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70화 (170/248)

170. 작전 성공

*

윌리엄은 대단한 명성을 가진 기사였다.

초기에는 운 좋게 어린 여백작을 잡아채서 결혼한 행운아로 유명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행운아라는 이미지는 냉혹하다든가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평가에 가려져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칼마르의 상인들이 윌리엄을 두려워했고, 두려움에 먹혀서 무리한 짓을 하다가 자멸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윌리엄은 악명으로 인해 결국에는 자신의 목을 자신이 조르는 꼴이 되고 말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의심스러운 칼마르의 유력자들을 대충 정리하면 칼마르 백작가의 가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여백작 역시 동맹 세력을 필요로 하는 현실을 깨닫게 되면 윌리엄을 멀리할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예측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제국은 혼란에 빠졌고, 선제후들조차 연달아 죽어나갔다.

지금까지의 관례와 전통이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윌리엄이 어떤 무기를 사용하고 어떤 말을 타는지까지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가십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였다.

블레인이 윌리엄을 알아본 것은.

윌리엄이 새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검은색의 기형창이 그의 눈앞에서 번득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윌리엄은 양손에 나누어 잡은 단창을 마치 쌍검처럼 쓰며 정면에 모여있는 기사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기사들은 일격에 죽어나간 동료와 불타는 창고를 보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윌리엄을 상대할지 아니면 창고로 불을 끄러 가야 할지 명령을 기다리며 잠깐 멈칫한 것이다.

그러나 위험한 적을 앞에 두고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밑바닥에서 기어올라온 기사 출신이라면 그런 멍청한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회를 잡아 그들 사이에 뛰어든 윌리엄은 공작군의 기사들에게 바싹 붙으며 칼날이 붙은 창을 휘둘렀다.

이것은 창이 아니라 그냥 장검으로 공격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공격의 목표가 되었던 기사 역시 별 부담감없이 자신의 대검으로 단창을 막아갔다.

평소의 훈련처럼 자신의 대검으로 윌리엄의 창을 받아내고 그대로 윌리엄을 찌르려던 기사는 자신의 대검이 부러지는 것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윌리엄의 일격을 그의 대검이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격렬한 전투를 하다보면 장검류가 부러져 나가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래서 칼을 몇 개씩 차고 다니는 기사도 드물지 않고, 망치나 도끼를 애용하는 기사도 많다.

그러나 이렇게 첫 격돌에서 검이 부러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질이 나쁜 철로 만든 무기도 아니고 가문에서 신경써서 만든 대검이 일격에 박살나다니 그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별 충격도 없이 자신의 대검을 부숴버린 창날이 다시 자신의 팔꿈치를 향해 날아오는 것까지 겁에 질린 눈으로 봐야 했다.

윌리엄은 팔을 잃은 기사가 부러진 장검을 놓치고 비명을 지르는 순간 그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살아있는 적을 방패로 삼아 오른쪽 절반을 방어하고, 왼쪽 절반의 적을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찌르기가 공작군의 기사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연달아 들리는 공기 찢는 소리만이 찌르기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임을 증명하는듯했다.

쉭! 쉭! 쉭!

귀를 자극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릴 때마다 윌리엄의 왼쪽에서 공격 기회를 엿보던 기사가 그대로 널브러졌다.

흉갑에 뚫린 구명을 통해 나오는 붉은 피는 윌리엄의 일격이 갑옷과 사람을 동시에 관통했음을 증명했다.

왼쪽의 기사들이 황급하게 뒤로 물러서는 순간, 윌리엄은 오른발로 강하게 바닥을 내리찍으며 그 힘으로 자신에게 기대어오는 팔 잘린 공작군의 기사를 어깨로 밀어 쳤다.

충격에 반쯤 정신이 나가있던 팔 잘린 기사는 자신의 가슴에 가해지는 충격에 숨이 턱하고 막히는 고통과 함께 뒤로 붕 떠서 날아갔다.

마치 잡아서 던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몇 미터나 날아간 후에야 바닥에 굴러버린 그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윌리엄의 오른쪽에 있었던 기사들은 팔이 잘린 기사가 허공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감상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날아가는 기사를 따라 윌리엄이 바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윌리엄이 왼쪽의 기사들을 공격하는 동안, 오른쪽의 기사들은 긴칼이라면 일격을 가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접근한 후였다.

