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65화 (165/248)
  • 165. 후퇴하는 자들

    “거인족이야! 거인족이라고! 저걸 어떻게 상대하라고! 으아아악!”

    울부짖는 것처럼 비명을 지르다가 거인족에게 잡혀서 내동댕이쳐지는 부하를 본 용병대장 울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거인족 한둘이 따로 떨어져 있다면 모를까 수십 명의 병사들과 함께 움직이는 거인족은 어떻게 상대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간혹 실력있는 기사들이 뛰어들어서 거인족을 죽여버리는 묘기를 부리기도 했지만, 거인족 몇 명을 죽인다고 해도 전황에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적진에 뛰어들었던 기사들이 거꾸로 잡혀 죽기 일쑤였다.

    공작군의 숫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나를 죽이면 둘이 나타나고 둘을 죽이면 넷이 달려드는 판이니 앞일이 암담하기만 했다.

    만약, 몇십 미터 밖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연기가 짙지 않았다면 숫자도 얼마 안되는 연합자치령의 군대 따위는 진작에 다 쓸려나갔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기습적으로 달려든 거인족이 울파의 병사 하나를 잡아서 아직도 방진을 유지하고 있는 쪽으로 던져 버렸다.

    방진에 서 있던 병사 몇 명이 날아온 병사에 깔려서 나뒹굴었다.

    울파의 고참 용병들이 거인족을 향해 재빠르게 장창을 들이대고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쇠뇌수가 방아쇠를 당겼지만, 거인족은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게도 잽싸게 뒤로 물러서서 공작군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손등과 팔에 박혀있는 쇠뇌살로는 통증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용병대장 울파는 이제는 후퇴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아니, 벌써 한참 전에 후퇴했어야 했는데 도대체가 후퇴할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애초에 받은 명령이야 중앙의 창고 구역을 다 불에 태울 때까지 버티라고 했지만, 그것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도 알고 그의 부하들도 아는 바였다.

    단지, 적에게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순간이 가장 위험했기에 적당한 때를 노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의 부하들 역시 경험이 좀 있는 용병대답게 울파의 판단을 믿고 버티는 중이었다.

    그러나 기사들도 거의 다 죽었고, 귀족들은 진작에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더 이상 버틴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울파는 마지막으로 망설였다.

    절반 넘게 죽을 것을 각오하고 그냥 뒤돌아서 달려?

    연기 때문에 주변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어쩌면 생각처럼 큰 피해가 나지 않을 수도 있잖아?

    희망이 잔뜩 섞인 유혹이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결국 신호용 호루라기를 손에 잡는 순간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뒤에서?

    포위된 것인가?

    울파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돌아섰다.

    현기증이 나면서 차가운 기운이 몸을 쓸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크게 호흡을 들이키며 손에 쥔 호루라기를 입에 대려는 그때.

    연기를 헤치고 기병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연이어 기병이 계속 나타났다.

    들고 있는 깃발은 연합자치령의 깃발이었다.

    울파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호루라기는 다시 목에 걸었다.

    순간적으로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서 다리를 휘청이기까지 했지만 모두가 새로 등장한 기병에게 시선을 집중한 덕분에 울파의 추태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기병대는 곧장 공작군을 향해 돌진했다.

    선두에 선 기사는 울파도 얼굴을 아는 사람이었다.

    칼마르의 백작 윌리엄.

    원래 여백작의 부군으로 유명세를 탄 자였지만, 최근에는 연달아 전투에서 승리를 하면서 그에게 유형무형의 권력이 집중되고 있다고 한다.

    삼백년 전의 내전기를 기억하는 귀족들이 안전과 보호를 바라며 그의 밑으로 몰려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자신같이 백 명 남짓한 용병대를 이끄는 용병대장으로서는 그 앞에서 똑바로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무리다.

    윌리엄 백작과 그의 기병대는 양쪽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중간을 파고 들더니 그대로 공작군을 옆에서 찔러버렸다.

    지금까지 연합자치령의 군대를 계속 밀어붙이던 공작군의 기세는 기병대의 돌격 앞에서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기병대 돌격의 가장 선두에는 윌리엄 백작이 있었다.

