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전투가 끝났다.
탈출은 간단했다.
기사는 많았고 말은 더 많았다.
주변에 있던 말을 잡아 타고 달리면 그만이었다.
무전기나 전화기 같은 것이 없는 이상 내달리는 말을 막겠다고 미리 나와 있을 병력 같은 것은 없었다.
나를 향해 몇 발의 화살과 쇠뇌살이 날아오기는 했지만, 모두 의미없는 발악이었다.
뒤늦게 우리를 쫓아오는 기사들 역시 비도를 말에게 던지면서 견제하는 것으로 추격을 떨쳐냈다.
한참을 달린 후에야 우리가 일을 벌인 곳을 향해 다시 시선을 둘 수 있었다.
작은 빌딩만큼이나 높게 솟아올랐던 불길은 어느새 사그러들었지만, 아직 잔불이 남아서 땅에 떨어진 별처럼 보였다.
“피요트르 경! 완전히 다 타 버린 겁니까?”
“예. 완전히. 모조리 숯이 되었습니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확신이 담긴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공작군에게 남은 선택지는 사실상 한가지 뿐이다.
나는 그들이 언제 현실을 인정하고 협상을 청해 올 것인지 궁금해졌다.
*
“블레인. 친애하는 내 사촌아. 도대체 무슨 병신 짓을······”
말을 잇지도 못하는 아스워드의 앞에서 블레인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말로도 변명이 불가능했다.
소수의 특공대가 침입해서 창고에 불을 지르다니!
그것도 50명에 달하는 기사가 있던 창고를!
이게 도대체가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심지어 그 와중에 죽은 자가 병사와 기사 합쳐서 모두 20명에 달했다.
블레인은 아직도 어젯밤의 일이 꿈만 같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었다.
후계자 경쟁에서 확 밀려 버린 것이다.
경쟁에서 가장 먼저 탈락할 자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일 것이다.
자신과 함께 있었던 유력자의 자제들 중 일부가 어제 죽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전과 달라졌다.
심지어 벌써 줄을 바꿔잡은 자가 나올 정도였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아스워드의 옆에 서는 것으로 자신들의 선택을 블레인에게 통고했다.
쉽게 태도를 바꾸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여기는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아스워드에게 넘어가는 사람이 나올 정도라는 것은 블레인의 입지가 무너졌다는 확실한 신호였다.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이 죽어나갈 때 아무런 대처를 하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선 것이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블레인은 다시 한번 자신의 처지를 실감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네 생각은 어때? 블레인.”
아스워드는 마치 참모에게 책략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고위귀족처럼 굴었다.
굴욕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멍청한 아스워드를 함정에 밀어넣기에는 보고 있는 눈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평판을 회복해야 할 때였다.
“먼저 하나 지적하지. 우리 군에 첩자가 있다. 그것도 꽤나 고위층으로.”
단정적인 블레인의 말에 놀란 티를 감추지 못하는 자가 여럿이었다.
아스워드 역시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던졌다.
“증거가 있나? 네가 습격을 당했다고 해서 억지를 쓰는 것은 곤란해.”
“식량의 대부분이 이쪽에 있다는 것을 아는 자가 거의 없었다고! 관측으로는 알아낼 수 없어. 식량의 대부분이 이쪽에 있었다지만 막상 그 양은 별것 아니었으니까. 밖에서 관측하는 것으로는 몰라야 정상이야. 오히려 수레가 왕래하던 쪽을 공격하는 것이 합리적이겠지. 첩자가 정보를 흘린 거야.”
블레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본 사람들이 살짝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자칫 자신에게 분노의 불똥이라도 튀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큰 실책을 범했다고는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다.
그에 대한 지지는 철회하더라도 미움까지 살 이유는 없었다.
“음. 일리있네. 충분히 그럴만해. 그렇지만 지금 첩자를 찾겠다고 병영을 뒤집어 엎을 수는 없어. 증거도 없고, 그럴 만한 여유도 없지. 첩자를 찾는 것은 일단 뒤로 밀어두자고.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네 생각이 있을 것 아냐?”