그런 그들 사이로 팔이 잘린 기사가 날아가고 그 뒤를 바싹 붙어서 윌리엄이 밀고 들어올 때, 기사들은 이때가 바로 노리던 기회라고 생각했다.

제각기 가지고 있던 무기로 윌리엄을 향해 내리치고 찔렀다.

심지어 조금 떨어져 있던 기사 하나는 쇠뇌를 쏘기까지 했다.

그것도 흔히 사용하는 쇠뇌가 아니라 장력을 강화하고 쇠뇌살조차 특별히 만든 것이어서 웬만한 갑옷은 다 뚫어버릴 수 있다고 자신하는 전용 쇠뇌였다.

그러나 윌리엄은 그들보다 훨씬 빨랐다.

이것이 인간의 움직임인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창날의 끝에서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언월도와 다를 바 없는 단창이 가장 가까이 있던 기사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 기사는 자신에게 가까이 붙은 윌리엄을 장검의 손잡이로 내려찍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그의 머리 속에서만 일어난 일이 되었다.

그는 윌리엄에 비해 너무 느렸다.

오히려 윌리엄이 그 기사에게 붙어서 쇠뇌살의 궤적에 그를 끼워넣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의 단창을 쇠뇌를 쏜 기사를 향해 던졌다.

동시에 두 명이 죽었다.

어깨받이와 어깨가 동시에 떨어져 나간 기사는 등에 특제 쇠뇌살까지 맞고 즉사했다.

쇠뇌를 쏘았던 기사 역시 재장전은 시도도 하지 못하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가슴 한복판을 뚫고 지나가는 철창에 즉사했다.

쉬익!

두 명이 즉사했지만 전투는 이제 시작이었다.

몸을 낮춘 윌리엄의 머리 위로 뒤늦게 장창이 지나갔다.

그러나 윌리엄의 관심사는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장창을 든 기사가 아니었다.

윌리엄은 단창이 닿는 범위에 있는 공작군의 기사을 노리며 언월도가 붙은 창을 휘둘렀다.

두 개의 무릎과 하나의 발목이 그 범위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언월도를 닮은 창을 휘두르며 다시 두 걸음 앞으로 전진했다.

다리와 발목을 잃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기사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윌리엄의 앞에는 두 명의 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장검을 든 기사 둘은 필사적인 기세로 윌리엄의 일격에 맞서나갔다.

그러나 어떻게해도 윌리엄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심지어 목을 향해 내리치는 윌리엄의 일격을 장검을 세로로 세우면서 막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강렬한 충격에 장검을 놓칠 뻔한 기사는 곧장 이어서 따라붙는 찌르기까지는 밀어내지 못하고 목을 찔려 버렸다.

다른 편의 기사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목을 찔린 기사가 쓰러지기도 전에 옆구리를 향해 휙하고 날아오는 창날을 간신히 막아냈지만 그 한 번이 마지막이었다.

창날은 비어 버린 머리를 가격했고, 투구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장검을 들고 윌리엄에 맞섰던 두 명의 기사는 거의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다.

그래도 그들은 일격에 다리와 발목을 잃은 자들보다는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었다.

적어도 윌리엄의 공격에 반응이라도 했으니 말이다.

그 이후에 윌리엄에게 붙은 자들도 그보다 못했다.

단순한 찌르기조차 막지 못하고 연달아 목이나 가슴을 찔리며 목숨을 내줬다.

얼마나 순식간에 밀려나며 죽어나갔는지 윌리엄은 방금 던진 단창을 회수해서 다시 조립할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한순간에 10명이 넘게 죽어나가자 비로소 기사들의 눈에 두려움이 서렸다.

기사들이 볼 때 윌리엄은 자신들의 두 배, 또는 세 배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것도 껑충껑충 넓은 보폭으로 위치를 옮겨다니는 통에 제대로 따라잡기도 힘들었고, 방어하기는 더욱 힘들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윌리엄을 처리해야 했다.