    바로 그 뒤를 몇 명의 기사가 뒤따랐고, 그 뒤에는 거대한 연합자치령의 깃발이 따라갔다.

    기수 옆에는 만약의 경우 기수를 대신할 예정으로 예비 기수 몇 명이 함께 움직이며 기수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수백에 달하는 기마병 집단이 공작군을 짓밟으며 따라갔다.

    윌리엄 백작은 기다란 철창을 휘두르며 공격 범위 내에 있는 공작군의 병사들에게 악몽을 선사하고 있었다.

    꿰뚫리고 잘리고 베였다.

    즉사한 자는 얼마 없지만 중상을 입은 자는 숱하게 쏟아졌다.

    간호할 사람도 없는 이런 전쟁터에서는 중상자도 죽은 자와 다를 바가 없다.

    울파는 윌리엄 백작 앞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의 아수라장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규칙적으로 8자를 그리며 움직이는 철창의 잔상도 아름다웠고, 피를 허공에 뿌리며 쓰러지는 공작군의 모습도 아름다웠다.

    이마에 철창이 박히는 순간 일그러지는 거인족의 얼굴도 아름다웠다.

    그대로 그림을 그린다면 예술 작품이 하나 나오지 않을까 싶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에는 무엇인가 자신을 자극하는 것이 있었다.

    일격에 방패와 사람을 한꺼번에 꿰뚫어 버리고, 그대로 연계하여 8자로 철창을 휘두르며 좌우의 적을 베어버리는 모습에서 뭔가 특별한 것이 느껴졌다.

    울파의 얼굴이 멍해지고 시선은 윌리엄 백작에게 고정되었다.

    그때였다.

    “대장! 후퇴하랍니다!”

    “어? 뭐라고?”

    “윌리엄 백작님이 이 일대의 병력은 즉시 후퇴해서 중앙의 창고 구역으로 이동하라고 했답니다. 기사 하나가 와서 전달하고 그냥 갔어요!”

    “아! 그래. 후퇴해야지. 명령이면 후퇴해야지.”

    울파는 부하와 대화를 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무엇인가 놓쳤다는 것을 자각했다.

    어쩌면 그것은 선배 용병들이 가끔 말하던 깨달음의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조금만 더 보았다면!

    울파는 허한 느낌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윌리엄 백작은 이미 연기 속으로 사라져서 보이지도 않았다.

    *

    전선은 엉망진창이었다.

    만약 연기로 인해 주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아돈슨 군은 진작에 붕괴해서 모조리 도주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천 명 또는 이천 명씩 나누어져서 중간중간 연결이 끊어진 채 고립된 아돈슨 군이 각자 알아서 공작군을 견제하고 있는 꼴을 미니맵을 통해 파악했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고립되어버린 아돈슨 군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공작군의 주력이 헤필드 내부로 밀고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다.

    왜 공작군이 도시 내부로 밀고 들어와서 승리를 확정짓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아돈슨 군이 너무 잘 싸워서 계속 병력을 밀어넣어서 피해를 키우는 것이 싫었을 수도 있고, 시야를 가리는 연기 속에서 악전고투를 하고 싶지 않아서 일 수도 있다.

    어쩌면 지휘부의 의견이 갈려서 일부는 안으로 밀고 들어오고, 일부는 밖에서 견제하는 통에 혼란이 생겨서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히 바람이 세게 불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도시를 가득 매운 연기가 바람에 밀려나면 본격적으로 병사들을 밀어넣을 계획으로 말이다.

    어쨌든 이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곳곳에 흩어진 채 고립되어 있는 연합자치령의 군대를 수습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바람이라도 불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기병대를 재촉하며 헤필드 외곽을 순회했다.

    우리편을 찾는 것은 쉬웠다.

    미니맵을 보면서 우리편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를 따라오는 기마부대는 정확한 내 인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무조건적인 추종자가 되어 버렸다.

    마치 종교지도자를 맹신하는 신도들의 느낌이랄까.

    그럴 만도 하다.

