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67화 (167/248)

167. 대군의 헛점은 보급에 있다.

몇천, 몇백도 아니고 몇만 단위의 신체건장한 남자들을 먹이는 일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아무런 시설도 없는 벌판을 이동하면서 먹여야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린다.

트럭이 달리고, 철도가 놓여있기는커녕 포장도로조차 보기 드문 문명 수준이다.

이런 시대에 야전에 나와서 균형잡힌 건강한 식사를 먹는다는 것은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이 나는 커서 대통령이 될래요, 나는 커서 아주 돈을 많이 벌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도울거에요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둘은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전쟁터에 나온 이 시대의 병사들은 식량의 종류에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으로 또는 구할 수 있는 것으로 되는대로 먹어야 한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으면 행운이다.

병사들이 먹을 식량을 운송하는 입장에서의 문제는 행운까지는 안 바라고 그냥 되는대로 먹이려고 해도 엄청난 물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만 명의 건장한 군인이 하루에 먹는 양을 모조리 쌀로 환산하면 10톤쯤 될까?

연합자치령의 3만 군대가 필요로 하는 쌀의 양이 하루에 30톤인 것이다.

야전에서 배부르게 먹는 것은 말도 안 되니까 절반으로 줄인다고 해도 15톤이다.

군대가 한 달 정도 활동한다고 생각해보면 필요로 하는 쌀의 양이 미친 수준이 된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5백 톤에 달하는 물량을 끌고 다녀야 한다.

여기에 물은 포함시키지도 않았다.

아르보그 공작군이 빈손으로 왔을 거라는 추측은 그래서 가능하다.

이동했어야 했을 거리와 공작군이 나타난 시간을 따져보면 6~8만은 되었을 병력이 수천톤의 식량까지 끌고서는 이토록 빨리 복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아르보그 공작군은 지나오는 도시와 마을에서 징발을 거듭하며 남하했을텐데 별로 좋은 짓은 아니다.

아르보그 공작이 죽은 이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내가 보기에는 징발이나 약탈이나 거의 차이가 없다.

문서 한 장 써주고 식량과 물자를 가져가는 것과 사람까지 죽여가면서 식량과 물자를 가져간다는 것의 차이?

둘 다 칼을 들이밀고 가져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징발은 원래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적 영토에서 하는 것이다.

아군 영토에서 징발을 하면 민심만 사나워진다.

게다가 1, 2만도 아니고 7만 전후의 군대가 중간에 숱한 낙오병을 양산하면서 움직인다?

징발뿐 아니라 떼도둑으로 전업한 낙오병인지 탈영병인 모를 자들이 저지르는 패악도 만만하지 않다고 봐야 한다.

아마 공작군이 이동하는 경로에 있던 마을들은 가뭄을 한 2년 연속 얻어맞은 후에 홍수까지 겪은 정도의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다.

연합자치령의 군대 역시 아르보그 공작을 따르는 영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전투까지 치르면서 영주성을 함락시켰으니 약탈은 보장된 권리나 다름없었고, 지나치는 마을에 대한 태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전투를 치른 영향이 컸다.

어떻게 이야기하든 연합자치령군은 현대적인 기준에서 보면 전쟁범죄나 다름없는 짓을 숱하게 저질렀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아르보그 공작령의 순조로운 합류같은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냥 힘으로 평정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패배해서 무력하게 도망을 친다면, 꽤나 험난한 도주로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형이야 별문제가 안 되겠지만 우리에게 적대적인 민간인으로 꽉 차 있는 지역을 지나야 할 텐데 쉬울 수가 있겠나.

그러니까 절대로 이겨야 한다.

적어도 현재의 편제를 유지한 채 후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목책 밖의 아르보그 공작군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투에 있어서 숫자의 차이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아르보그 공작군은 우리쪽에 비해 두 배는 된다고 봐야 한다. 헤필드에서의 전투에서 공작군에게 별로 피해를 입히지 못했기 때문에 수적인 차이는 오히려 더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숫자라는 것이 언제나 승리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군대에 있어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는 초고도 비만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넘어지면 주위의 도움 없이는 일어나지 못한다.

여기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라는 것은 보급에 비해 많은 숫자를 의미한다.

나는 공작군이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우리를 위압하기 위해 진실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는지부터 구별해야 했다.

물론 허세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단순한 추론에 3만에 달하는 생명을 매달 수는 없다.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나는 옆에 있는 아돈슨의 의견을 요구했다.

“수레로 나르는 식량의 양이 보통이 아닙니다. 지금 보이는 수레만 해도 100 수레 넘습니다. 아돈슨 경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처럼 보여도 세세히 따져보면 저 수레에 실린 식량이라고 해봐야 공작군에게는 이틀이면 동이 날 분량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들의 숫자가 5만이 넘는다는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희망을 잔뜩 섞어서 말한다면 지금 보여주는 식량이 전부일지도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그럴 일까지는 없겠습니다만.”

“역시 경도 공작군의 보급에 문제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제가 볼 때 이것은 전적으로 아돈슨 경의 공입니다. 경이 창고 구역을 제대로 태워주셔서 제가 걱정을 많이 덜었습니다.”

아돈슨은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아마 휴식을 간절히 원하는 신체가 기절을 한 김에 잠까지 자버린 모양이었다.

그 뒤로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시 영리하고 신중한 행정관이 되어서 나를 보좌하기 시작했다.

역시 이 사람은 베르그렌과 달리 참모형 인간이었다.

“윌리엄 백작께서는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이대로는 분명히 소모전에 들어가게 될 텐데요.”