이렇게 수십 명의 인원으로도 단 한 명의 기사를 감당해내지 못했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들의 미래에 온갖 태클이 들어올 것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블레인에게 여러 경쟁자가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경쟁자가 있으니까.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아예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염원에 대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윌리엄의 철창이 처음으로 멈췄다.

그곳에는 윌리엄의 철창처럼 시커먼 색의 장검이 있었다.

그 장검을 쥔 자의 덩치는 다른 사람보다 약간 큰 정도였지만 풍기는 기세는 바위와도 같았다.

“나는 오그닌이리고 한다. 윌리엄 백작.”

“너는 네 뒤의 애송이들과는 조금 다르군.”

“조부께서 잘 가르쳐 주셨으니까.”

“저런, 그런데 오늘 불효를 하게 돼서 어떡하지?”

윌리엄의 말을 들은 오그닌은 입술을 비틀며 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의 장검으로 윌리엄을 찔렀다.

윌리엄은 처음으로 뒤로 휙 물러나면서 오그닌의 장검을 후려쳤다.

탄탄한 반탄력.

오그닌의 장검 역시 보통 물건은 아닌 듯했다.

아무래도 무기의 이점은 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

나는 자신을 오그닌이라고 소개한 덩치를 노려보았다.

무기도 힘도 보통이 아니었다.

실력으로 따진다면 오늘 만난 기사들 중 가장 뛰어난 자였다.

기형창을 천천히 들어서 그를 겨눴다.

그 역시 자신의 장검을 두 손으로 잡고 머리 위로 올렸다.

주변의 공기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에 팽팽해졌다

그 분위기에 먹힌 듯 움직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나와 오그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오그닌을 향해 한걸음, 다시 한걸음 전진했다.

오그닌 역시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당장이라도 몇 미터는 우습게 튀어올 수 있는 탄력이 그 걸음에 숨겨져 있었다.

한순간에 죽여버린 10명의 기사는 애송이였다.

기초는 튼튼하게 쌓았지만 경험이 부족해서 자신의 실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단지 조금 빨리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제대로 휘말려 버린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오그닌은 달랐다.

그는 다른 기사들은 감당하지 못한 빠르기를 눈으로 보고 정확하게 내 창을 막아냈다.

누군가가 제대로 훈련시킨 자였다.

그의 조부인 것일까?

창촉이 그를 건드린 순간 그의 장검이 나를 향해 찔러왔다.

그러나 나는 그의 장검을 쳐내며 빠르게 그의 허벅지를 향해 창끝을 겨눴다.

거리만 된다면 당장에 구멍을 뚫어버리겠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다.

그런데 오그닌은 찌르라면 찌르라는 식으로 오히려 내게 빠르게 접근해 왔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그래서 일단 찔렀다.

오그닌은 장검을 땅바닥에 박으며 내가 찌른 창을 빗겨나게 해버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장검을 버리고 나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아무래도 속도에 밀리니까 일단 잡고 난 후 갑주전투술로 나를 눌러보겠다는 생각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적지에서, 그리고 이렇게 많은 공작군의 기사가 있는데 땅바닥에서 구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짓이다.

그래서 나도 그의 두 손을 잡았다.

서로의 양손을 잡고 이마를 맞댔다.

그리고 오그닌은 나를 누르려고 있는 힘껏 용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내게 웅얼거렸다.

“너는 실수했어. 나는 거인족 혼혈이다. 인간이 내 힘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나?”

“거인족 치고는 많이 작은 것 같은데?”

“죽인다.”

내 말에 오그닌은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꿈틀거렸다.

잠깐 사이에 그의 얼굴이 붉어지고, 땀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간만에 사람을 상대로 힘을 쓰는 기분은 좋았다.

거인족 혼혈이라서 조금이라도 버티는 것이 힘을 쓰는 맛이 났다.

그러나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무기를 든 공작군의 애송이 기사들이 다가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살짝 몸을 낮추면서 오그닌을 그대로 들어서 다가오는 기사들에게 던져 버렸다.

때를 맞춘 것처럼 피요트르가 고함을 질렀다.

“다 태웠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식량을 태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했다.

이것으로 우리 모두가 살아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