.

그들은 나와 리네아를 과거 막시밀리안 공작을 대하는 것처럼 대했다.

나중에 토목 공사가 끝나고 난 후가 더 기대되는 반응이었다.

*

부부이자 사업파트너로서 리네아와 나는 잘 맞는 편이었다.

전쟁은 내가, 통치는 리네아가 나누어서 맡은 역할분담 역시 적절했다.

어려서부터 귀족이자 정치인으로 교육받은 리네아와 달리 나는 기사에 지나지 않는다.

전생의 경험을 생각하더라도 이곳의 기준으로 본다면 잘 훈련된 행정관 정도다.

즉, 유능한 실무자일 뿐 누군가의 머리 위에 서서 통치한다는 것은 내게 맞지 않은 옷과도 같았다.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할 수 있지만, 내 일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사실 어떤 면에서는 일부러 칼마르의 내치에 대해 외면하고 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어느새 칼마르의 도서관장으로 행세하고 있던 발두르가 내게 들이닥쳤을 때 무슨 일 때문에 온 것인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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