“협상하고 후퇴하는 적의 뒤통수를 치는 수밖에 없어.”
“뭐라고?”
아스워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것은 아스워드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 리도 없었다.
승리를 하고도 축하는커녕 기껏해야 명예를 저버린 비겁자 소리나 듣겠지.
“날 보고 내가 약속한 바를 대놓고 어기라고 하는 거야? 블레인. 그것은 네 방식이지 내 방식이 아냐. 게다가 그렇게 대놓고 약속을 어기면 사람들이 내 말을 어떻게 생각하겠어? 몬스터가 짖어대는 소리로밖에 더 듣겠나?”
“그렇다면 협상하고 보내버려. 아직 식량을 손에 쥐고 있을 때 우리도 후퇴해야 하니까.”
퉁명스런 블레인의 반응에 아스워드는 생각에 잠겼다.
협상하고 양쪽 다 물러선다고?
여기까지 1만이 넘는 낙오병을 내면서 달려온 끝에 얻은 결과가 그냥 피차 물러서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였다.
블레인처럼 비겁하게 구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보내 주는 것도 곤란했다.
이동 중간에 있던 영지들의 피해는 양해가 가능하겠지만, 헤필드에 있는 세금저장창고까지 태워먹은 것은 너무 피해가 컸다.
과연 복구할 수 있을까 의문일 정도였다.
게다가 유약한 블레인이 제대로 습격을 대처하지 못해서 식량창고까지 태워먹었으니 자신 역시 별로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한 번 더 찔러보는 것이······
“내 지휘하에 있던 병력을 네게 인계하는 일은 없을 거야. 아스워드”
갑작스러운 블레인의 참견에 아스워드는 눈을 번득였다.
실패한 자가 함부로 지휘권에 간섭을 하려고 하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블레인의 어조는 단호했다.
“어제의 그 엉망진창이었던 전투를 다시 하고 싶다면 네 병력으로만 해. 내가 건사한 병력까지 무덤에 밀어넣지 말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실패는 나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 한 번 더 그 멍청한 지휘로 병력을 말아먹으면 너는 원로원의 노인들에게 사지가 찢겨 죽을 거다.”
“어제는 투입한 병력이 너무 적었어.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어붙인다면 달라.”
“적은 병력으로 적게 잃었으니, 많은 병력으로는 많이 잃겠지.”
냉소적인 블레인의 대꾸에 아스워드는 얼굴이 붉어졌다.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서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보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대신 나중에, 아주 나중에 손을 봐주겠다는 생각을 하며 화를 억눌렀다.
그것으로 아르보그 공작군의 향후 방침은 결정되었다.
그리고 협상장으로 나가는 대표는 아스워드로 결정되었다.
*
공작군의 사절이 흰 깃발을 들고 목책으로 둘러싼 주둔지로 다가온 것은 우리가 복귀한 바로 다음 날 아침이었다.
사절이 가져온 제의는 본격적인 전투를 하기에 앞서서 대화를 나누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약간 놀랐다.
공작군의 반응은 예상보다 빨랐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전면적인 공격을 한 후에야 협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머리가 잘 돌아가고 결단력이 강한 자가 공작군의 수뇌부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왕 서로 만나기로 했으니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바로 정오에 연합자치령군과 공작군의 사이에 있는 중간 공터에서 각각 3명의 호위기사를 거느린 채 서로의 얼굴을 맞대게 되었다.
우리쪽은 나와 아돈슨, 상대방은 아스워드와 블레인이라는 자였다.
모두 선대 아르보그 공작의 조카로 남작위를 가졌다고 한다.
아스워드는 아르보그 공작을 닮은 자였다.
거인족 혼혈이고, 순혈보다는 못하지만 상당한 거구였다.
반면에 블레인이라는 자는 화려한 갑옷을 입었음에도 어딘지 차가운 느낌을 주는 기사였다.
그리고 안면이 있는 자였다.
“새벽의 무용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윌리엄 백작 각하.”
“천만의 말씀을. 경의 부하들은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물러서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지요.”
“아쉽군요. 저도 소문으로만 들었던 백작의 놀라운 무용을 견식했다면 좋았을텐데 말입니다.”