    나는 앞도 보이지 않는 연기 속을 헤치며 흩어져 있는 아돈슨 군을 찾아내고, 겸사겸사 대치하고 있는 공작군까지 짓밟아 버렸다.

    이것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계속 반복하니 이게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는 것이 당연하다.

    신비가 보편적인 세상이다 보니 기적이라고는 말하지 않지만 그래도 뭔가 특별한 사람 취급을 해주는 것이다 .

    나는 기마부대의 가장 앞에 서서 일반 기병이 상대하기 곤란해하는 적들을 우선적으로 공격했다.

    거인족들을 연달아 죽여 버리고, 수인족 역시 눈에 보이는대로 처리했다.

    제대로 방진을 짜고 움직이는 대열에는 반드시 뛰어들어서 날뛰었다. 그들 사이에 숙련된 병사나 기사가 보이면 바로 창질을 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목표까지 도달했다.

    “힘내라! 이제 마지막이다!”

    내 격려에 아직까지 나를 따라오는 삼백여 명의 기병이 열렬하게 호응했다.

    “오오!”

    “윌리엄 백작 각하 만세!”

    “적들에게 죽음을!”

    연이은 전투에 절반 가까운 수를 잃었다.

    그러나 환호하는 소리만 들으면 오백 명이 다 있을 때보다 사기가 더 높은 것 같았다.

    나는 부하들과 함께 순회공연의 마지막 순서에 돌입했다.

    마지막 고립 부대에는 5백 명 남짓한 병력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치열한 전투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할 것도 없이 곧장 공작군을 향해 돌진해야 했다.

    “구원군이다!”

    “살았다!”

    우리를 본 아돈슨 군의 병사들은 미친 것 같은 환호성이 울리며 환영했다.

    죽음 직전에서 돌아온 것 같은 기쁨과 흥분이었다.

    공작군의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우리의 등장에 당황하며 연신 물러섰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처럼 쉽게 되지는 않았다.

    이미 일부 진형이 무너져서 난전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물러설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난전에 뛰어들기 보다는 후속하는 공작군을 요격했다.

    결국 성급하게 아돈슨 군 내부까지 밀고 들어왔던 공작군은 퇴로를 열어준 덕분에 일부가 살아서 돌아가기는 했지만 많은 수가 전사하고 말았다.

    “윌리엄 백작 각하! 왜 퇴로를 열어주신 겁니까?”

    지휘하고 있던 귀족이 달려와서 항의했다.

    얼굴만 한 번 본 사람이었다.

    “후퇴해야 되오. 지금 당장.”

    “예? 지원군이 온 것이 아니었습니까?”

    “지원군은 없소.”

    내 말에 귀족은 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지원군이 없다니. 저는 여기서 가문의 기사를 다 잃었습니다. 그런데 후퇴를 말씀하시면 전······”

    제국의 귀족들은 아직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많았다.

    내전 시기에는 살아남는 것이 미덕인 법인데 이렇게 체면을 따지면서 머뭇거린다.

    “전투가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것으로 생각하나? 경의 기사들을 위해서라도 다음을 기약해야지. 지금 당장 병사들을 지휘해서 후퇴하도록.”

    나는 일부러 강하게 말했다.

    귀족 하나 때문에 몇백에 달하는 숙련된 병사들을 잃을 수는 없다.

    그래도 이 젊은 귀족은 말귀를 알아듣는 편이었다.

    기마부대는 공작군을 견제하며 남아있다가 후퇴하는 아돈슨 군을 따라 이동했다.

    미니맵에는 창고 구역으로 향하는 아군이 하나 가득이었다.

    빈자리를 채우듯 이동하는 공작군 역시 엄청난 규모였다.

    지체할 시간이 없을듯 했다.

    혹시 바람이라도 불어서 연기가 밀려나가서 발목이 잡히는 경우를 생각하면 서두를수록 좋다.

    마지막 목표는 아직도 창고 구역에서 불을 지르고 있을 아돈슨 이었다.

    베르그렌이 혼자 독주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아돈슨은 반드시 챙겨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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