“아마 아르보그 공작령에 보관해둔 곡물을 열심히 옮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5만이 넘는 인원에게 먹일 분량이니 금방 옮기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굶기지는 않을 정도로는 매일매일 옮길 수 있을 겁니다. 그 정도만으로도 우리를 말려죽이기에는 충분하겠지요. 포위된 우리가 식량을 가져올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기에 몇 개월씩 버틸 식량을 쌓아둔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그렇지요. 윌리엄 백작의 의견이 맞습니다.”

그리고 아돈슨은 내게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아돈슨 뿐 아니라 여러 귀족들에게서 본 눈빛이었다.

“목책을 지키며 이기는 싸움을 할 생각입니다. 우리가 헤필드에서 잃은 만큼 공작군에게도 희생을 강요해야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보급품이 중요합니다. 공작군을 와해시키려면 식량을 태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식량이 한 달 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우리에게 있는 식량의 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달이나 시간을 끌고 있을 수가 없어요. 공작령 내부에서 보급품이 본격적으로 도착하기 전에 무조건 결판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식량이 남아있을 때 후퇴해야 합니다.”

후퇴를 입에 올리는 순간 아돈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역시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 정도라면 뭔가 다른 특별한 수라도 내지 않을까 싶었는데 약간 실망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전쟁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원칙을 확고하게 지지하는 사람이다.

숫자가 곧 승리이고, 보급품이 곧 승리다.

정찰이 최우선이고, 군율이 최우선이다.

기책? 묘책?

그런 것은 도박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도박은 되도록이면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내 본심이다.

한두 번은 딸 수 있겠지만 계속 도박판에 남아있으면 결국은 본전을 털리고 만다.

아니, 본전을 잃는 정도라면 양호하다.

나 같이 뿌리가 약한 자는 한 번 패배하는 것만으로도 파산이고, 목숨을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다.

나는 내 원칙에 따라 정찰을 준비했다.

흔히 군에 대해 잘 모르는 자들이 성을 포위한다고 하면 강강술래를 하듯 길게 늘어선 병사들을 상상한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병사를 운영하면 기습해 나온 기병대에게 단숨에 쓸려나간다.

일렬로 길게 늘어선 병사 따위를 어디에 쓴단 말인가?

물론 연발 소총이나 지뢰, 크레모아와 철조망으로 무장한 현대의 군대라면 그래도 된다.

충분한 화력이 있으니까.

그러나 여기는 화약 무기 따위는 없는 냉병기의 시대이고, 평범한 병사 열 명 정도는 식전 운동처럼 쓸어버릴 수 있는 기사가 흔한 세계다.

한두줄로 늘어선 병사들이 경보기 역할을 하겠다면 모를까 조금이라도 적과 맞서서 싸우기를 기대한다면 무리지어 진형을 만드는 것이 정석이다.

마치 그 자체로 작은 성채처럼 기능하는 진형을 성 주위에 두는 것이다.

지금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아르보그 공작군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목책 사면에 각각 만인대에 해당하는 병력으로 진형을 짜고 전투를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간 볼 것도 없이 단숨에 밀어버리겠다는 의도가 훤히 보일 정도였다.

왜 이럴까?

시간을 끌면 끌수록 공작군이 유리한데?

급하게 굴어야 할 이유라도?

나는 임시 망루 위에 올라가서 공작군의 포진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미니맵과 함께 비교를 했다.

미니맵이 업그레이드된 뒤로는 지형과 사람뿐 아니라 건물이나 임시 구조물까지 나 표시된다.

그것도 입체로.

그 결과는 흥미로웠다.

우리에게 과시하듯 식량을 보이고 이동한 수레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서 모여 있었는데, 더 이상의 다른 수레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100여 대의 수레가 전부인 것이다.

심지어 싣고 있던 물품을 내린 수레는 다시 헤필드 방면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는 것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장소와 정 반대쪽에 비슷한 임시 가건물이 세워져 있었고, 그곳에는 원래 우리와 대치하고 있었던 병력이 대기 중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더 많은 식량이 있었다.

미니맵상으로 수량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수레가 있던 곳과 비교하면 몇 배는 될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까 수레로 나르던 것이 2일분이었다고 했으니 대충 10일분 정도?

나는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문제는 식량이었다.

어떻게 저 식량만 불에 태워버릴 수 있다면 공작군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틀 치의 식량을 가진 군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으니까 말이다.

나는 즉시 엘리아슨 경에게 향했다.

엘리아슨 경은 연합자치령의 군대를 총괄해서 지휘하는 중이었다.

그는 곧 닥칠 대규모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준비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를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내가 확인한 사항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백작님께서는 공작군의 보급 창고가 둘로 나뉘어져 있고, 한쪽만 불로 태울 수 있다면 공작군의 보급 능력이 없어진다고 확신하시는 거군요.”

“그렇지요. 그런데 문제는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곡물 창고를 불로 태우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지요. 그런데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기가 어렵습니다. 소수의 결사대로 치고 빠져야 하는데 불을 지르고 충분히 번질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런 문제라면 제게 해결책이 있습니다. 혹시 파웰 상단을 호송하셨을 때 같은 일행이었던 마법사 피요트르를 기억하십니까?”

“예. 불을 사용하던 자. 아! 그가 여기 있습니까?”

“예. 용병으로 참전했지요. 그리고 실력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쓸만할 겁니다.”

엘리아슨은 한차례의 전투가 끝나고 난 후의 밤중에 출발할 것을 권했다.

밤은 금방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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