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구출은 성공 그러나
아돈슨은 예상보다 일찍 만날 수 있었다.
저 넓은 창고 지역을 돌아다니며 불을 지른다고 해서 과연 만날 수나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불바다가 된 창고 지역에 남아 있는 사람이 얼마 없어서 미니맵을 보며 조금 돌아다니다 보니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거느리고 들어갔다는 천 명에 달하는 영지군은 절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전투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 테니까 낙오병으로 인한 손실일 터였다.
물론 진짜 낙오병은 얼마 안 될 것이라고 본다.
아무래도 반쯤 미친 것처럼 보이는 아돈슨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위험해 보이니 슬금슬금 떨어져 나온 것이 진실이겠다.
알아서 살길을 찾아 떠난 자들에게 뭐라고 하기도 힘들었다.
간신히 아돈슨을 찾아서 만나보니 반쯤 맛이 가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전투가 그에게 정말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아돈슨의 명령에 따라 아직도 창고에 불을 지르며 이동하고 있던 남아있는 병사들이 정말 대단해 보일 정도였다.
“아돈슨 경! 지금 당장 후퇴해야 해. 같이 갑시다.”
“보급품! 식량! 여기서 다 태워버리지 않으면 안 돼!”
나는 지금까지 아돈슨 경을 찾으며 지나쳤던 창고 구역의 거대한 창고들을 떠올렸다.
불에 활활 아주 잘 타고 있었다.
“당신은 할 만큼 했어. 더 이상 여기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전투는 좆도 모르는 내 명령으로 다 죽어버렸어! 괴물 새끼들이 내 부하들을 싹 다 찢어발겼다고! 당신이 후퇴하라고 했을 때 곧장 후퇴했어야 했어.”
아돈슨은 마지막 말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이 사람, 전투 충격이 상상 이상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한숨을 쉬고 아돈슨의 턱을 가볍게 올려쳤다.
아돈슨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쓰러지려던 그를 잡아서 옆에 있는 기사의 어깨에 얹어 주었다.
“자네는 이름이 뭔가?”
“블레인 아돈슨입니다. 백작 각하.”
“아돈슨 경과는 관계가 어떻게 되나?”
“조카뻘됩니다.”
“한두 시간 정도는 정신을 못차릴 거야. 아돈슨 경을 자네에게 맡기지.”
수행기사가 친척인 것을 보니 아무래도 여기에 남아있던 병사들은 아돈슨 경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자들인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이지.
만약 이들이 아니었다면 아돈슨은 창고 구역에서 날뛰다가 제풀에 지쳐 어느 구석에서 어떻게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돈슨까지 챙긴 후로는 곧장 후퇴였다.
미니맵을 보면 아직도 연기 가운데 흩어져서 헤매고 있는 우리쪽 병사들도 보이지만 몇 명씩 헤매는 경우까지 손을 뻗을 여유까지는 없었다.
공작군의 생각이 바뀌어서인지 본격적으로 병력을 헤필드로 밀어넣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시시각각 미니맵을 잠식해오는 붉은 점을 보며 후퇴하는 병사들을 재촉했다.
다시 헤필드 외곽으로 나와서야 비로소 시야가 트였다.
그제서야 나는 병사들의 상태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헤필드 점령 후 쉬지도 않고 연달아 전투를 벌였으니 병사들의 상태가 영 아닌 것은 예상 범위내였다.
온몸에는 연기 내음이 배어 버렸고, 그을음과 피가 병사들의 얼굴과 갑옷에 얼룩졌다.
부상을 입은 자도, 무기까지 버리고 온 자도 흔했다.
그중에는 지쳐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자들까지 있었다.
병사들의 상태는 별로 안 좋았지만 그래도 탈출에 성공한 병사들이 많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나는 연기에 휩싸여 내부를 들여다볼 수도 없는 헤필드를 뒤로 하고 병사들을 재촉하여 우리가 원래 주둔했던 곳으로 향했다.
올 때는 하루였지만 갈 때는 삼일이나 걸리는 긴 장정이 되어 버렸다.
*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불려면 좀 더 일찍 불 것이지 연합자치령인가 하는 자들이 다 빠져 나가고 난 후에야 바람이 불다니!
블레인은 모습을 드러내는 헤필드를 보며 신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주변에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르보그 공작도 행방불명인데 공작가의 유력한 후계자로 언급되는 그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대신 그는 주먹을 쥐고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 정도는 괜찮았다.