“언젠가는 아스워드 경에게도 기회가 있겠지요.”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서로 적당히 존중하고 적당히 견제하고 적당히 긁었다.
그냥 인사로 주고받기에 적당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전투를 끝내기 위한 합의는 쉽지 않았다.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은 허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리품의 소지유무는 우리쪽 병사들이 검사를 하겠습니다.”
“그런 모욕적인 제안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차라리 전투로 결정하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약탈당한 영지에 대한 피해보상이 필요합니다. 특히 사망한 영지민에 대한 보상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이면 전사한 우리 병사들을 위한 보상을 청구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까?”
아돈슨과 블레인이 입씨름을 벌이는 동안 나는 아스워드를 살펴보았다.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차라리 여기서 싸움으로 결판을 내자고 하면 좋아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금 벌이는 입씨름은 그의 관심사가 아닌 모양이었다.
공작군의 실세로 보이는 자가 관심을 안 보인다라······
진짜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한 손을 들며 두 사람의 입씨름에 끼어들었다.
“비등하게 전투를 벌인 후의 뒤처리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대개는 적당히 체면을 차리는 선에서 합의를 보지요. 그리고 승세를 보인 쪽에서 양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갑자기 끼어든 내가 엉뚱한 말을 시작하자 모두의 눈이 내게 향했다.
“앞의 두 분은 지슬리 공작령 깊은 곳에서 이곳까지 엄청난 거리의 행군을 짧은 시간 내에 해내셨습니다. 군사적으로는 대단한 업적이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몇 명 없었을 겁니다. 오히려 낙오병이 끼치는 민폐에 대한 추궁이나 있었겠지요.”
두 사람의 눈에서 내 말에 동의하는 열렬한 감정이 엿보였다.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키고 전투를 하는 것은 경험이 많거나 능력이 있는 소수의 장군들에게나 가능한 예술적인 기술이다.
이게 가능한 장군들은 명장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제국처럼 수백 년 동안 정치적으로 안정된 곳에서는 그런 종류의 군사행동이 굉장한 일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조차 그리 많지 않다.
분명 내 앞의 두 젊은 기사는 자신들의 업적을 이해하고 감탄해주는 사람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내게 우호적인 감정을 품기를 바랐다.
그래야 다음의 제안이 효력이 있을 테니까.
“그런데 외부의 침입자들을 패배시키는 것이 아니라 협상으로 물러나게 한다면, 온갖 민폐를 끼치며 병력을 이동한 것은 뭐냐는 말이나 나오겠지요. 공작의 후계자로 경쟁하기에 별로 유리한 일은 아닐 겁니다. 이런저런 협상안을 내놓는 것도 그런 면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경쟁은 이겨야 하니까요. 그래서 제안을 하나 드리지요.”
내 말에 공작의 예비 후계자들은 침을 삼켰다.
뭔가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 내밀어지리라는 것을 그들도 알아챈 것이다.
“1만 명. 내가 직접 이끄는 1만 명의 병력이 아르보그 공작가의 동맹군으로 움직이겠습니다.”
“아! 동맹군이라고 하신 겁니까?”
“예. 동맹군.”
그러나 내 제안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반응은 없었다.
아르보그 공작이었다면 단숨에 내가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을텐데.
역시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 젊은 귀족들이었다.
“뱅트손 잊었습니까? 스케티는?”
내 말에 비로소 머리 속에 전구가 켜지는 둘이었다.
둘은 그제서야 내 제안을 이해하고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설마 아르보그 공작가의 진정한 적이 남쪽에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겠지요? 연합자치령과는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겠지만 뱅트손이나 스케티와 뭔가 타협을 한다는 것이 상상이 갑니까? 타협을 하더라도 한두 번은 크게 싸워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1만 명의 동맹군을 전리품으로 하십시오.”
내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무사히 철군한 우리는 전리품을 잔뜩 가지고 우리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연합자치령의 귀족과 기사들이 원하는 바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나 역시 큰 피해없이 돌아온다는 애초의 목표를 비슷하게나마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칼마르로 돌아온 나는 새로운 문제와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