헤필드는 완전히 불에 타서 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멀쩡한 건물은 없었고, 대부분 불에 타는 중이거나 불에 완전히 다 타 버린 후였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헤필드의 화재 따위가 아니었다.
헤필드의 전체 면적에서 10%를 차지하고 있는 창고 구역이 아직도 불에 타고 있다는 것이 진짜 심각한 문제였다.
창고 구역의 외곽은 이미 전소해 버려서 창고 안에 있던 쌀과 밀은 다 숯이 되어버린 후였다.
아직도 불에 타고 있는 안쪽의 창고 구역은 화재 규모가 너무 거대해서 어떻게 손도 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정도 상황이면 비라도 쏟아지기를 기도하며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수십 년간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본 경험많은 용병대장들 역시 불을 끄고는 싶지만 방법이 없다며 손을 들어버린 후였다.
그러나 블레인은 창고 구역을 포기할 수 없었다.
창고 구역에 있는 식량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일주일 후부터는 그 자신부터가 굶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했다.
그때 도시로 들어갔던 아스워드가 그에게 돌아왔다.
그를 따르는 거인족과 수인족들의 모습이 위협적이었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블레인. 아무래도 윌리엄 백작이라는 자가 직접 왔었던 모양인데?”
“칼마르의 여백작과 결혼해서 백작까지 된 그 행운아?”
“그래. 그 사람. 기마부대를 이끌고 와서 여기에 고립되었던 자기편을 구출해 간 모양이야. 낙오된 놈들을 족쳤더니 금방 이름이 나오더라고.”
아스워드는 얼굴과 갑옷에 묻은 검댕을 지울 생각도 없는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블레인은 그의 옆에 가서 섰다.
아스워드가 거인족이라서 그런지 앉아 있는 그의 어깨가 블레인의 어깨와 비슷한 높이에 있었다.
“아돈슨이라고 했던가? 여기서 병력을 지휘했던 자가?”
“별로 실력이 좋은 녀석은 아니었지. 자기 병력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서 중구난방으로 흩어버렸으니까. 그래도 마지막 판단은 나쁘지 않았어. 젠장. 창고 구역에 불을 지르다니 이 비겁한 놈이.”
“자기 병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것은 너도 마찬가지였다. 아스워드. 연기 속에서 길을 잃고, 거기다 자기가 지휘할 병력까지 잃어버리다니 그게 무슨 추태인가?”
“그래도 겁을 집어먹고 도시 밖에서 머뭇거리던 너보다는 낫지 않을까?”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경쟁자의 눈빛이었다.
양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눈빛을 통해 드러났다.
아르보그 공작이 행방불명되고 난 이후로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원로원의 늙은이들은 행방불명이라고 했지만, 그게 사실상 사망을 의미한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었다.
그저 공식적인 후계자가 정해지기 전까지 혼란을 방지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말을 돌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슬슬 후계자를 정해야 했다.
이대로 시간을 계속 끈다면 어디선가 문제가 터질 것이 분명했다.
지금 이 자리에는 5만에 가까운 대군이 모여 있다.
그것도 어중간한 영지병이 아니라 전투와 경험을 쌓은 정예병이 대부분이다.
만약 이들을 장악할 수 있다면?
남작령?
백작령?
그 정도는 손가락으로 벌레를 눌러 죽이는 것처럼 으깰 수 있다.
아무리 원로원의 늙은이들이 무섭다고 해도 개인이 힘이라는 것은 일개 남작령만도 못한 법이다.
개인은 숫자를 이길 수 없다.
블레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용병대를 밀어 넣어야겠어. 손해는 좀 보겠지만, 식량이 없어서 스스로 군대를 해산하는 바보짓은 하지 말아야지. 블레인. 네 휘하의 용병대도 데려간다.”
“내 휘하의 병력까지?”
“그러면 너는 식량을 분배받을 생각이 없는 거야?”
“알았다. 데려가. 내가 확인해 볼 테니까 너무 심하게만 굴리지 마.”
“걱정말라고. 다 같은 아르보그 공작가의 병사들이야. 내게도 소중하다고.”
아스워드는 거인족 혼혈이지만 거인족의 기질을 더 많이 닮았다.
아르보그 공작이 거인족 혼혈치고는 인간처럼 굴었다면, 아스워드는 정반대의 성향이었다.
지금도 빌려가는 용병부대가 소중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목적을 위해서라면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다 불 속으로 밀어넣을 것이다.
그러나 블레인은 그러한 점을 알면서도 용병 부대를 그가 데리고 가게 해 주었다.
사실 용병 부대는 블레인에게도 골칫거리였다.
돈을 주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용병부대의 특성상 언제나 자신을 지지하리라는 확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더 많은 돈으로 유혹을 한다면 기꺼이 깃발을 바꿔들 놈들이 태반이다.
물론 나름대로 명성있고 전통있는 용병대는 그런 짓까지는 하지 않는다.
장사를 오래 하고 싶다면 신용이 중요하니까.
그러나 아주 더 많은 돈으로 유혹을 한다면?
그러면 말이 달라지겠지.
블레인은 공작군의 전력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용병부대의 충성을 확보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스워드에게 용병부대를 내준 것이다.
아스워드가 용병 부대를 거칠게 다루고, 심지어 그들의 죽음조차 상관하지 않는다면 용병 부대의 민심이 누구에게 쏠릴지는 불을 보는 것처럼 뻔하다.
용병들이 반기를 드는 경우는 돈을 주지 않는 경우와 죽음으로 내모는 경우뿐이라고 하지 않던가?
블레인은 신이 나서 용병대장들을 불러모으는 아스워드의 모습을 보며 가까운 미래를 확신했다.
아무리 가문의 원로원에 있는 노인들이 거인족과 수인족에게 경도되어 있다고 해도 쉽게 밀리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
원래의 주둔지에 돌아오자 그 며칠 간의 기간동안 남아 있던 병력은 성채나 다름없는 거대한 건축물을 지어놓은 후였다.
비록 나무로 지었다고는 하지만 외부의 목책과 내부의 목책까지 이중으로 건설한 모습을 보면 보통 노고가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외부 목책의 바깥쪽으로 물이 마른 해자를 파고, 기마돌격을 막기 위해 군데군데 구덩이까지 파놓은 것을 보니 내 부하 중에 축성에 일가견이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병사들이었다.
지금까지 압도적인 우세로 전투 같지도 않은 전투를 벌이며 승승장구를 해 온 병사들에게 패배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보통 패배도 아니고 절반 가까운 병력을 잃었다는 점 때문에 더욱 심각했다.
특히, 소속을 잃고 연기 속에서 헤매다가 구출된 병사들의 겁먹은 표정을 보면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분명 전투 중에 조금만 불리해도 공황에 빠져서 도망칠 것이 뻔히 보였다.
나는 우선 겁먹은 자들을 노역에 동원헀다.
노동에 지쳐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패배에 이를 악물고 복수를 외치는 귀족과 기사들을 그들 사이에 배치했다.
독전대였다.
그들이라면 도망치는 병사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
더해서 나는 도망치면 죽인다는 내 의지를 아무리 멍청한 병사라도 알아듣도록 명확하게 반복해서 전달했다.
물론 아돈슨 군 전체가 그렇게 겁을 집어 먹은 것은 아니다.
걱정할 정도로 문제가 되는 자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지휘하던 병사들의 사기는 아직 괜찮았다.
특히, 칼마르 출신들의 충성심과 사기는 믿을만했다.
이래서 동향 출신을 심복으로 쓰는가 싶을 정도였다.
전투 준비를 하며 이것저것 만들고 있자니 결국 아르보그 공작군이 나타났다.
1주일이 지난 후였다 .
그들은 우리가 보게끔 엄청난 수레의 행렬을 끌고 왔다.
그리고 우리 앞에서 수레에 실린 가마니를 열고 그 안에 쌀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것도 한두 수레가 아니었다.
수레를 외부 목책에서 보일 정도의 위치까지 끌고 온 후 수레에 실린 곡물을 보여주고 다시 끌고 가는 일을 반복했다.
무엇 때문에 저런 짓을 하는지는 알겠다.
우리 쪽에서도 눈치가 빠른 자들은 얼굴이 굳어지는 것이 보일 정도다.
그러나 과연 보이는 그대로일까?
진짜 저들이 5만이 넘는 병력에게 공급할 만한 충분한 식량을 확보했다고?
창고 구역에서 불타고 있던 거대한 창고들을 본 나로서는 믿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